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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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llo, my stranger 29

SCIENCE AND LOVE 2016. 3. 11. 08:10



Hello, my stranger 29

 

 




 

#

 

 

“게이지는 바닥을 향해 가는데, 주유소가 안 나와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그러니까 그 전에 기름을 넣었어야 했는데.”

“그래서, 무사히 주유소까지 갔어요?”

“진짜 빨간 불 들어오고 이대로 멈추는가 싶을 때 눈 앞에 딱, 나타나더라구요.”

 

 

처음엔 늦은 아침이라 생각하고 준비했는데, 하다보니 아침인지 점심인지 애매하게 되었다가 결국엔 점심도 저녁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으며 민준이 혼자 여행을 하며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기름이 떨어져 아슬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었다. 송이는 마치 조수석에 같이 타고 있던 사람 마냥 그 이야길 흥미롭게 듣고 있고.


 

“밥 안 먹어요?”

“아… 먹어요. 먹는 중인데.”

 

 

저도 모르게 젓가락을 들고선 가만히 민준만 보고 있었던 건지, 민준이 밥을 먹다 말고 묻는다. 송이는 먹는다고 하면서 민준보다 절반도 못 먹은 밥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아까 민준이 살짝 깨문 아랫 입술이 아직도 따끔한 느낌이 묘하다. 입을 맞춘 채로 자꾸만 가까이 밀고 들어오는 민준 때문에 뒤로 넘어가지 않으려 얼마나 애썼는지 모르겠다.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시작이 어땠는지 끝이 어땠는지, 정신 차려보니 지금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에 깨닫는 순간에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만 알면 됐다.

 

 

“그럼, 마이애미는 다 보지도 못하고 왔겠네요.”

“그렇죠, 거기 도착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아침에 다시 공항으로 갔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이틀이나 걸려서 올 생각을 해요. 어차피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돌아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 나는데 어떡해요.”

“......”

“그래서, 다시 갈까요? 마이애미로?”

“누가 그러래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민준이 빤히 쳐다보며 하는 다정한 말투가 아직도 적응은 잘 안 된다. 어디까지 웃어야 할지 모르는 입술 끝을 어색하게 올려 웃는다. 매번 예상치 못하게, 하지만 필요하다고 느낄 때마다 눈 앞에 나타나주는, 대책 없는 민준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민준은 밥 한 공기를 금세 다 비워내고 한 그릇 더 먹어도 되냐고 한다. 그러면서 일부러 기분 좋으라고 잘 먹는 척 하는 거 아니고, 진짜 배고파서 그러는 거란다. 송이가 밥을 더 가져다주자 민준이 고맙다고 하고는 못 다한 이야기를 덧붙인다.

 

 

“마이애미는 다음에 같이 가요.”

“...알았어요.”

 

 

어렸을 땐, 약속을 하면 다 지켜질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현실 속의 날들을 살면서 그 약속들은 대부분, 그냥 하는 말, 할 말이 없어서 하는 말, 인사치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어느새 자신도 그런 무의미한 약속들을 서슴없이 하게 된다.

 

잊혀지고 외면 받은 약속들 속에서 그 또한 그럴 거라 생각했던 약속 하나를, 우리 언젠가는 같이 하자던 그 약속을, 민준은 끝끝내 지켜내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이 약속을 지킬 것이다. 앞으로도 함께 갈 것을.

 

 




 

#

 

 

송이가 그랬던 것처럼, 민준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무작정 혼자 떠났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회사의 콜을 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준은 가봐야겠다고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오지 마요. 괜히.”

“원래 안 나가려고 했는데요. 추워서.”

 

 

민준이 짐을 챙겨 나갈 준비를 하고, 송이는 현관문 앞까지 따라 나와 아쉬운 감정을 뒤로 숨긴다. 그러고 보니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같이 들어왔는지. 집 잃고 헤매다가 며칠 만에 돌아온 강아지 같은 꼬라지(?)만 아니었어도 집에 들이진 않았을 텐데. 갈 때가 되니 이제 와서 슬쩍 걱정이다. 그나마 민준의 매니저가 집 앞까지 데리러 온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잘 먹고 가요. 아, 또 잘 자기도 했고…”

“잘 먹고, 잘 자고 가서 다행이네요. 가서 나처럼 뒷수습 하느라 고생 좀 해요.”

