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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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llo, my stranger 24

SCIENCE AND LOVE 2016. 2. 14. 21:27





Hello, my stranger 24

 



 



 

 

“자신 있다고 했던 대사, 둘 다 마음에 들어 했던 장면, 서로 제일 많이 맞춰봤던 그 씬… 내가 기억 못 할 것 같아요?”

 

 

버스에서 내렸을 땐 어느 정도 해가 저물어 있었다. 송이가 다시 꺼낸 오래된 그 이야기에, 민준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딱히 오늘 말해야지-하고 준비했던 건 아니라, 아무렇게나 횡설수설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것 같았지만 나름대로 모두 다 진심이었고 민준이 알아주기를 바랐다.

 

 

“먼저 오디션 본 사람들한테도 물어봤어요. 그 중에서 3번 선택한 사람은 다 그 지문이라고 했어요. 그 때 오디션에 붙은 남자 아역 배우, 걔도 그걸로 합격했다고 그랬고.”

“……”

“중간에 번호를 바꾼 건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 쪽한테 제대로 알려줬거든요?”

“……”

“바뀐 게 왜 하필 또, 그 쪽이 어려워했던 건지… 나도 정말 당황스러웠다구요.”

 

 

어딜 가자고 말한 것도 없이 빛이 밝은 쪽으로 걷고 있었다. 민준은 송이가 열변을 토하듯 주절대는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혹시나 또 저번처럼 밑도 끝도 없이 입을 닫아버리진 않을까.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겨우 이렇게 가까워졌는데, 괜히 쓸데없이 깊은 곳까지 파내 물거품이 되게 만드는 건 아니까- 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끝까지 숨기고 털어놓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가까워진다 한들, 결국엔 절대 메울 수 없는 아주 작은 틈이 남고 말 것이다. 그래서 계속 말해야만 했다.

 

 

“……”

 

 

송이는 생각나는 대로 마구 쏟아부었다가 민준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잠시 말을 멈추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귓구멍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이 말들을 들었을 거고, 입이 제대로 달려 있다면 무슨 말이라도 좀 하지.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원망하는 말이라도. 결국 악의가 되어버린 내 진심을 탓하는 말이라도.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많은 생각들이 얽혀 있는 듯한 그의 눈동자는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도 믿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하는 걸까. 조금은 비관적인 생각과 다시 예전처럼은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에 옅은 한숨을 쉬고 나니, 그때서야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저기 앉을래요?”

 

 

긴 침묵 끝에 겨우 꺼내는 말이 저기 앉자, 라니. 민준이 고갯짓을 한 곳엔 강가의 빈 벤치가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웬만하면 차지하기 힘든 자리인데, 마치 여기서 얘기하라는 듯이 눈 앞에 딱 준비되어 있다. 어쨌거나 송이는 생뚱맞은 민준의 그 말을, 적어도 피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오케이, 하고 벤치의 한 켠에 앉았다. 민준은 앉기 전에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고서는 송이의 앞에 선다.

 

 

“밤에 쌀쌀해지는 거 알면서 왜 이렇게 또 얇게 입고 왔어요.”

“……”

 

 

그가 따로 챙겨온 듯한 얇은 점퍼. 어젯밤에 보니까 추워보이던데, 하며 그가 점퍼를 송이의 어깨에 둘러준다. 점퍼의 앞섶까지 잘 여며주고는 송이의 옆자리에 앉는다. 비교적 한산한 이 곳에까지, 저 멀리 리버워크 중심부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온다. 긴 이야기를 나누기엔 약간 소란스러울 지 모르겠지만 나쁘진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흔들리고 어설픈, 이 오래된 감정들을 쉽게 들키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한동안은 몸을 감싸는 따뜻함을 핑계로 조금 뜸을 들였다. 역시나, 갑자기 쏟아지는 몇 년 간의 시간들은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송이는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운 이 분위기의 무게를 조금 가볍게 만들려 하하, 약간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목소리 톤을 높였다.

 

 

“아…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그 쪽한테 왜 거짓말 하겠어요. 내가 뭐라고. 나도 보잘것없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그의 목소리.

 


“알고 있었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

 

 

송이는 물결의 반짝임을 보던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도 존재하는 반짝임. 어떤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긴 했지만, 막상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으니 송이 자신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모르겠어요. 그 때의 우리도 이렇게 같이 있었는데.”

 

 

같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던 서로의 감정, 서로의 마음, 서로의 꿈. 어렴풋이 그가 지켰다는 약속이 떠올랐다. 우리, 같이 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멀리 돌아, 결국 ‘같이’하게 된 이 순간에 듣게 되는 그의 이야기.

