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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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llo, my stranger 28

SCIENCE AND LOVE 2016. 3. 7. 22:03



Hello, my stranger 28

 

 




[bgm] Early winters - Count me in






“이거 찾아요?”

 

 

 



#

 


 

비행기를 오랜 시간 타고 있으면, 가끔 할 일이 없어 모니터에 뜨는 세계 지도 위 비행 경로를 멍하니 쳐다본다. 그리고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서 태평양을 지나 지구 반대편을 가게 된다고 하면, 아침에 출발해도 그 곳에 같은 날 아침에 도착한다. 왠지 모르게 공짜로 하루를 얻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우리는, 돌아올 때에 그 시간을 그대로 다시 반납하고 오게 된다. 그리고 편서풍에 맞서, 더 힘겹게, 더 긴 시간을 돌아와야 한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이런 과학적인 이야기냐 하겠지만, 내 말은- 아무래도 지금 내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아직 그 곳에 머물고 있는 우리의 시간을 아끼려 조금 일찍, 내게 돌아온 것 같다는 말이다. 이 말은 좀 과학적인 것 같진 않지만, 아무튼.

 

 

“……”

 

 

목소리가 울린 집 앞 골목길 언덕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 곳엔 바로 그가, 민준이 서 있었다. 여행 내내 가지고 다니던 가방을 메고, 옆엔 큰 캐리어를 세워두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송이를 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나타나,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그가 갑자기 순간 이동처럼 눈 앞에 나타난 줄 알았다. 순간 이동보다는 훨씬 더 긴 시간이었을 테지만.

 

어쩌면 오늘 국제 우편으로 왔을 지도 모를 사진 한 장이, 그의 손에 직접 들려 있었다. 놀라서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은 채로 서 있는 송이와 눈이 마주치자, 민준이 뭐 못 볼 거 봤어요? 라고 웃으며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준비할 새도 없이 금세 가까이 다가와 선 민준. 지그시 내리깐 눈이 줄곧 한 곳을 향해 있다. 송이는 아직 실감할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손에 들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드디어 보네.”

“……”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몇 시간이나 걸린 지 알아요?”

“……”

“마이애미에서 LA까지 6시간, 새벽 비행기 타려고 대기 시간만 또 6시간, LA에서 여기 오는 데에 13시간…”

 

 

보자마자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여길 얼마나 힘들게 왔는지 늘어놓는 민준을, 가만히 본다. 그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 꼬박 24시간을 넘게 달려왔다는 민준의 얼굴엔 피곤이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면도도 안 했는지, 아니 못했는지 조금 낯설게도 수염도 거뭇하게 자라 있었다.

 

그럼 대체 언제 출발 했다는 거야. 좀 전에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여기로 온 거면, 어제 새벽쯤 LA에서 출발 했단 얘긴데, 그게 여기 시간으로 인가, 거기 시간으로 인가… 송이는 얼른 생각을 해보지만 계산이 되질 않았다. 어쨌거나 뭐하러 그 긴 시간을 고생을 하며 돌고 돌아 온 건지, 언뜻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해는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히 의심했던 것 같다. 혹은 자신이 없었거나. 우리의 오래 되고 복잡한 이야기들에 대해…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 대책 없이 오래요?”

“그러게요. 근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가고 싶은 곳이 여기뿐이라.”

“……”

 

 

그래서 그가 말하고 있다. 가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마음이 가는 대로만 따라온 길의 끝 목적지에, 바로 내가 있다고, 그가 내게 직접 말하고 있다.

 

평소처럼 마음과는 반대로 내뱉는 퉁명스러운 말도, 지금은 할 수가 없다. 한없이 정직하고 순수한 이 말에, 이 마음에, 어떻게 트집을 잡고 상처를 내겠는가.

 

 

“……”

“……”

 

 

두 사람은 송이의 집 대문 앞에서 한동안 말 없이 그렇게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는 웃고 있고, 송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이 순간은, 샌 안토니오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쳤던 상황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우리가 그 짧은 사이에 정말 많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웠기에.

 

 

“미국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어요? 꼴이…”

“아아. 좀 그렇죠? 집에 들렀다 올 걸 그랬나.”

 

 

말 없이 바라만 보며 재회의 인사를 하는 시간 동안에야 그의 존재가 조금 실감이 난다. 그의 충혈된 눈과 수염까지도 실감이 난다. 송이가 위 아래로 쭉 훑어보며 하는 말에 민준이 멋쩍게 웃으며 턱의 까칠한 수염을 만지작거린다. 말했잖아요, 오는 길이 험난했다고.

