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Hello, my stranger 25 본문
Hello, my stranger 25
[BGM] 김예림 - 널 어쩌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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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예요? 아침부터 웬 선글라스.”
일찍 보자고 말했지만 조금 늦었다. 퉁퉁 부은 눈은 아침부터 찬물로 세수를 하고, 화장으로 가리려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밤새 펑펑 울어댔으니 그럴 수 밖에. 결국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을 나섰다. 민준은 늦은 것에 대한 건 별 말 없이 송이의 얼굴을 반은 가린 큰 선글라스를 보고 의아한 인사부터 건넨다.
“우리한텐 선글라스 끼고 다니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건데요 뭐, 새삼스레.”
“여태까지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는데 뭘, 새삼스레.”
민준은 송이를 빤히 보며 왜 맘에 안 들게 그걸 쓰고 있냐는 투다. 송이는 검은 필름 너머로도 꿰뚫어 보일 것 같은 민준의 시선을 괜히 피한다. 그의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참고 참았는데, 호텔 방에서 혼자서 울었단 사실을 끝까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민준에게는 의연하고 싶었다.
“그러지 말고 얼굴 좀 보여줘요.”
“맨날 봐 놓고 뭘 또 보여달래요.”
민준이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보려하자 송이는 낼름 앞으로 쪼르르 도망가버린다. 민준이 놓칠 새라 빠른 걸음으로 쫓아와서는 뒤에서 아쉬운 목소리로 빈정거린다.
“안 그러면 이렇게 볼 필요가 없지. 인터넷에 이름만 쳐도 예쁜 사진 많이 나오고, 서울에서 눈만 돌려도 천송이 찾기가 얼마나 쉬운데.”
“......”
“뭐… 그럴 거면 내 얼굴도 그냥 핸드폰에서 찾아 보시든가.”
저런 식으로 꼬아서 얘기하는 게 저 인간 특기라는 걸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얄미워 죽겠다. 내가 왜 그러는지 알기나 하는지. 은근히 꽁한 성격에 저러는 게 한참을 갈게 뻔하다.
“...알았어요! 별 걸 다 까다롭게 구네.”
그래서 송이는 못 이긴 척 선글라스를 벗는다. 손으로 눈을 가려보지만 민준이 철없는 남자 애처럼 자꾸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 와중에 송이가 왜 그렇게 피하려 했던 건지 어찌 알아채고 씨익 웃는다.
“아아. 눈 엄청 부었구나?”
“에이씨. 어제 저녁 늦게까지 먹어서 그래요.”
“뭐 얼마나 먹었다고. 혹시 밤에 혼자 라면 끓여 먹은 거 아니에요? 한식 타령 하더니.”
“헐. 아니거든요? 나 야식 같은 거 안 먹어요.”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신나게 놀려대는 민준과 아침부터 티격태격. 송이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늘 아침 그를 만나러 나오면서 내심 걱정했었다. 몰랐던 서로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괜히 다르게 대하고 조심스러워질까 봐.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현재의 우리는 변한 게 없다는 걸, 만나자마자 확인하고나니 어쩐지 마음이 더 편해진 것만 같다.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트집을 잡고 유치하게 다투는 게, 원래 도민준과 천송이였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맞는 거 같은데? 아님 이렇게 부었을 리가.”
“아니라니까요! 그냥 좀 피곤하면 가끔 이래요.”
버럭, 약간 신경질 내며 대꾸하니 민준이 웃으며 송이의 어깨를 붙잡고 제 쪽으로 마주보게 한다.
“알았어요. 놀려서 미안.”
“......”
“그래도 예쁜데.”
그러더니 갑자기 큰 손으로 양 얼굴을 꽈악 감싸고는 제대로 대답도 못하게 만든다. 그 손 때문인지, 우리 사이에 하기엔 좀 부끄러운 말 때문인지는,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는 민준의 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준도 자기가 한 말이 조금 민망하다 싶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귀가 빨개진 채로.
“...그럼 말 나온 김에 한식당 갈래요? 가기로 했잖아요.”
“오케이. 좋아요.”
민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오늘을 시작한다. 그런데 진짜 혼자 라면 안 먹었냐, 아니라니까. 민준이 계속 부은 눈을 핑계로 송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참아지지 않는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싫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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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떡볶이랑 라면, 음...김밥도.”