“… 또 서로 다 바쁘겠네.”

“연락하면 되죠. 연락해요.”

“연락 받아줘요.”

 

 

현관에서 마주 보고 있는 민준과 송이는, 믿을 수 없는 오늘을 이만 보내주기로 한다. 사랑스럽게 웃는 입술이 다가와 쪽, 작별의 키스를 하고, 송이는 혹여나 민준이 또 자길 놔주지 않을까 봐 얼른 등을 떠밀어 내보낸다. 놓아주지 않으면, 놓아지지도 않을 거니까.




...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는 민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현관문이 천천히 닫힌다. 그제야 터지는 긴 호흡. 여태 숨 한 번 못 쉬었던 것처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는다. 닫힌 문을 뒤로하고 돌아서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차마 앞에서 표현하지 못한 설렘을 마음껏 드러낸다. 혼 빠진 사람처럼 거실로 터덜 터덜 걸어와 소파에 주저 앉는다.

 

그러다 이 자리에서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고는 민준이 덮고 잤던 담요를 끌어안는다. 미쳤나봐, 요즘 들어 스스로를 미쳤다고 수도 없이 다그치지만 딱히 그 해결 방법을 찾을 생각은 없다.

 

 

“어, 이거…”

 

 

혼자서 두근거림의 여운을 느끼다 담요 안에서 민준의 가디건을 발견했다. 언제 놓고 간 거지, 송이는 일어나 민준의 가디건을 가지고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벌써 갔으려나, 얼른 민준의 뒤를 쫓아갔다.

 

 

“......!”

 

 

쾅- 대충 슬리퍼만 신고 밖으로 나와 대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건 다름 아닌 민준의 매니저였다.

 

 

“아…”

“......?”

 

 

이미 민준의 매니저가 송이의 집 바로 앞까지 차로 데리러 와 있을 거란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방금 민준이 나왔던 그 문에서, 송이가 나오는 걸 본 민준의 매니저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린다.

 

 

“형, 그러니까, 지금…  형이 이 집에서…”

“응?”

 

 

차에 짐을 싣고 있던 민준이, 매니저의 더듬거리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다. 송이는 자기가 너무 성급히 따라 나온 것이 아차 싶어 민준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민준과 항상 함께 하는 가까운 사이다 보니 지금이 대체 어떤 상황인 건지 곧 알게 되겠지만, 이런 식으로 벌써 맞닥뜨리게 될 줄은 아마 이 셋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가 천송이씨 집이었어요?”

“야야, 조용히 좀 해.”

“친구네 집이라면서요!”

“음…어, 그게…”

“네??”

“…아니, 뭐… 친한 사이가 아닌 건 아니잖아? “

“참 나. 뭐라는 거예요, 형.”

 

 

민준의 매니저는 황당한 걸로도 모자라 배신감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민준도 예상치 못한 이 상황이 곤란했는지 횡설수설하고만 있었다. 송이 또한 두 사람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냥 쉬다 올게, 하고 떠나놓고선 연락 한 번도 안 하시더니,”

“그건 미안.”

“오늘 뜬금없이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시질 않나.”

“나 그래도 예정보다 3일이나 일찍 들어온 거야.”

“그래서 한국 들어오자마자 들른 곳이, 천송이씨 집이라구요?”

 

 

주변에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천송이씨 집’이라는 단어에 목소리를 낮춘다. 매니저의 표정이 아무리 해도 이 시츄에이션이, 이 둘의 관계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민준이 답답하다는 듯이 타이른다.

 

 

“야, 너 전에 장기 해외 촬영 갔다 왔을 때, 오자마자 누구 보러 갔어?”

“예? 갑자기 그건 왜…”

“너 공항 도착하자마자 누구 보러 갔잖아.”

“그야… 여자친구 보러 갔...”

 

 

민준이 그렇게 돌려 돌려 말하고 나서야 매니저의 표정이 변한다. 송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나도 그런 것뿐이라는 듯한 민준의 해명 아닌 해명이 재밌어서 픽 웃었다. 얼굴이 더 붉으락푸르락해진 매니저가 민준과 송이를 번갈아 보며 두 분이 언제부터 그랬다고, 난 정말 몰랐는데? 아니, 어쩐지 좀 이상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며 호들갑이다. 이 쪽도 범이 못지 않게 둔한가 보다.

