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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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llo, my stranger 26

SCIENCE AND LOVE 2016. 2. 24. 22:48




Hello, my stranger 26

 





 

#


 

 

아침에 호텔 서랍장에 가시가 튀어나와 있어 손가락을 찔렸다. 아팠지만 이내 곧 괜찮아졌다. 보통, 살갗을 베였다고 해서 다른 곳이 아프진 않다. 손가락을 베였는데 발이 아프거나, 감정적으로 슬프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의 이 키스는, 입술과 입술이 닿았을 뿐인데, 입술뿐만 아니라 온 몸을 간지럽게 한다.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고,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느낌은 아주 오래 갈 것 같다. 서로에게 전해지는 마음이라는 건, 진심이라는 건, 사랑이라는 건… 같은 감각이라는 것도 특별하게 만든다. 물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너’ 라는 것이지만.

 

 

“……”

“……”

 

 

느닷없는 키스가 더 이상 느닷없는 게 아니게 될 때쯤, 민준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송이는 진하게 남겨진 열기를 그 짧은 사이 아쉬워하며 따라서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반 정도 떴을 때 다시 한 번 민준이 짧게 입을 맞춰온다. 쪽- 소리가 생각보다 너무 커서 깜짝 놀랐다. 한 번의 긴 입맞춤, 그리고 한 번의 짧은 입맞춤 후 송이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슥- 호를 그리며 올라가는 그의 입매였다.

 

민준은 송이 쪽으로 기울인 몸을, 시야에 얼굴이 다 보일 때까지 조금 일으킨다. 세게 꽉 잡고 있던 손도 이제야 살짝 풀어준다. 그렇다고 놓치는 않고, 부드럽게, 또 살며시 손등을 감싸 쥔다.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머리 속에 새하얘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시선은 그의 눈동자와 연결이 된 듯,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빨라진 숨만 규칙적으로 쉬고만 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민준을 보고 있으니, 그가 속삭이듯이 말한다.

 

 

“거봐요,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데.”

 

 

그 말에, 민준의 입술 끝에 죄다 넘겨줘 버린 정신이 번쩍-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던 마음 속에서 왜 하필 그 감정이 그 순간에 먼저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 놈의 자존심 말이다. 민준의 놀리는 말에 송이는 발로 그의 정강이를 빡- 차버렸다. 그의 외마디 비명이 넓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아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을 것이다. 민준은 곧바로 인상을 찡그리며 다리를 부여잡았고, 송이는 자기가 발로 차놓고서는 스스로가 깜짝 놀란다.

 

 

“어머.”

“으으…”

 

 

민준이 테이블에 기대 괴로워하는 걸 보며 송이는 제가 더 당황스러웠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나도 모르게 그만- 


 

“아, 아니… 난 자꾸 그 쪽이 놀리니까…”

“놀린다고 사람을 때려요?”

“때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욱해서 그런 건데…”

“두 번 욱했다간 다리 부러지겠네.”

 

 

걱정스러운 마음이 또 삐뚤어지게 입 밖으로 나온다. 미안한 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는 걸, 불과 어제 배워놓고선. 앓는 소리를 하며 버럭, 화내는 민준의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본인이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솔직히 맞을만 하지, 안 그래? 송이는 다시 심통이 난 얼굴로 민준에게 투덜댄다.

 

 

“그러길래, 누가 갑자기 그렇게 그…그러래요?”

“…그럼 앞으로는 물어보고 할까요?”

“어머. 뭐, 뭐래, 이 사람이.”

 

 

민준이 아프다고 앓고 있으면서도 뻔뻔한 소리를 한다. 송이는 얼굴에 또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참 나. 앞으로 대체 뭘 또 한다는 건지. 타는 입에 거의 빈 맥주를 탈탈 털어놓고, 다 식어버린 음식을 입에 구겨 넣었다. 먹고 있긴 한데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체할 것만 같았다.

 

딴청을 부리며 슬쩍 옆을 보니, 민준은 아직도 남아있는 통증 때문인지 표정이 좋지 않다. 내가 심하긴 좀 심했다. 하여간 이 놈의 성질 머리란. 송이는 민준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묻는다.

 

 

“…진짜 아파요?”

“그럼 진짜로 아프지, 가짜로 아프겠어요?”

“본의 아니게 때린 건 미안해요…”

“……”

“알잖아요, 내 성격.”