 

 

“밥은, 먹었어요?”

“아니요.”

“…그럼, 같이 먹을래요? 나도 먹어야 되는데.”

 

 

송이는 계속 한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들어보이며 민준에게 물었다. 먼저 그렇게 물었으면서도 뭔가 민망해서 무거워 죽겠네- 라며 짐을 옮겨 들고 빨개진 왼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민준의 답이 조금 늦어지는 것 같아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민준이 눈을 맞추고 나서야 대답한다.

 

 

“…좋아요.”

 

 

 

 



 



 

 

#


 

 

“...청소를 안 한지 좀 됐는데.”

“깨끗한데요, 뭐.”

“아, 짐은 아무데나 둬요. 그 카펫 위에만 빼고… 비싼 거라.”

“나는 카펫 밟아도 되는 거죠?”

“다, 당연하죠, 뭔 소릴… 편한데 앉아요.”

 

 

일단 같이 들어오긴 들어왔지만 집 안에 들어서자 마자 후회를 했다. 그러지 말 걸. 그렇다고 정말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바다를 건너 온 사람한테 다시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송이는 바로 혼자 쪼르르 주방 쪽으로 가 식탁 위에 장 봐 온 것들을 꺼내며 손 끝으로만 민준에게 안내를 했다. 민준은 거실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소파 위에 앉았다.

 

송이는 혹시 민준이 보면 안 될 거라도 있나 머리 속으로 빨리 생각을 해보았다. 빨래는 어제 다 걷었고, 집에서 가끔 홀짝거리며 먹은 수많은 맥주 캔들은 다용도실에 잔뜩 모아두긴 했지만, 민준이 거길 열어볼 일은 없을 것이다. 거실에 담요와 DVD, 매니큐어 몇 개가 나뒹굴고 있는 거 빼곤, 괜찮은 것 같다.

 

 

“밥 해야 해서, 한 3-40분 걸릴 것 같아요.”

“네, 천천히 해요.”

“그냥 별 거 없는데, 내가 먹는 대로 해도 되죠?”

“얻어먹는데 설마 제가 9첩 반상 해달라겠어요.”

 

 

소파에 어색하게 앉아있는 민준에게 티비 봐도 된다고 말하고선, 아침이라기엔 조금 늦고 오히려 점심에 가까운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집에서 밥을 잘 해 먹진 않기 때문에 잘 할 자신은 없었다. 그나마 실패할 확률이 적은 메뉴를 택하긴 했는데, 하기 전부터 걱정이다. 나 혼자 먹으면 무슨 맛이든 그러려니 하고 먹을텐데.

 

송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거실 안에 들어와 있는 민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민준은 소파에 앉아 뻐근한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

 

 

그는 굉장히 지쳐보였지만, 함께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눈을 마주치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는다. 보다 못해 송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 씻을래요?”

“아…”

“좀 피곤해 보여서. 씻고 싶을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밥 차리려면 좀 남았으니까.”

“...그래도 될까요.”

“괜찮아요. 욕실은 저 쪽에 있어요.”

 

 

송이의 말에 민준은 그래도 되나, 하는 표정으로 눈치를 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런 대화를 하는 게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것 같긴 하지만, 차라리 그가 욕실 쪽으로 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니 긴장한 마음이 한결 풀리는 기분이다. 계속 민준이 신경 쓰여 반은 싱크대에 흘려 보낸 쌀들을 아깝다고 생각하며 다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괜히 전화했다.’

‘왜요’

‘그냥, 끊기 싫으니까…’

 

 

3일 전의 전화에서 그는 플로리다 쪽으로 간다고 했다. 아마 그는 그 쪽 시간으로 어제 새벽에 LA에서 비행기를 탔을 것이고, 마이애미에서 LA로 오기 위해 이틀 전 아침에 출발했을 것이다. 그는 전화 통화를 하고 바로 다음 날부터 그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고도 가장 먼저 찾아온 곳이 여기라니. 그의 말에 의하면 그 모든 게 여길 찾아오기 위함이라지만.

 

 

민준은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인 듯 하지만, 은근히 대책 없는 부분도 있다. 수 틀리는 게 있으면 사람들 앞에서 거침없이 비아냥대는 거나-예전에 술 자리에서 마주쳤을 때 그랬다-, 샌 안토니오에서 길을 헤맬 때 무작정 한 방향을 향해 걷는 거나, 그저 잡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손을 잡는 다거나, 정강이를 차이는 것과 같은 뒷일을 알면서도 입을 맞춘다든지, 오늘도 송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집 앞으로 찾아오는 것과 같은, 대책 없음.