 

민준은 조금은 후련한 것처럼 숨을 내쉬고는 송이에게 다가와 가디건을 돌려받고는 얼른 들어가라고 송이를 열린 대문 안으로 떠밀었다. 송이도 눈치를 보며 대충 잘 가요, 인사 한마디만 조용히 하고 문을 닫았다. 대문 너머로 여전히 두 사람이 투닥거리면서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넌 눈치 좀 키워라. 눈치를 줬어야 키우죠! 에이, 설마, 네가 아무 생각이 없는 거겠지. 형 여자한테 관심 없으시잖아요. 야, 그건…… 가면서 얘기하자.

 

 

다음엔 저걸 물어봐야겠다- 싶었다. 정말 그동안 여자한테 관심이 없었는지, 그리고 왜 없었는지.

 

 







#

 


다시 집으로 들어와 설거지를 하고, 거실을 정리하는 동안 송이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그의 또다른 흔적을 발견했다. 뭘 또 두고 간 건가 싶어 확인해 보니 그건 네다섯장 정도 되는 비행기 티켓들이었다. 보름 전쯤부터 시작해 한국에서 샌 안토니오로 , 그 곳에서 마이애미로, 마이애미에서 LA로, LA에서 한국으로 오는, 그의 이름이 쓰인 티켓엔 그간의 그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티켓 뒷장에 익숙한 그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 지상에서

내가 만난 가장 행복한 길

늘 가고 싶은 길은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




 

물어본다는 건 며칠 째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잠깐의 꿈결 같은 시간도, 결국 현실의 일부분이었는데 잠깐 그걸 잊었다. 그래도 그 시간 덕분에 현실이라는 매일을 살아간다.

 

그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민준과 송이는 모두 바쁜 날들을 보내느라 그 후로도 거의 만날 수가 없었다. 늦겨울을 보내고, 모호한 경계의 봄을 맞이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딱 한 번, 그것도 늦은 밤 겨우 시간이 맞아 민준의 차 안에서 본 게 전부였다. 그래도 꼬박 꼬박 문자를 하고, 주변 눈치를 봐가며 전화도 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민준은 자기도 피곤할 법한 날에도 송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루의 마지막에 꼭 그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었다. 서로의 일정을 알려주며 언제 어디서 만날 틈이 없나 같이 고민하는 건 아주 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만나지는 못해도 만날 날을 손꼽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만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정말로 볼 수 있는 게 더 좋겠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고 난 후 정확히 7일, 민준은 송이에게 처음으로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 보고 싶네.

“거기서 한 바퀴만 돌아봐요. 그럼 어딘가에 내 얼굴 있을 걸요.”

= 그런 얘기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알아요.”

 

 

나도 그렇다, 나도 보고 싶다는 말이 그 순간엔 왜 그리 어렵던지. 연기라면 더 쉬웠을까.

 

 

= 어떡하지?

“뭘 어떡하긴 어떡해요…”

 

 

지금 모든 걸 내팽겨치고 달려간다-와 같은 빈말이 떠올랐지만 진심이 되어버릴까 속으로만 삼켰다. 그럴 듯한 답을 찾지도 못하고 그냥 웃기만 했다. 그래도 괜찮다. 정말로 괜찮다.

 

 

결국 조금 성급히 답을 찾은 그가 찾아왔다.

 

 



...





“어? 도민준씨?”

 

 

화보 촬영이 한참인 스튜디오. 민준이 자신도 광고 촬영을 하는 장소가 바로 근처라고 문자를 보낸 지 30분도 되지 않아 송이가 있는 곳으로 갑자기 찾아왔다.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에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세트장 한 가운데의 송이에게서 민준으로 옮겨갔다.

 

 

“...아, 안녕하세요.”

 

 

민준은 본인이 제 발로 찾아오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눈길들에 조금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사람들에게 하나 하나 인사를 했다.

 

 

“어머, 도민준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연결점을 찾을 듯 말 듯, 의아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당황한 건 송이였다. 지금 이 시점에, 여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도민준이. 송이는 놀란 얼굴로 그와 눈빛을 주고 받았다. 여기 왜 왔어요, 아니 난 그냥 근처라 길래 보고 싶어서 왔는데 이렇게 주목 받을진 몰랐네요. 아주 그냥 광고를 해요, 광고를.