 

 

미안해 죽겠다는 송이의 얼굴에, 민준이 흘깃 눈을 들어 보더니 조금 굳은 표정을 풀고, 내가 어떻게 알아요, 라고 한다. 송이는 나보다 더 잘 알면서, 라고 받아친다. 그 말에 민준이 픽 웃고, 혹시나 정말 화났을까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 그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비해, 나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늘 어설프기만 한 나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더 이상 이 사람이 없는 길 속에 혼자 생각할 일은 없다.

 

 

“괜찮아요?”

“뭐, 괜찮아요. 멍은 좀 들겠지만.”

“…미안, 진짜.”

 

 

송이가 사과를 하자 민준이 장난 섞인 한숨을 쉬며 흘겨본다. 그렇게 보던 시선이 살짝 아래를 향하고, 송이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방금 전 키스씬을 다시 찍으면 잘하니 어쩌니 하던 순간에도, 그는 미묘하게 눈썹을 내리깔고 이렇게 보고 있었다. 두근, 다시 한 번 긴장이 되었지만 민준은 다시 눈을 들어 송이와 눈을 마주친다.

 

 

“나도 미안해요. 갑자기…뭐, 아무튼.”

“……”

 

 

민준이 난데없이 키스를 해온 건 정말 예상 못한 행동이었으니, 그가 사과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민준이 미안하다고 말하니 송이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미안할 일이었으면, 아마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정강이를 뻥- 차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송이는 미안하다는 민준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고는 솔직하게 한마디를 꺼내었다.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왜요?”

“아니이… 미안하다고 하니까 꼭 못할 짓 한 것 같잖아요…”

 

 

아까는 쏙 숨겼던 입술을 이제는 삐쭉 내밀고선 투정부리듯이 얘기하는 송이에, 민준이 천천히 그 말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웃는다.

 


 

“…알았어요. 미안하다는 말 취소.”

 

 


더 묻지도 않는 그의 확고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송이도 웃었다. 의심할 것도 없다. 이건 진짜라고 생각할 것도 없이, 진짜다.

 

 

 

 








 

#


 





어젯밤 한없이 울고 또 울어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방에서,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렇게 계속 가슴이 뛰어도 괜찮은가 모르겠다.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고 부서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눈만 감아도 반짝이는 밤 하늘 어딘가를 날아다니는 것만 같다. 입을 맞추던 달콤한 순간이, 입술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렵사리 잠들어, 긴 밤을 채워준 꿈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였다.

 

 










#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날, 어찌 보면 여행의 마지막이라기엔 너무도 평범하기 그지 없는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만나 밥을 먹고, 걷고, 커피를 마시고, 어디를 갈까 고민하고, 인터넷을 뒤져보다 그냥 발길 닿는대로 가자 해서 차를 빌려 떠나고, 돌아오는 길을 아쉬워하고. 그러는 동안 알게 된 것이라곤 그저, 이 세상엔 보지 못한 것과 함께 하지 못한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뿐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앞으로 이 평범한 햇빛과 바람, 길과 사람들, 맛있는 것과 즐거운 음악... 이런 것들 속에서 특별함을 함께 발견해 나갈 것을 믿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돌아가는 날. 민준은 그동안 계속 송이와 같이 들어갈지 말지 고민해 왔고, 송이는 민준의 원래 여행 예정대로 주어진 휴가를 다 채우고 오는 걸 지지했다.

 

민준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쉬거나 여행을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데뷔한 후에야 촬영 때문에 제주도도 처음 가보고 해외 가는 비행기도 타 보았단다. 제일 바쁜 이 시기에 운 좋게도 찾아온 휴식 중 절반을 이대로 날려버린다는 걸 송이가 오히려 더 아까워했다. 게다가 샌 안토니오엔 원래 사흘 정도만 머무려고 한 거였는데 송이 때문에 일주일이나 있게 된데다가, 내내 송이의 징징거림을 받아주고 데리러 오고 데리러 가고 했으니, 어떻게 한국에 지금 같이 들어가자고 할 수가 있겠는가.

 

 

‘미쳤어요? 같은 비행기 타고 들어간다니. 무슨 광고할 일 있어요?’

‘다른 비행기 타고 가든가, 아님 내일…’

‘아, 됐네요. 그냥 이 참에 더 놀다 오세요, 도민준씨.’

 

 

말은, 절대 같이 귀국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둘러댔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번 기회에 민준이 다른 곳에 가서 혼자 더 쉬고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속 다 했어요?”

“네.”