“그걸 다 먹게요?”
“그 쪽은 찌개 중에 하나 시켜요. 같이 먹게. 제육볶음도 먹을까.”
누가 보면 몇 달은 한국 음식 못 먹은 줄 알겠다 싶은 표정으로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자기가 먹고 싶은 걸 고르고 그것도 모자라 민준에게 떠넘긴다. 그러자 민준이 송이에게서 메뉴판을 빼앗는다.
“다 먹지도 못할 거잖아요. 그냥 2개만 시켜요.”
“아, 왜요. 먹고 싶은 거 먹지도 못하게 하고.”
“어차피 이틀 후면 한국 갈 거잖아요.”
“......”
오늘과 내일. 이 곳에서 주어진 시간도 어느덧 그렇게 밖에 남지 않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이 시간의 짧음에 대해, 송이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아쉬운 생각을 하기엔 이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있는 것도, 일상의 대화를 하는 것도 절대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해질 때쯤 또 다시 찾아오는 낯섦.
송이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걸 알아챈 민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는 잠시 말이 없어진다. 화제를 딴데로 돌리려 직원을 불러 주문을 한다.
“떡볶이, 라면, 김밥 이렇게만 먹어요.”
“그럼 김밥 말고 순두부찌개.”
“그건 집에 가서 먹어요.”
“아아아.”
마지막까지 메뉴를 가지고 다투다, 주문 하시겠냐는 말에 두 사람 다 짐짓 놀라 언제 왔는지 모를 직원을 올려다 보았다. 어렵게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찾아온 작은 한식당에, 일하는 직원이 외국인인 걸 보고 들어왔는데 막상 주문을 하려니 젊은 한국인 여자가 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직원은 메뉴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은 송이와 민준을 보고 더 놀란 기색이다.
“어머, 천송이 도민준씨 맞으시죠!!”
“아… 예.”
이제 와서 고개를 반대쪽으로 숨겨보지만 아니라고 답하기엔 모자도 선글라스도 쓰지 않은 채 이 곳을 돌아다니던 것처럼 얼굴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
“웬일이야, 웬일이야. 너무 팬이에요.”
“하하, 감사합니다.”
“지난 번에 드라마 너무 잘 봤어요! 특히나 샌 안토니오가 배경이어서, 여기 한인들이 진짜 좋아했거든요.”
“아아…”
어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또 잊었다. 민준과 송이는 난감한 얼굴로 대충 웃고만 있었다. 직원은 흥분한 투로 드라마에서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려서 정말 좋아했니 어쩌니 하며 말을 늘어놓다가 결국,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지 않았으면 한 걸 묻는다.
“근데 드라마도 끝났는데 두 분은 왜…”
“아… 그게…”
이 곳에 왜 왔더라. 각자가 여기에 온 이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묻어뒀으니 뜬금없이 내던져진 근본적인 질문에 서로의 눈치만 볼 수 밖에 없다.
“... 화, 화보 촬영이요!”
“아, 네! 화보 촬영 그거. 저희가 그 드라마하고 비슷한 컨셉으로 촬영을…”
“아아. 그러시구나.”
그러다 생각나는 대로 뱉은 말에 나름 쿵짝이 잘 맞았다. 그 어디에도 두 사람이 실릴 화보는 없을 것이고, 같이 촬영을 왔다면 다른 스태프들은 왜 없는지, 조금만 더 생각하면 당연히 이상할 법도 한데 이 사람은 다행히도 그 말을 믿는 것 같다.
그 직원은 몇 번의 호들갑을 더 떨고서야 주문을 받고 자리를 떴다. 숨 막히는 시간이 지나고 둘 다 한숨을 푹 길게 쉬었다. 잠깐은 이 순간을 모면했다는 안도였지만 다시 걱정이 밀려온다. 우리 여기서 나갈까요, 이미 다 봤는데 나가서 뭐해요, 그냥 밥이나 먹고 가죠 뭐. 민준은 근심을 표하는 송이를 달래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 같다.
“……”
“……”
쉴새 없이 이어지던 말 소리와 웃음이 뚝 끊겼다. 송이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괜히 손님도 둘 뿐인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게 되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지만 젓가락만 손에 들고 멍하니 쳐다만 본다.
“안 먹어요?”
“네? 먹어요. 먹어야지.”