 

 

밥솥에 밥을 안치고, 찌개 거리를 준비해서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그러는 동안 생각했다. 그의 대책 없음이 누구한테만 해당되는 행동인지.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요?”

“아… 나왔어요?”

 

 

같은 향을 담은 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타났다. 다시 혼자서 느끼는 조금의 긴장. 송이가 수염을 마음에 안 들어할 거라 생각했는지 민준은 면도까지 하고 나왔다. 수염도 뭐 나쁘지 않던데.

 

 

“거의 다 돼 가는데, 좀만 기다려요.”

 

 

민준을 도로 거실에 앉히고 조급하게 움직였다. 밥은 거의 다 되어가는데 나머지가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다. 거창한 걸 만드는 것도 아닌데 주방은 점점 지저분해 지고 먹기도 전에 설거지 거리가 쌓여갔다.

 

민준은 소파에 앉아 티비를 틀고 있었다. 지루한 건지, 채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돌려보고는 그냥 다시 처음 채널에 멈춘다. 괜히 또 신경이 쓰인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휴.”

 

 

그러고도 한참을 부산스럽게 식사 준비를 했다. 한 거라곤 겨우 밥, 찌개, 간단한 반찬 2개, 그냥 포장만 벗기기만 하면 되는 것들 2개, 엄마가 유일하게 잘하는 김치 뿐인데.

 

급하게 밥을 공기에 담고, 평소 같으면 냄비 째 먹었을 찌개도 찬장 깊숙한 곳에서 그릇을 꺼내 담고, 반찬도 깔끔하게 담아내고, 수저도 짝을 맞춰 준비하고. 진짜 안 하던 짓까지 별 걸 다 한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겼다. 아무래도 앞으로 밥 차려주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아니, 그래도 결혼하면 조금은 해야 하나… 요즘 시대에 집안일에 남녀 구분이 없긴 하다만… 어머. 지금 내가 뭐래니. 단단히 미쳤구나, 미쳤어. 아니 뭐 근데 상대가 저 인간이라는 말은 안 했다, 난.

 

 



“저기….”

“......”

“......?”

 

 

식탁 위에 차리기만 하면 되어서 정신 없는 상태로 뒤 돌아 민준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내내 신경 쓰였는데 발등에 불 떨어지니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고개를 들어 거실 쪽을 보니, 티비는 혼자 떠들고 있었고, 그는 소파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

 

 

송이는 손에 쥔 수저를 식탁에 조심히 내려놓고, 거실 소파에서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자고 있는 민준을 바라보았다. 깨워야 하나, 밥은 먹고 자라고 할까- 고민했다. 송이는 발걸음의 소리를 낮추고 거실 쪽으로 갔다.

 

 

“…도민준씨.”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려 새우잠을 자면서도 그 사이 깊게 잠이 든 모양이다. 정말 얼마나 피곤했으면, 남의 집에서, 그것도 이 천송이 님의 집 거실에서 자다니. 이렇게 내가 바로 옆에 있는데 – 송이는 그냥 민준을 자게 내버려두기로 했다.

 



일단 민준의 손에 쥐어진 리모컨을 빼내어 티비를 껐다. 주방으로 돌아와 나중에 민준이 일어나면 찌개만 다시 데우면 되겠다 생각하며 준비해 놓은 반찬들을 덮개로 덮어뒀다. 어질러진 주방을 정리하려다가도 괜히 소란스럽게 민준을 깨울까봐 그냥 두었다. 이제 막 정오가 되어가던 때라 해가 들어오는 건 아니었지만 커튼을 쳐 거실을 어둡게 하고, 거실 난방 온도를 조금 높였다. 방에서 자신의 베개를 가지고 와 민준의 머리 아래에 받쳐주었다. 혹시나 그가 깰까 아주 조심스레, 천천히. 그리고 그에게 늘 자신이 덮던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바로 눈 앞에 있는 민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본다. 아주 평온하고 깊게 잠들어 있음에도 그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그래도 계속 보고는 싶어서 자리를 옮겨 소파 앞에 멀찍이 놓인 테이블 맞은 편 바닥에 앉는다. 이 정도 거리면 왠지 지켜보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

 

 