 

 

공항 출국장, 송이는 수속을 마치고 한 켠에서 기다리고 있는 민준의 앞에 섰다. 여권 사이 끼워진 티켓을 들어 보여주고는, 그 다음 할 행동과 말에 대해 잠시 잊었다. 정해진 시간은 줄어들고 있고, 작별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진짜 마지막 작별도 아닌데.

 

 

“언제 온다 그랬죠?”

“몇 번을 물어봐요, 다다음주 월요일이요.”

“아아, 맞다. 그랬지.”

 

 

송이는 민준에게 언제 돌아오냐고 또 묻고는 발 끝으로 툭툭 바닥을 치기만 한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는 건 송이 제 자신인데, 이상하게 자꾸 민준을 떠나 보내는 느낌이다.

 

민준은 송이를 보내고 나면 바로 차를 끌고 다른 도시로 떠난다고 했다. 정해진 계획은 없고 그냥 가고 싶은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갈 거라고 하는 게 아무래도 좀 대책 없어보이고 걱정되긴 했지만, 언제부터 그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했다고. 


 

“이제 들어가야죠.”

“…그래야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만 가득한 이 곳. 비록 이 곳에서 헤어지지만, 도착한 그 어디에서도 만남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출국 시간에, 민준이 송이에게 들어가라 먼저 말을 꺼냈다. 송이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딱히 할 말도 없는데 마치 뭔가를 말할 것처럼, 서로를 보고 있었다.

 

 

“가자마자 바쁘죠?”

“네. 일 미뤄놓고 도망 왔으니.”

“바빠도 밥 잘 챙겨 먹고요.”

“…무슨 맨날 밥만 먹으래. 이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관리 좀 해야 해요.”

“밥 잘 챙겨 먹으라는 게 진짜 그 뜻이겠어요?”

 

 

민준이 웃으며 손을 들어 송이의 머리를 헝클어 놓는다. 송이는 부스스해진 머리에 하지 마요-하고 싫은 소리를 하고선 머리 위의 민준의 손을 툭 쳐낸다. 가는 나는 싱숭생숭 하구만, 뭐가 그리 신나는지 실실 웃고 있다. 이제 내 뒤치닥거리 안 해도 되고 혼자 여행해서 좋다 이거지?

 

 

“……”

“……”

 

 

마음이 이상하기도 하고, 웃기만 하는 민준이 살짝 얄밉기도 해 일부러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지만, 이제 정말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딱 한 번 더 용기를 내었다. 한결같이 쭉, 자신을 향해 있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웃음을 머금은 낯꽃에 저절로 따라서 미소가 지어지고 편안해진다. 짙게 마주친 시선을 조금만, 조금만 더 머무르게 하고 싶지만…

 

 

“……!!”

 

 

덜컥. 눈을 보고 있다 아주 티가 나지 않을 만큼, 교묘하게 각도를 바꿔 정확히 입술에 꽂히는 그의 눈동자에 어제의 순간이 떠올랐다. 저 눈빛은- 송이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양 손으로 자신의 입을 덥썩 틀어막았다.

 

 

“……?”

 

 

송이의 갑작스런 행동에 민준도 덩달아 눈이 커진다. 뭐냐는 표정으로 보다 이윽고 송이의 의중을 알아채고 허탈하게 웃는다.

 

 

“정말…”

“......”

 

 

기가 막혀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있는 민준에, 송이는 자기도 왜 그랬는지 민망해져 천천히 손을 내렸다. 민준은 잠깐 망설이더니 손을 뻗어 송이의 입가를 슥, 엄지 손가락으로 닦아준다. 립스틱이 번져있었나보다. 송이는 이번에는 어쩌지 못하고 그 손길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제 가요. 정말 내가 무슨 짓 하기 전에.”

“……”

 

 

쓸데 없는 행동에 그렇게나 망설이던 마지막 인사가 싱겁게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송이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이제 정말 가야 한다.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민준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송이도 따라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하필 출국 심사를 위한 줄도 그리 길지가 않다. 송이는 민준을 등지고 돌아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뒤를 본다. 민준은 어젯밤 호텔 앞까지 데려다 줄 때처럼, 마치 몇 시간 후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듯이 웃고 있다. 다만, 이번엔 그 시간이 조금 더 길뿐. 그러나 지난 8년보다는 더 길기나 할까.

 

 

“……”

“……”

 

 

여권과 티켓을 확인 받고 문 안으로 들어선다. 다시 한 번 민준을 돌아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한 발짝만 더 떼면 그가 보이지 않게 될 때쯤, 송이는 혼자 조용히 중얼거린다.