 

 

“맞다. 얼마 전에 둘이 같이 드라마 했지.”

“네, 그… 제가, 그러니까, 드라마 끝나고 천송이 선배님 오랜만에 뵈어서… 마침 근처에 계시다길래 인사도 드릴 겸…”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알아서 이 곳에 온 이유를 늘어놓는 민준의 귀 끝이 빨갛다. 아마 그걸 눈치 챈 사람은 송이 밖에 없을 것이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손님 덕분에 촬영 흐름이 끊기고, 그런 참에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송이는 눈치를 보며 슬금 민준에게로 다가갔지만 몇몇 그와 아는 사이인 사람들이 먼저 그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그 사람은 당신들 말고 나 보러 온 건데. 송이는 뭐라 말도 못하고 주변에 혼자 쭈뼛거리며 서 있다가 결국 민준과 가장 마지막에 인사를 하게 되었다.

 

 

“…오랜만이네요.”

“네…”

 

 

어색하게 마주 보고 선 두 사람.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지자 그제야 둘만 남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래도 송이는 한 번 더 주변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놀랬잖아요.”

“미안해요. 조용히 인사만 하고 가려 했는데.”

“퍽이나.”

 

 

민준은 누가 봐도 촬영을 하다 말고 온 것 같았다. 빳빳한 흰 셔츠에 짙은 회색 수트를 입고 머리까지 반듯하게 넘긴, 누구라도 한 번쯤 돌아볼 모습을 하고선 어떻게 조용히 왔다 가겠다는 건지. 송이는 민준을 장난스레 흘겨보았다. 그래도 민준은 뭐가 좋다는 건지 송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보같이 웃기만 한다.


서로 보지 못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오랜 기간에 속하는 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체감은 길었으니 오랜만이라고 해두자. 그리고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눈 앞에 있는 건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다. 여행 중에는 거의 자연스러운 평소 모습만 보았으니까.

 

 

“아… 진짜 보기 힘들다.”

“이렇게 나와도 돼요?”

“여기 사거리 건너편에 있는 데라 잠깐 쉬는 시간에 나왔죠. 얼른 다시 들어가봐야 해요.”

“끝나고 부르지…”

“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이 때 아니면 안되겠다 싶어서.”

 

 

민준은 이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실소를 터트린다. 이어 송이도 따라서 웃는다. 숨길 수 없는 감정을 억지로 숨기는 걸 실패하고 서로를 보며 웃는데, 그 짧은 찰나도 용납하지 못하겠는지 스튜디오 중앙 쪽에서 송이를 부른다.

 

 

“송이씨, 와서 사진 확인 좀 해봐요.”

“아, 네! 가요.”

 

 

어쩔 수 없이 제대로 된 대화 몇 마디 나누지 못하고 일터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 가야 해요? 아니요, 조금 시간 있어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나도 보면 안 돼요? 뭘요? 찍은 사진 보고 싶은데. 흠. 그래요. 근데 이건 보정도 안 한 건데. 아, 사진 보정 하는 거였어요? 난 똑같아서 안 하는 줄 알았지. 허얼. 뭐래요.

 


송이는 이 경우에서도 농담이나 해대는 민준 때문에 약간 얼굴이 빨개진 채로 모니터 쪽으로 먼저 가 버렸다. 이미 몇몇 스태프들이 모여 여태까지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고 있었고, 송이는 사람들 무리 끝 쪽의 틈 사이에 자리를 잡고 모니터링을 하기 시작했다. 이 사진 괜찮네, 이 표정 예쁘다, 수도 없이 찍힌 자신의 모습을 신중하게 확인했다.


 

“......?”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뒷짐을 지고 있는 손 위로 제 것이 아닌 다른 촉감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보는 동시에, 시각보다 먼저 그 촉각이 어떤 것인지, 누구의 것인지 깨달았다.

 

어느샌가 민준이 옆으로 다가와 송이의 손을 슬쩍 잡고선 눈은 사람들 어깨 너머로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어, 나는 저 사진이 맘에 드네.”

“......”