공기의 흐름마저 없는 것 같은 정적. 엇갈리던 두 개의 숨소리도 점점 하나가 되고, 그를 방해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송이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마음 편히 민준을 보기 시작했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 짙은 눈썹, 다시 뜨기는 할까 궁금하기까지 한- 감은 눈꺼풀. 콧망울이 예쁘다. 그리고 만약 입만 보고 누군지 맞추라고 하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은 입술. 살짝 다문 그 입술선을 따라가다 보면 웃고 있지 않음에도 그 끝이 살짝 위로 꺾여 있다.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닌 탓인지 피부는 그을렸고 조금 거칠어 보였다. 시선을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가며 배 위에 올려진 손을 본다. 길고 마디가 조금 투박한 손가락.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잡았던 손. 맞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처음 알게 된 수많은 감정들. 송이는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싶다 생각했지만,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다시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 때부터 지금까지를 돌이켜본다. 짧은 시간 안에 모두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언제나 미워하기만 하고 마주치면 피하기 바빴던 존재를 이렇게 원 없이 보고 있다니. 모든 것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서로의 등을 보아왔을까.

 

 

“……!”

 

 

송이는 미동도 없이 그 자세로 민준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가 뒤척이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굳이 들키고 싶진 않았다. 


노골적으로 그를 관찰하는 건 적당히 하기로 하고,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뭘 하고 있어야 하나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바닥에 있던 시나리오 한 권을 보았다. 예전에 받아두기만 하고 읽지도 않은 것이었다. 지금은 딱히 할 일이 없으니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읽기로 했다.

 

 

 



 

  




#




송이는 원래 한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뭘 하는 성격은 아닌데, 대본이나 책 같은 이야기들만은 예외다. 어느 제작사, 어느 감독의 작품인지도 모르고 구석에 처박아 뒀던 시나리오는 꽤나 재미있었다. 이거 캐스팅 다 했으려나, 차기작으로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본인이 아니어도 남자 주인공도 굉장히 매력 있는 캐릭터라, 나중에 민준에게 이 시나리오 어떠냐고 한 번 읽어보라고 해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등받이도 없이 바닥에 앉아 있다보니 몸이 좀 뻐근했다. 커튼을 쳐놓고서 글을 읽었더니 눈도 좀 침침한 것 같기도 하도. 시나리오 책을 덮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커튼 사이로 햇빛이 짧게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해가 꼭대기로부터 기울어지고 있었다. 조용히 기지개를 펴며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민준을 보았다. 배도 안 고프나, 몇 번 뒤척인 걸 빼고는 정말 잘도 잔다.  


송이는 다시 자리에 앉아 두어시간 만에 또 보고 싶어진 민준을 보기 시작했다. 



“잘 자네.”



몇 번은 더 봤을 얼굴을 또 하나씩 뜯어본다. 다른 곳도 아닌 내 집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 도민준을 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알아가고 있는, 참 반듯하고도 잘생긴 얼굴. 나는 이 모습을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기도 전에 알고 있었는데. 이 사실을 자랑할 데도 없는 게 조금 억울해졌다. 




“......”




언젠가는 그 누구에게라도 말할 수 있겠지, 이 이야기들을-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쭈욱 바라보고 있던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어떤 기척도 없이 같은 높이의 눈이 마주쳤다. 이러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 생각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항상 그랬듯이 이미 마주친 건 피할 수가 없으니까. 




“일어났어요?”

“......”



민준은 눈을 반 쯤 뜨고 송이를 보자마자 작게 웃는다. 사람 밥 차려 놓게 만들고서 남의 집 소파에서 몇 시간이나 잔 건 알고나 있는 건지. 정신이 없는 건지 한동안 그대로 눈만 뜨고 누워있던 민준이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하고  몸을 일으킨다.



“아...미안해요. 언제 잠들었지…”

“물 마실래요?”



송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어냈다. 한 순간에 거실이 밝아졌다. 민준이 채 잠에서 덜 깬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다. 송이는 그가 목이 마를 것 같아 물 마시겠냐 묻고는 주방으로 갔다. 컵에 찬물을 따라다가 소파 위에 멍하니 앉아있는 그에게 건넨다. 민준은 고마워요, 하고 단숨에 물을 마신다. 



“......!”



송이는 민준이 다 마신 컵을 다시 가져가려 했지만, 그가 갑자기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소파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의 몸이 앞으로 쏟아진다. 



“......”