 


 

“…안녕.”

 

 


안녕, 샌 안토니오. 안녕, 도민준.

Goodbye, 샌 안토니오. Hello, 나의 도민준.

 


우리가 함께한 수 많은 시작 중, 또 다른 시작이 될 이 순간에게, 안녕.

네가 돌아오기까지 너를 기다리게 될 시간들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허전함이 될 거야.

 

 

 

 














 

##

 


 

“엄마야, 깜짝이야.”

“너네 엄말 왜 여기서 찾니.”

 

 

인천 국제 공항 입국장 게이트 앞에서 까치발을 들고 나오는 사람 하나하나 살피고 있는 범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송이 누나! 라고 큰 목소리로, 반기는 건지 어쩌는 건지, 아무튼 크게 이름을 부르는 범이에게 쉿, 조용히하라 일렀다. 안 그래도 사람을 눈에 띌까봐 단체 중국 관광객들이 나가는 틈을 타 거기에 묻어서 나왔다. 점퍼 후드를 뒤집어 쓰고 목도리까지 칭칭 감은 모습에 범이가 놀랄 만도 했다.    

 

어서 빨리 가자며 범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괜히 요란스럽게 밴 끌고 오지 말고, 발렛도 맡기지 말고, 지하 주차장 깊숙이 대고 오라고 보안에 꽤나 신경을 썼다.

 

 

“대체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어디가 중요해? 살아 있다고 가끔 문자 줬음 됐지.”

“항공편 보니까 댈러스에서 오신 것 같던데, 설마 샌 안토니오 가셨어요?”

“…몰라.”

“거길 왜 또 가셨대요? 별로 볼 것도 없더만.”

“볼 게 왜 없어! 그리고 내가 어딜 가든지 뭔 상관이냐.”

 

 

귀신같이 송이의 행적을 추측해내는 범이를 보고 괜히 혼자 뜨끔 한다. 송이가 대책 없이 스케줄을 미루고 떠나는 바람에 그 뒷감당을 하느라 꽤나 힘들었던 모양인지 범이는 돌아가는 내내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송이는 자신이 그 곳에서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는지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 근질 했지만, 범이한테 미안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누나 때문에 저랑 대표님이랑 여기저기 얼마나 사정 사정 했는지 아세요?”

“뭐야. 광고 촬영 그깟 며칠 좀 미뤘다고 뭐라 그래? 그딴 광고 안 한다 그래.”

“약속 안 지키고 그런 거 업계에 소문나면 좋을 게 없다구요. 밥줄 끊기는 거라구요.”

“끊어도 내가 끊는다 그래! 참 나. 그래 봤자 손해 보는 게 누군데.”

“밥줄 끊기면 뭐 먹고 사시게요.”

“…그러면 시집이나 가지 뭐.”

“하, 누나 데려갈 사람은 있고요?”

“야, 대한민국 남자라면 다 나 데려가려고 난리지. 날 뭘로 보고.”

 

 

후폭풍이 걱정이긴 했다. 밀린 일도 소화해야 하고, 원래 있던 스케줄들도 미룰 수도 없이 해야 하고, 미룬 것에 대한 해명도 이래저래 해야 하고. 배우 인생 중 나름 거의 처음으로 마음대로 ‘반항’이라는 걸 해본 건데, 이상하게 나쁘지만은 않다. 당연히 앞으로 이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후회는 없다.

 

그런 생각들의 끝에 자연스레 민준을 끼워 넣는다. 지금쯤이면 새벽이겠네, 몇 시간 걸리는 어느 무슨 도시로 간다고 했는데 이름이 뭐더라, 잘 도착했으려나, 아무튼 지금은 자고 있겠지- 연락은 하면 할 수 있지만 깨어있는 시간도 다르고, 괜히 방해할까봐 일부러 하진 않았다. 여행 다니면서 가족에게 최소한의 안부만 전하고 거의 전화를 꺼놓고 있길래 송이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왤케 기분이 좋아보이세요?”

“…내가? 내가 언제.”

“지금요.”

“기분 좋긴. 내일부터 또 지옥의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데.”

“다아- 누나 스스로의 탓이죠.”

“굳이 말 안 해줘도 알거든?”

 

 

나는 지금, 돌아온 일상이 낯설지만 두렵지는 않다.