쓸데없이 또 오만 생각이 다 든다. 만약 사진이나 목격담이라도 인터넷에 올라와서 사귄다… 아니, 만난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지면 어떡하지. 그냥 같이 다니기만 했으니 친한 선후배라던가, 친구, 동료 사이라고 잡아떼면 그냥 믿어줄 지도 몰라. 그런데 한국에서도 아니고 해외에서까지 만나는 걸 보면 다들 의심하지 않을까? 대표님한테는 뭐라고 해명하지, 엄마 아빠한테는 또 뭐라고 하지. 그렇게 대충 넘어가더라도 이미 한 번 소문이 퍼졌으니 다시 만나기도 힘들겠지. 내가 바로 그걸 걱정했었는데. 얼마나 봤다고, 이제 좀 제대로 보고, 제대로 얘기하고, 제대로 뭐 좀 하려는데…
“저기, 만약에…”
“……?”
그러나 순식간에 퍼질 소문보다 더 궁금하고, 그 후의 일들에 대한 걱정들 보다 더 걱정되는 게 있다.
“지금 우리 같이 있는 거 알려지게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뭘... 어떻게요?”
“…사람들한테 뭐라고 말할 거냐구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앞에 앉은 이 남자가 뭐라고 생각할지. 우리의 이 시간들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송이에겐 그게 더 먼저였다. 그렇게 먹고 싶다던 떡볶이 한 개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민준에게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송이는 나름대로 심각하게 말을 꺼냈는데 민준은 어깨를 으쓱.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한다.
“음… 여행 갔다가 우연히 만났다. 이러면 되죠 뭐. 사실 그대로.”
“진짜, 그게 다예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나오는 대답에 송이는 약간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게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민준이 슬쩍 웃는다.
“…내 생각대로 말했으면 좋겠어요, 아님 선배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좀 더 진지해지길 바란 걸 알아챈 건지, 민준이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넌지시 묻는다. 살짝 내리깐, 절대 흔들리지 않는 눈빛은, 도대체 뭐에 섭섭한 건지 모를 마음을 은근히 털어놓게 만든다.
“…나는 그게… 우리가, 아니 그러니까 나랑 도민준씨가… 애매하기도 하고. 또 이게 괜히 말 나오면 껄끄러워지고, 만나기도 좀 그렇구…”
“……”
“연락 끊고 살 거 아니면 만나고 어쩌고 할 일이 있을 텐데… 아니, 내 말은 뭐, 동료로서 말이에요.”
또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민준은 그런 송이의 말버릇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알아서 잘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무슨 말인지.”
“……”
괜히 앞에 놓인 빈 접시만 쳐다보며 얘기하다 알았다는 말에 고개를 들어 민준을 본다. 많은 뜻을 담고 있는 눈과 입가의 미소. 그러다가 갑자기 또 핀잔을 늘어놓는다. 뭔 걱정이 그렇게 많아요. 빨리 먹기나 해요. 여기 오자고 한 게 누군데. 송이는 민준의 볼멘소리를 들으며 조금은 걱정을 덜어내고서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정확히 뭘 알았다고 한 건지, 주어도 없는 말인데도 마음이 놓인다. 걱정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냥 무엇이든 다 받아주고 다 해줄 것 같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지 않을 걸 알았다면, 애초에 리버워크 노란 간판의 카페에서 잠에 덜 깬 눈으로 그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부터 도망쳤을 것이다. 애초에 이 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
“대신 제가 사진 찍어드릴게요. 네?”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까 그 한국인 직원이 두 사람에게 싸인을 해달라고 종이와 펜을 들이밀었다. 송이는 민준이 먼저 나가있으라고 하길래 눈치를 보며 슬쩍 먼저 가게를 나섰다. 문 앞에서 그가 나오길 기다리며 힐끔 가게 안을 보니 민준은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송이의 싸인은 안 된다고 거절하고, 대신 자기가 싸인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주는 걸로 하자고 나름의 협상을 하고 있었다.
“친구가 천송이씨 팬이라 싸인 받으려고 했는데…”
“아, 친구 분이요? 제가 친구 분 꺼 까지 해드릴게요. 아예 몇 장 더 해드릴까요?”