 

 

“아는데, 모르는 척 했어요. 그래야만 했어요. 실패라는 것을 감내하기에는 내가 너무 작아서, 그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어요. 난 잘못이 없는데, 난 원래 잘하는데, 다 다른 사람들 때문이야, 누구 탓이야… 이렇게 떠넘기고 도망가는… 방법 밖에는요.”

“……”

“16부의 드라마에서 수 백 개의 씬을 찍는데, 어떤 건 잘 하고, 어떤 건 못할 수가 없잖아요. 그 캐릭터가 바로 나인데, 잘 하고 못 하고가 어딨어. 오디션 볼 때 고작 7개의 씬 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서 행운을 바랐던 게 애초에 말이 안 됐어요. 안 그래요?”

 

 

그의 실패, 감내, 누군가의 탓, 도망… 이런 말들을 들으며 그를 이해하고 있을 때, 대뜸 민준이 되묻길래 송이는 깜짝 놀라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뭐라고 물었더라. 얼떨결에 뭐…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고, 더듬으며 대답하고 나니 민준이 당황한 송이의 표정을 보며 웃는다. 송이는 민망해서 왜 웃어요, 하고 중얼 중얼 불평을 늘어놓는다. 알았어요. 안 웃을게요. 민준이 송이를 위해 웃음을 거두고 다시 표정을 정리한다. 그가 길게 숨을 내쉰다. 아주 오래된 한숨.

 



“…내가 너무 어렸어요. 염치없지만,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덮어버리려는 것 같지만, 어린 날의 치기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요.”

 

 


나는 그 때 네가 나보다 더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잘못했어요.”

“……”

“그 때의 내가 너무 어려서… 미안해요.”

 

 


지금도, 네가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자란 것 같아.

 



억누르고 참고 또 참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심장이 꽉 조여지고 눈물이 핑 돈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시작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송이는 한마디만 더 들으면 왈칵 쏟아질까봐 깊은 그의 눈빛을 피했다. 아, 조금 춥네. 허공을 보며 코를 훌쩍, 그가 덮어준 점퍼를 끌어모았다. 그리고는 마음을 다잡고, 자신도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이 이야기를 반드시 하려 했던 진짜 이유를 위해.

 

 

“나도 잘못한 거 있어요.”

“…뭔데요?”

“순서를 잊었어요.”

 

 

이 이야기들을 풀고 가려고 했던 건, 오해 받은 것에 대해 억울해서가 아니다. 오해를 풀어 내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그런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

 

 

“그 쪽이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오디션에서 나만 뽑힌 거,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어요. 그리고 그것들이 다 도민준씨가 도와준 덕분이라는 거… 고맙다고도 말해야 했어요.”

“……”

“변명만 할 게 아니라, 그 말을 먼저 해야 했어요.”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해야만 했던 이 말을 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꿈을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했어. 꿈을 이루게 해줘서 고마웠어. 이 말들을 여태껏 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어쩌면 우리가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꼬이고 꼬였던 건, 순서를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밑바닥의 감정은 무시한 채, 그 위에 쌓인 것들로만 미워하고, 싸우고, 원망하니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여야 할 것을 내버려둔 채, 불쑥 들이닥치는 낯선 감정만을 받아들이려니 당연히 어설플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미워하고, 일단 의심하고, 먼저 손을 잡고, 연기인 것처럼 입을 맞추고...하는, 순서가 잘못된 것들. 그런 것들을 완벽하게 돌려놓기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제부턴 차례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처음부터.


 

마주 보고, 눈을 피하지도 않고 웃었다. 후련 혹은 감개무량한 듯이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마신 민준이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럼 우리 서로 미안하고, 잘못한 거 있으니까 똑같은 거네요.”

“뭐… 그런 셈인가.”

 

 

똑같다는 말에 송이도 동의하며 따라 웃다가,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쪽이 잘못한 거 또 있잖아요!”

“…어떤 거요?”

“그 때 오디션 보고 나서 학원 애들한테 내 욕하고 다녔잖아요.”

“내가요? 뭐라고요?”

“막 천송이가 뒷통수 쳤다. 도민준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다… 그런 말해서 내가 학원 다니기 얼마나 곤란 했는지 알아요?”