 

 

 





 

 

#

  


첫사랑이요? 아… 그동안 이 질문 많이 받았는데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어요. 아시죠? 이게 사랑이었는지 아닌지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너무 어려서 몰랐다거나, 표현이 서툴렀다거나 하는… 근데 요즘엔 조금 알 것도 같아요. 어쨌거나 사랑이 맞았냐는 건, 그 상대방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도 연락하냐구요? 글쎄요… 그 사람, 이 지구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요?



이런 것 좀 그만 물어보지. 첫사랑이니, 이상형이니 하는 거. 왜 이리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은지 - 첫사랑이고 뭐고, 발 뻗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송이는 하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 방긋, 웃으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범이 말대로 제가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엊그제만 해도 어느 여유로운 카페 테라스에 앉아있었는데. 원래 하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시차 적응만큼이나 이 자리에 적응하기가 힘들다. 



“고생하셨습니다.”



밤 늦게 되어서야 마지막 스케줄이 끝났다. 일정이 미뤄져 다른 사람들도 본의 아니게 늦게까지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송이는 피곤을 무릅쓰고 스태프들에게 하나 하나 몇 번이나 했을 감사와 사과의 인사를 하고 또 했다. 이 또한 다, 모든 걸 버려두고 간 곳에서 얻은 것에 대한 대가이려니. 



“누나, 내일은 오전 9시부터…”

“야야, 말 걸지마. 도착하면 깨워.”

“네에…”



송이는 밴에 올라타자마자 거의 드러누웠다. 하루 종일 일을 하느라 몸이 녹초가 되어 오늘 세 잔이나 진하게 마신 커피는 아무런 효과도 없이 바로 잠에 빠져든다.









잠이 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범이가 깨워 눈을 떴다. 이 곳이 그냥 침대 위길 바랐는데. 들어가면 또 이 화장을 지워내야 한다. 내일도 카메라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클렌징은 무조건 해야지, 암. 컨디션도 안 좋기에 얼굴에 팩도 붙여야겠다. 생각만으로도 정말 귀찮지만 여태 항상 해 온 짓이기에 당연한 듯 기계처럼 차에서 내린다. 



“내일 7시에 올게요.”

“7시? 아으.. 알았어. 고생 많았어.”



눈은 반쯤 뜨고, 돌아가는 범이에게 대충 손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집 대문 앞에 선다. 흘러내리는 가방을 고쳐 매고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아, 얼마 전에 바꿨지, 뭐였더라… 허공을 올려다보며 생각해 낸다.



“......?”



그러다 현관문 옆의 우편함이 눈에 들어왔다. 공과금 고지서 같은 건 워낙에 다 훔쳐가서 회사 주소로 다 돌려놨고, 가끔 팬레터 같은 것이 와 있긴 하지만 요샌 그런 아날로그적인 것도 많이 사라졌다. 늘 비어 있었던 것 같던 우편함에 뭔가 하나 꽂혀 있길래 가까이 다가가서 꺼내 보았다. 



“뭐지, 웬 영어.”



책 크기만 한 봉투 겉면엔 영어로 뭐라고 써있어, 대충 훑어보다 성질 급하게 윗부분을 뜯어버렸다. 봉투 안엔 사진이 두 장 들어있었다.



“......”



배경은 같았다. 샌 안토니오의 큰 골목. 주인공도 같았다. 가게 앞을 지키고 있던 머리는 하얗고 몸은 까만 커다란 강아지, 그리고 나. 천송이. 두 장의 사진에서 송이는 강아지와 눈높이를 맞추고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이 달랐다. 계절도 달랐다.



한 장은, 지난 여름. 또 다른 한 장은, 며칠 전, 그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나던 겨울.



방금 찢은 봉투을 다시 살펴보니, 보낸 사람 이름에 그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이걸 언제…”




놀라고 얼떨떨한 마음으로 한 번 더 사진을 본다. 그의 시선으로 보아온, 나의 모습. 그의 눈에 담긴, 나의 웃음… 그 때처럼 한 번 활짝 웃어본다. 웃어서 눈 아래가 눌린 탓인지 눈물이 살짝 고인다. 어떤 특별한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웃어서, 조금 추워서, 피곤해서… 



민준이 나온 사진도 아닌데 사진 자체가 민준인 것 같아 희미한 현관 조명 아래에서 보고 또 본다. 그러다 사진을 뒤집어 보았다. 한 장의 사진 아래에 볼펜으로 급히 쓴 듯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나의, 꽃,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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