털썩, 민준이 송이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머리를 기댄다. 온 몸에 힘을 빼고 있어 조금 무거워 뒤로 넘어갈 뻔했다. 매번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잠깐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그래도 점점 적응하는 시간이 빨라지는 것 같다. 잠에 취한 웅얼거림이 바로 귓가에서 들린다. 긴장의 끈을 살짝 놓으니 그가 한쪽 팔을 허리에 감아오며 더 가까이 파고든다. 


막 잠에서 깨어나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와 방금 마신 물 때문에 아주 차가운 입술의 기운이 동시에 목덜미에 느껴진다. 송이도 갈 곳 없이 허공에 머물고 있던 손으로 그의 어깨를  감쌌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잠시동안 이 순간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죽은 줄 알았잖아요.”

“내가 왜 죽어요.”



그의 깊게 잠긴 목소리와 실없는 웃음 바람.



“죽은 듯이 자니까. 오면서 잠은 잔 거예요?”

“아니요, 한숨도…”

“...왜요?”



가끔은 무모하고 대책 없는 그의 성격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딱히 정확한 답을 바란 건 아닌 물음표를 붙였다. 민준은 그 가벼운 질문에 무거운 대답을 하기 위해 기대었던 몸을 더디 일으킨다. 얼굴을 마주하자 민준의 입꼬리가 싱긋, 예쁘게 올라간다. 그래서 왜냐면, 왜 한숨도 잠 못 이룬 거냐면...




“자꾸 이게 생각나서.”

“......?”




분명 아직 나른함이 서려있는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는데, 한 번 눈을 깜빡한 사이 시선이 살짝 비켜 나있다. 내리 깐 눈, 속눈썹의 그림자. 다시 내게로 쏟아지는, 나와 같은 향.



“......!”



차가운 입술이 따뜻한 입술 위에 올라와 앉고, 받아들일 틈도 없이 먼저 깊게 파고 들어온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반사 작용처럼 호흡이 멈추고 그의 손이 닿는 곳을 따라 모든 근육이 경직된다. 낯설지만은 않은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자 멈췄던 호흡을 이어가며 눈을 감았다. 


이제 긴장하지 않을 수 있으려는데 민준이 먼저 입술을 뗀다. 다시 눈을 뜨고 깜빡 깜빡, 시야에 가득한 민준을 본다.



“그러고 보니…”

“......?”

“허락도 안 받았는데, 나 또 때릴 거예요?”

“...뭐라구요?”

“아니, 난 또 얻어맞을까봐.”

“진짜 맞을래요?”



민준이 살짝 뒤로 물러서며 하는 말에 송이는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민준의 어깨를 툭 치니 으, 하고 아픈 척을 한다. 그렇게 한 차례 웃고 나니 남아 있던 긴장감 마저 모두 사라진다. 그걸 확인하려는 민준의 손이 송이의 손을 감싸오고, 이번엔 송이의 손가락이 먼저 그의 손가락 사이를 엮어 그 곳에 자리를 잡는다. 




“......”

“......”




웃음이 잦아들기 전에 다시 입이 맞닿는다. 그렇게 미워하는 말만 했던 서로의 입술에, 결국엔 진심을 말할 수 밖에 없던 서로의 입술을. 칼을 물고 상처만 줬던 서로의 혀 끝에, 미처 몰랐던 달콤하고 부드러운 서로의 혀 끝을.  



자꾸 웃음이 나서 그의 입술 위에서 웃으면 그도 따라 웃는다. 잡은 손을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그것도 모자라 민준은 반대쪽 손을 들어 송이의 얼굴을 감싸, 조금이라도 멀어지지 않게 하려 한다. 서로 달랐던 체온이 점점 같아지는 기분이 좋다. 낮은 쪽이 아닌 높은 쪽으로 같아지는 온도. 더 높은 쪽으로 향하는 감정. 



이 순간의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망설일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 대본대로 하지 않아도, NG가 나더라도, 감독의 디렉팅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키스씬이니까. 보고 싶으면, 같이 있고 싶으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달리 없으면,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하고 싶은 거라도,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는 입맞춤이니까.




우리가 본 그 어느 것보다 완벽한 키스씬은, 그의 등 뒤에 있던 햇살이 우리의 손 위를 비추고, 나를 지나칠 때까지… 아무도 ‘컷’을 외치지 않았다.  















바빠서 늦었습니다 8ㅅ8 

원래 좀 여유있게 써놓고 올리는 편인데.. 어차피 막바지라 올립니다 ㅠㅠ

다음 편 또 언제 올지 몰라 ㅠㅠㅠㅠ


따땃한 봄도 오는데 도민준 천송이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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