 

 

굳이 억울해서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솔직히 이건 좀 억울하지. 그렇게까지 막 나쁜 년 만들 필욘 없었는데 – 송이는 불과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한 반성과 화해의 장이 있기나 했었냐는 듯이 민준에게 따져 물었다. 민준이 몹시 황당해 하며 어이없게 헛웃는다. 오히려 뒷통수는 제가 맞았다는 표정이다.

 

 

“참 나. 내가 무슨 그런 말을 해요. 그 때 이후로 학원 나가지도 않았는데.”

“그럼 누가 그런 소문을 내요. 우리 얘기 아는 사람도 없었는데.”

“오디션 떨어진 것도 꺼내기도 싫었던 땐데. 누구 좋으라고 그런 말을.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고 다닐 사람 같아요?”

“…그건 아니지만…”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민준을 보며, 19살의 어느 하루의 여름, 오디션을 합격한 후 학원에 갔던 날, 수업이 끝난 후의 조용한 학원 건물 입구, 날이 서있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너 진심으로 잘 되길 바랐던 거 알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잘 되길 바랐다고? 그래서 내가 제일 어려워했던 씬을 알려줬어?’

‘무슨 말이야, 내가 왜 그걸…’

 


 

민준의 말처럼, 어려서 스스로를 제어할 수도 없는 말들을 쏟아 붓고 있을 때쯤, 정확히 생각도 날 듯 말 듯한 장면 하나가 스쳐간다. 기억을 더듬다 민준과 송이 두 사람 다 동시에 아! 하고 깨닫는다. 학원 수강생 하나가 눈치를 보며 두 사람을 쳐다보며 지나쳤던 장면.

 

 

“아. 걔다. 그 키 좀 작고, 머리 염색하고 날라리 같던 애!”

“현우. 걔 학원에서 우리 반이었는데.”

 

 

걔였어. 걔가 우리 얘기 듣고선 마음대로 애들한테 말하고 다닌 거네 – 정작 민준 자신은 모르고 있던 오해는 알게 되자마자 해결되었다. 상관없다고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억울한 것도, 오해한 것도 풀려 다행이다. 

 

 

“그래서, 걔는 지금 뭐 한대요?”

“아마 가수 한다고 어쩌고 하다가 망했을 걸요?”

“잘됐다, 그런 애는 망해야 돼.”

 

 

8년 전 일의 범인(?)에 대한 뒷담화도 늘어놓으며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밤은 더 깊어지고, 하루 중 함께한 시간은 어제보다 더 늘어갔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진지한 건 잠시도 견디지 못하고, 말 끝마다 꼬투리를 잡고, 괜히 화내는, 원래의 도민준, 천송이로. 우리의 일상으로.




참, 가만 생각해보니 난 그것도 모르고 난 계속 선배한테 욕 먹으면서 살았네. 나도 학원 애들한테 욕 먹었으니까 또 똑같은 셈 쳐요. 그게 어떻게 똑같아요. 걔들한텐 그냥 금방 잊을 가십거리지, 선배는 나를 8년동안 싫어했을 거 아니에요. 도민준씨도 마찬가지로 나 싫어했으면서. 그건…아니, 좀 싫어하긴 했는데… 뭐 그렇게까지 싫어한 건 아니고… 뭐예요, 도민준씨 진짜로 나 싫어했어요? 아아아, 그 얘긴 그만하고, 근데.




“…오디션 때 왜 나한테 번호 알려줬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거 반칙인데.”

“음… 글쎄요.

…?

아마 도민준씨가 나랑 같이 드라마를 하려고 했던 이유랑 같지 않을까요.”





좀 더, 솔직한 일상으로.












 #  

 


“중학교 졸업하면서 진로를 정했다니. 나는 그 때 고등학교 교복 안 예쁘다고 짜증내고 있었는데.”

“왜요, 교복 예쁘던데.”

“그 칙칙한 회색 교복이요? 에이, 설마. 내 얼굴이 예뻤던 거겠지.”

“에이, 그건 좀 아니다.”

 

 

민준과 송이는 좀 더 활기가 도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많은 가게들 중에 그냥 그나마 한적하고 분위기 좋아보이는 펍을 골랐다. 야외에 강이 보이는 자리가 있었지만 추울 것 같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비어있는 맥주병 2개와 이제 막 새로 꺼낸 차가운 맥주 2병이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두 사람만의 이야기는 시간을 모르게 만들었다.

 

마치 금기와도 같았던 이야기들은 이제껏 쌓아둔 게 많아 이대로 밤을 지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음 한 켠에 늘 신경쓰이면서도 묻어둬야 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는 일이 이렇게 설레고 즐거운 일인 줄 알았더라면, 아마 조금 더 일찍 말했을 것이다. 