 

 

그러면서 저게 마음에 든다, 저것도 좋다, 와, 역시 선배 최고네요- 라면서 뻔뻔하게 감탄사를 날리고 있다. 송이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혹여나 손 잡은 걸 누가 볼까 사방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두 사람이 서 있는 뒤 쪽엔 사람들이 없고, 모두들 앞을 보고 있어 들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어디서 용기가 생긴 건지 민준이 감싸고 있는 손을 같이 붙잡았다. 모니터를 보는 척 했지만 정신은 온통 그 손 끝에 가 있었다. 그가 눈 앞에 나타난 이후로는 계속 그랬다. 민준만큼이나 송이도 태연한 표정으로 등 뒤로는 그의 손을 잡고선 오묘한 긴장감을 즐겼다.





사람들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눈짓을 확인하고 뒤로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스튜디오 입구 문을 열고 나오니 복도엔 아무도 없고 음악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갑자기 어떤 둘만의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시간이 헤아릴 틈도 없이 짧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갈 때도 다같이 인사하긴 싫어서.”

“그래요. 빨리 가봐요. 그 쪽 어디 갔냐고 찾고 있으면 어떡해요.”

“괜찮아요. 매니저가 내 편이니까.”

 

 

또 사람들 눈에 띄어서 괜히 소란스러워 지기 전에 하는 수 없이 이 시간들을 아껴두기로 한다. 말은 가라고 하지만 표정은 반대로 말하고 있었던 걸 민준이 알아챘는지 아쉬운 한숨을 내쉬고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조심히 송이의 어깨를 당겨 끌어안는다. 송이는 누가 보면 어쩌냐고 한 번 살짝 밀어냈지만 민준은 신경 쓰지 않고 더 꽉, 송이를 안았다.

 

 

“......”

“......”

 

 

송이는 잠깐 망설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몸에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에 홀린 듯이 손을 들어 민준의 등을 감쌌다. 우리 외의 모든 시간들이 잠시 가던 길을 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긴긴 시간을 서로가 없이 살았을 때도, 매일 같이 함께 있었던 때에도 몰랐던 시간의 의미. 그 시간을 살고 있는 서로의 의미. 할 말이 참 많지만 어느새 모두 잊고 그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과 그 의미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철컥. 등 뒤의 스튜디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민준과 송이는 무슨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마냥 놀라며 재빨리 서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찌나 빨랐던지 문이 열리는 것보다 먼저였다. 두근 두근, 요동치는 심장을 모른 척 하고, 머리를 정리하며 민준과의 거리를 좀 더 벌렸다. 



“민준씨, 아직 안 갔어?”

“아… 이제 가려구요.”

“그래, 다음에 언제 한 번 보자구. 나랑도 작업한지 좀 됐잖아.”

“네, 연락 주세요.”



평소 민준과 친분이 있는 오늘 촬영 담당 사진 작가가 나오더니 문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아는 척을 한다. 송이는 잘 가요, 도민준씨, 라고 어색한 인사를 하며 괜히 조금 전까지 민준을 안고 있었던 손을 등 뒤로 숨긴다. 민준은 이번에도 눈짓으로만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뒷걸음질 치며 안녕히 계세요- 올 때처럼 연신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또 한다. 민준이 다섯 걸음 쯤 멀어졌을 때야 뒤를 돌아 가려는데, 옆에 서 있던 사진 작가가 민준을 불러세운다.



“아, 민준씨.”

“...네?”



민준이 또 뭔가를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 멈춰 다시 돌아본다. 송이의 시선이, 민준을 가리키는 손 끝을 저절로 따라간다.



“셔츠에 립스틱 묻었어.”



민준의 하얀 새 셔츠에 진하게 묻은 화사한 색의 얼룩. 무채색의 차림과 대비되어 눈에 잘도 띈다. 이어 작가님이 송이를 쳐다보고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다. 송이는 민준의 셔츠 위에 남겨진 것과 같은 색의 립스틱이 그려진 입술을 꾹 다물어 숨긴다. 그러나 이건, 숨겨지지 않는 사랑이다.



 

 


 



나의 삶에서

너를 만남이 행복하다


내 가슴에 새겨진

너의 흔적들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나의 삶의 길은

언제나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리움으로 수놓은 길

이 길은 내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도

내가 사랑해야 할 길이다


이 지상에서

내가 만난 가장 행복한 길

늘 가고 싶은 길은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 너를 만나러 가는 길, 용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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