민준은 송이의 몫까지 싸인을 다 하고 사진까지 몇 장 찍고 나서도 또 뭐라고 한참을 말한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온다. 조금 당황했던 것 같은데 아닌 척 많이 기다렸죠, 하며 송이에게 가자는 손짓을 한다.
일어날지 아닐 지도 모르는 일로 걱정했던 걸 알고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배려를 해주는 모습, 또 한 번 미안하고 고맙다. 나도 모르게 받은 게 많은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또 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알았어요- 라는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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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송이.”
라고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누군가- 랄 것도 없는데 이 곳에선. 꿈인 것 같기도 하고. 데자뷰 같기도 하고.
“......?”
눈을 떴다. 맞다,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지.
“이제 잠 좀 깼어요?”
“...방금 내 이름 불렀죠.”
“아니요? 안 불렀는데.”
말은 누가 반대로 하는지, 원.
송이는 어제부터 은근 슬쩍 이제 작은 샌 안토니오 시내는 다 봤다고 지겹다고 어딜 가냐고 징징댔고, 그래서 민준은 오늘 아침, 렌트한 차를 가지고 나타났다.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향한 곳은 샌 안토니오에서 차로 1시간 반 남짓한 거리의 오스틴이라는 곳이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바람도 쐬고 드라이브도 할 겸 따라 나섰는데, 차에 탄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민준이 천송이라고 불렀건 말건, 그건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고, 송이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차 밖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기지개를 쭉 펴며 주변을 둘러보니 두 사람은 어느 탁 트인 언덕 위 같은 곳에 있었고 눈 앞엔 낮고 넓은 건물이 몇 개 있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카페요. 유명하다고 해서. 와, 이런 데에 웬 카페. 하늘은 그 이름에 걸맞게 아주 짙고 맑았다. 송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잠을 깨려했다. 샌 안토니오의 시내와는 달리 조용하고 철저히 둘러싸인 외딴 곳에 있는 기분이 독특했다.
“여기 너무 좋다!!”
어느 한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팔을 벌려 정면으로 맞이했다. 차가울 수도 있는 바람을 만끽하며 민준을 보니 카메라를 손에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송이는 비싼 모델을 두고 어딜 찍는 거예요, 하며 카메라 렌즈 앞으로 뛰어든다. 그 어떤 세트보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 그 어떤 인위적인 포즈와 표정보다 자연스러운 진짜 미소, 그 어떤 전문 포토그래퍼보다 진심일 찰나. 이게 다가 아니에요, 하는 민준의 말에 송이가 먼저 신나는 표정으로 카페 입구 쪽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이런 데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긴요. 인터넷에 다 나오는데.”
“대박. 우리 밖에 자리 잡으러 가요, 빨리.”
안으로 들어서자 반대편 테라스 너머로 더 큰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큰 호수, 그 주변을 둘러싼 숲. 하늘까지 어우러져 탄성이 절로 나왔다. 실내에 테이블이 몇 개 있었지만 손님들은 모두 야외 테라스에 있었다. 민준이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인지, 송이 저 때문에 일부러 알아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곳에 함께 오자 한 것이 고맙다는 말을 설레는 웃음으로 대신하고 얼른 민준을 끌고 바깥 쪽으로 간다.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테라스 쪽은 훨씬 더 컸다. 건물은 마치 목재로 지어진 낡고 오래된 별장 같았고, 여러 테라스 공간들이 계단식으로 서로 서로 불규칙하게 이어진, 아주 특이한 건물 모습이었다. 송이는 와, 진짜 이런 거 처음 봐- 하는 감탄을 계속 하며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호수 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란히.
“좋다, 그죠.”
“네.”
한동안 말은 아끼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 잔잔한 청록색 호수, 여름이 아니라 울창하지 않지만 나름 푸르른 숲, 새파란 하늘은 매우 정적이었다. 분명 화려하지도 반짝이지도 않는데 그 조합이 아름답다. 송이는 그런다고 더 가까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몸을 내밀어 눈 앞의 광경을 본다. 자신의 감상에 대한 동의를 얻으려 고개를 돌리니 민준도 따라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친다. 별 거 없는 이 순간을 완벽하게 하는 것.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시간의 어울림.
“아, 맞다. 주문해야지.”