처음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던 중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하며 송이는 민준에게 끝 없이 물었다. 그래서요? 왜 그랬는데요? 정말요? 또 말해줘요. 그 다음에는요? 민준은 이제 막 호기심을 가진 어린 아이처럼 물음표를 붙여대는 송이에게 불평의 말 없이 하나 하나 모두 응해주었다.

 



“학원은 다니고 싶었는데 집안이 그렇게 여유 있진 않았어요. 그래서 어머니도 첨엔 허락 안 하셨구요. 그래서 방학 때 바짝 알바해서 번 돈으로 학원 등록하고, 뭐, 그랬죠.”

 

 

고등학생 때부터 가장이나 다름 없었던 민준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송이는 턱을 괴고선 이야기를 집중해 들으며, 지금의 민준에게서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커버린 10대의 민준을 보았다.

 

 

“알바하던 것 중에 드라마나 영화 엑스트라도 많았는데, 아마 방송 탄 걸로 치면 내가 선배보다 더 선배일 걸요.”

“아아, 그러세요? 도민준 선배님.”

 

 

송이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를 보며 ‘선배님’이라 부르니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왜요, 선배님. 선배라면서요 선배님- 하고 송이가 계속 장난을 치고, 민준은 그만 하라며 질색을 한다. 그러나 송이는 굴하지 않고, 들을수록 더 궁금하고 알고 싶은 그의 옛 이야기에 대해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학원은 왜 그만 둔 거예요? 진짜 오디션 떨어진 것 때문에?”

“홧김에 그런 것도 있는데…뭐, 오디션 처음 떨어진 것도 아니고. 마침 그 때 학원비도 2달이나 밀려 있었어요. 그런데 오디션도 떨어졌으니, 집에다 나 학원 더 다니겠다고 말할 수나 있었겠어요.”

“음. 그랬구나…”

“생각해보면 그 때가 사춘기였던 것 같아요. 아무튼 한동안은 이래저래 방황하다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군대 다녀오고, 다시 정신 차렸죠. 뒤늦게나마 공부해서 대학 들어간 거고..”

 

 

잊고 사는 줄 알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불현듯 뭐하고 사나 궁금했었다. 그 때마다 궁금해해서 뭐하나, 스스로를 나무랐다. 정말 그러지 않아도 민준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었다. 송이는 제가 키운 것도 아닌데 민준이 대견하고 뿌듯했다. 이제는 괜히 ‘그가 그 오디션에 합격했었더라면’ 하는 가정은 하지 않는다. 그 가정은 우리를 더 작게 만들 뿐이다.

 

 

“……”

 

 

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머리 속의 그는 언제나 19살, 교복 하복을 입고 있었다. 짙은 회색 교복 바지, 흰 운동화, 흰 반팔 셔츠, 셔츠 소매 끝 부분에 남색 줄무늬, 손목엔 항상 검은 시계…



“난 그 때 그 쪽이 되게 부유해 보였어요. 시계도 막 명품 시계 차고 있고. 근데 그렇지 않았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아서, 조금 놀랐어요.”

“명품이요? 나 그런 거 사본 적 없는데.”

“그래요? 그 맨날 차고다니던 시계, 되게 비싼 거 아니었나.”

“아… 그거. 그거 짝퉁인데.”



몇 안 되는 그에 대한 기억을 얘기했더니, 민준이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잠시 그 때를 떠올리고는 어이없게 웃는다. 



“헐. 그래요? 진짜인 줄 알았는데.”

“내가 짝퉁을 걸쳐도 진짜처럼 보이긴 하죠.”

“…안 어울리게 웬 자뻑.”

“천송이식으로 한 번 따라해 봤어요.”



민준이 셔츠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이며 너스레를 피운다. 설마 그것도 가짜에요? 왜 이래요, 이건 내 돈 벌어 산 진짠데. 



“학원 왔다 갔다 하는 버스비 달라기에도 죄송했는데, 비싼 시계는 무슨.”



약간은 씁쓸한 투의 민준의 말에, 또 다른 기억이 하나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그 때 밤 늦게, 내가 아빠 기다린다고 했을 때 그 쪽도 부모님 차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버스 막차가 이제 막 떠난 시간, 학원 입구 앞, 주변엔 오로지 두 사람 뿐.



‘나는 아빠가 데리러 온다고 하셔서.’

‘아…’

‘너는?’

나도.’