식당에 왔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아까 식사를 하고 왔으니 간단히 마실 것만 시키려 했으나, 송이의 호기심 때문에 결국 음식도 하나 주문했다. 음료와 음식이 나오고, 역시나 송이는 한 두 입 먹고는 배부르다고 포기한다. 옆에서 민준이 앞으로는 다신 안 시켜준다고 꾸지람이다.
경치를 감상하며 맥주병을 들고 홀짝이기만 하던 송이가, 좀 춥다고 전에 덮어줬던 점퍼 없냐고 투정을 부리자, 민준이 나한테 어디 맡겨 놓은 거 있냐고 두 번째 꾸지람을 한다. 그래놓고서는 투덜거리며 일어나 차에 다녀온다. 돌아와서 송이에게 점퍼를 툭 내던지고는 다시 자리에 앉는데, 왠지 모르게 민준이 아까보다 더 가깝게 다가와 앉는 느낌이다.
“여기서도 촬영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아마 지금 여기 한국인들 엄청 많을 걸요?”
“하하, 그렇겠네요.”
생각지 못한 민준의 대답에 송이의 웃음이 빵 터진다. 그러다 갑자기 여기 한국인 있나? 하고 어깨에 걸친 민준의 점퍼를 코 아래까지 끌어올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없어요, 없어. 민준이 이제 좀 그만 신경쓰라고 송이의 시선을 돌려놓는다.
“아무튼, 여기 진짜 마음에 들어요. 선하와 주호가 데이트 하는 장면에 어울렸을 것 같고.”
“대신 우리가 데이트 하잖아요.”
민준의 말에 흠칫. 놀라서 옆을 돌아봤다가 민준이 너무 빤히 보고 있길래 다시 앞을 본다.
“어머, 어머. 데, 데이트는 무슨.”
“참 나. 그럼 이게 데이트 아니면 뭐예요.”
“그, 그냥, 일행, 동행, 뭐 그런 거지.”
“그 말도 좋네요. 동행. 같이 길을 가는 사람.”
“별...”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방어를 못했다. 솔직하게는 말 못해도 맘에도 없는 소리는 말아야 하는데, 여전히 그게 쉽지가 않다. 솔직히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에 몇 번 있지도 않은 어설픈 연애 경험 속에서도 이랬었나 싶다. 아, 내가 지금 방금 뭐랬니, 연애라니 – 송이는 괜히 먹다 만 타코 조각을 하나 입에 집어넣고 어색한 대화의 틈을 메웠다.
“뭐, 여기 아니어도 우리가 샌 안토니오에서 찍은 장면들도 다 예쁘잖아요.”
“맞아요. 로케이션 씬들 전부 맘에 들어. 한국에서 한 것도 다 좋지만. 감독님이 워낙 또 연출 쪽엔 최고시니까.”
“전 특히 한강에서 찍은 것들, 좋아하는데.”
“어어, 나두요.”
대화는 자연스레 이제 끝난 지 한 달이 넘은 두 사람의 드라마에 대한 걸로 넘어갔다. 요 며칠 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먼저 했을 법한 드라마 얘기가 남아있었다니. 아직도 쌓여있는 스토리들이 괜히 반가워 신나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강원도에서 촬영한 것도 좋아요. 엄청 추웠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죠.”
“그 때 갈등이었던 상황이랑 약간 삭막한 배경이 너무 잘 어울렸어요.”
“우리 두 번 촬영한 샌 안토니오 골목 씬도, 그 상황이랑 걸맞고. 시작, 벅참, 뭐 그런 느낌 있잖아요.”
“감독님이 그런 거 잘 하시잖아요! 왜 그 키스씬도 어두운 밤에 예쁜 색의 조명이 빛나고, 꿈 같은 느낌이랄까…”
“아아- 키스씬요?”
역시 제일 관심 있는 분야인 연기와 연출에 대해 신이 나서 말하고 있는데, 덥석 또 민준에게 덜미를 잡혔다. ‘키스씬’이라는 말을 듣고 눈썹을 들어올리며 뻔뻔하게 반응하는 민준을 보고 아차 싶었다. 그냥 연기일 뿐인데-라고 넘기기엔 제 자신이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되돌릴 수도 없었다.
“하. 그 때 정말 빨리 꿈에서 깨고 싶었죠.”
“…왜요?”
“왜긴 왜겠어요, 그 때 선배가 엄청 엔지 냈잖아요.”
민준이 키스씬을 촬영하던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러는 표정이 마치 저를 한심하게 보는 것 같아서 약간 빈정 상했지만 사실이긴 사실이다. 뭐가 그리 어려운 지 입술이 닿기도 전에 엔지를 몇 번 냈는지.
“크흠. 그 날은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그랬어요.”
“...그 전 씬에선 컨디션 좋아보이던데…”
“거 참. 그 쪽은 엔지 안 내요? 그럴 수도 있지.”
“솔직히 드라마 찍는 동안 선배가 더 많이 냈죠.”
“그건 내 대사가 훨씬 많으니까 그렇죠!”
“에이… 그래도 나랑 경력 차가 몇 년인데.”
“경력이 무슨 상관이래. 사람이니까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민준 특유의 신경을 살살 긁어대는 말투가 시작되었다. 말꼬리는 어찌나 잘 붙들고 늘어지는지. 거기에 순순히 넘어가면 또 천송이가 아니다. 나름 자부심 있는 업, 연기에 대해 태클을 거니 반박을 아니 할 수가 없다.
“아아… 하긴 사람이니까. 그렇게 긴장을 많이 했구나.”
“어머, 누가 긴장했다 그래요?”
“그 때 표정 굳어있고 초조해 하는 게 딱 봐도 긴장해서 그런 것 같던데요, 뭘.”
“하. 저 긴장 안 했거든요? 키스씬이 처음도 아니고. 말했죠, 나 키스씬 10번도 넘게 찍어봤거든요?”
“언젠 20번이라더니…”
“그, 그게 중요해요? 아무튼, 나 그런 거에 긴장하고 그러는 사람 아니에요. 그 날은 좀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랬을 뿐이라구요.”
“아… 네. 그러세요오.”
내가 왜 이런 변명을 한참 후배인 이 인간에게 해야하는지. 말은 선배 선배 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 무시하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송이는 울컥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얼굴이 벌개진 채로 해명 아닌 해명을 하지만 민준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다. 미간에 힘이 빡 들어갔다.
“뭐예요, 그 반응? 하, 이거 뭐 다시 찍을 수도 없고.”
“다시 찍으면요?”
“그래요, 내가 또 한 번 한 실수는 또 안 하거든요? 다시 찍으면 잘 할 수 있어요.”
아까부터 민준의 시선이 호수 쪽이 아닌 계속 저를 향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 보듯 놀리던 그의 웃음이 미묘하게 잦아든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다시 찍으면 잘 할 수 있어요?”
“그렇다니까요, 그깟 키스씬.”
“...진짜?”
“진짜 잘 할 수 있…!”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입술이 닿았다. 리허설도 없이,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다가온 서늘한 기운을 피하려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 몸이 굳어 뒤로 기울어지려는 걸 민준이 팔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긴다. 더 깊게 들어오는 예민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잘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게 지금도 해당되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게 아닌데, 우리는 지금 극 속의 주인공도 아닌데, 그저 우리는 우리일 뿐인데.
민준의 손이 천천히 송이의 팔을 타고 내려와 손을 감싼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던 가보다. 아주 작은 틈을 비집고 그의 손이 들어오려 했고, 송이는 아주 큰 용기를 내어 손의 힘을 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떨리는 손가락 사이 사이를 그의 손가락이 차지하고 그 어느 때보다 꽈악 세게 붙든다. 맞닿아있는 모든 촉각들이 하나씩 다 깨어나는 것만 같다. 입술, 손가락 끝, 얽혀있는 숨조차.
“......”
“......”
꿈인가, 만들어진 이야기인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곳은 어디인가, 태양은 어디 쯤 떠 있는가…
의심할 것도 없다. 이건 진짜라고 생각할 것도 없이, 진짜다.
어머나 세상에
이 키스는 이 상플을 쓰게한 시작점이랄까... 이 장면을 기준으로 모든 프레임을 짠 듯 ㅋㅋ
비지엠도 이거 쓸 때 제일 먼저 생각한 노래인데 이제 넣게 되었네..
또 느끼는 거지만, 이번에는 정말 정말 가볍고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이를 그리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또 생각보다 깊은 사이가 되었어... ㅋㅋㅋㅋ 난 어쩔 수 없는 먼지인가봐..
아무튼 아래 비지엠 가사를 놓고 갑니다 (클릭하면 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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