버스 탈 용돈을 달라 말하기에도 어려웠던 그 때의 그를, 데리고 올 사람은 없었다. 그 날, 그가 타고 집으로 돌아갈 버스도 없었다. 



“…들켰네.”

“......”



송이와 같은 기억을 떠올린 민준이 민망하게 웃는다. 괜히 맥주를 벌컥 마시고 어색하게 앉아있는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랬냐고, 같이 웃어주고 싶지만 자꾸 다른 감정이 앞서서 그럴 수가 없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기다리던 뒷모습. 왁자지껄 떠들며 버스 막차에 올라타는 친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눈길. 조금도 가깝지 않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처음으로 나누었던 이야기. 그리고 내가 떠난 후 혼자 남겨졌을 소년. 그 먼 길을, 늦은 여름 밤의 길을 혼자 걸어갔을 소년… 몇 년이 지나 결국 마주한 이 자리에서도 귀 끝이 빨개진 채로 부끄러워하는 이 소년에게, 나는 뭐라고 해야 될지. 



“......”



송이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에게 웃어보이려고만 애를 썼다. 











#




“......”

“......”



늦은 밤 민준이 데려다 주는 길. 호텔 앞에서 마주 선 두 사람의 조용하고 긴 작별 인사. 



“…내일도 같은 시간에 볼까요.”

“그러죠, 뭐.”



한동안 말도 없이 서로 발 끝만 보다가 송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연한 것처럼 내일도 함께할 것을 약속하지만 지금이 아쉽다는 건 어쩔 수 없다. 내일 우리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하고, 몇 번을 웃고, 얼마나 다가갈까. 오늘 혼자일 밤이 길더라도 시간이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



“먼저 가요.”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아니에요. 오늘은 그 쪽이 먼저 가요.”

“흠… 알았어요. 잘 자고, 내일 봐요.”

“네. 내일 봐요.”



송이는 민준에게 가라는 손짓을 하며 그를 먼저 보낸다. 민준은 별 것도 아닌데 마치 큰 결심을 한 냥, 어렵사리 발걸음을 뗀다. 돌아선 뒷모습이 한 걸음, 두 걸음. 그것이 조금 더 멀어지기 전에, 송이가 다시 민준을 불렀다.



“저기, 도민준씨.”

“……?”

 


그가 뒤돌아본다. 나는 못 다한 말을 묻는다.



“우리 내일 더 일찍 볼래요?”

 


내일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다고. 더 이상 그만큼 솔직할 수도 없는 말에 민준이 천천히 미소를 짓는다.



“…난 항상 일찍 와 있어요.”



항상 그보다 먼저, 나와 함께 하고 싶어했던 사람. 오늘도, 어제도, 지난 여름에도… 8년 전에도, 나와 함께하기를 바랐던 소년. 데리러 올 사람도, 돌아갈 버스도 없는 늦은 밤길을,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그 소년의 몰랐던 뒷모습을 이제야 본다. 



“......”



민준은 송이를 보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손을 흔든다. 송이도 같이 손을 흔들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방으로 가는 동안에도 생각했다. 그가 돌아가고 있는 길. 아무도 없이 오로지 혼자 가는 길.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그의 외로운 길.



철컥.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키를 홀더에 꽂지 않아 아직 어두컴컴하다. 얼마나 깊은 곳에서부터인지 모를 감정이 빠르게 치밀어 오른다. 



“…흐흑…”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두운 방 입구에 서서 그대로 눈물을 쏟아냈다. 가슴이 너무 매여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눈물은 얼굴을 가득 덮은 걸로도 모자라 쉴 새 없이 흐른다. 



어린 소년이 혼자 버텨야 했을 실패,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꿈, 오랜 시간 흔들리지 않고 쌓아온 신념,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는 여정, 원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간직해 온 추억, 그 속에서도 잊지 않고 돌아봐 준 어느 약속…



“…으흐..흐흑…”



그 길에 늘 혼자였던 그가 가여워서, 그리고 단 한 번도 내가 함께해주지 못해서, 그럼에도 나를 찾아와 주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기에도 미안해서, 고맙다고 말하기에도 무엇으로 보답해주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울기만 했다. 밤이 더 깊어지고 느리게 흐르지도 않는 시간 속에서 계속 울었다. 




우리의 시간들이 아까웠다. 스스로와 서로를 속고 속여 온 시간들이... 불쌍했다. 


 

 











먼지들 새 비번으로 잘 찾아들어왔니 ㅋㅋ

주말의 끝에 맞춰 들고 왔다 ㅋㅋ 한 주의 시작 또 힘냅시다. 낼 춥디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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