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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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기(靑春記) 5

SCIENCE AND LOVE 2016. 9. 12. 09:53

 

 

청춘기(靑春記)
- Youthology
# 5



# 명인대학교, 2호관



피곤했다.


“뭐야, 무슨 냄새야, 이게.”


그냥 잠시 사물함만 같이 쓰면 되는 줄 알았다. 어차피 책도 몇 권 안 들어있고 중요한 걸 두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공간도 많이 남아서 별로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옆에서 봤을 때, 그 많은 짐을 들고 다니거나 거리가 먼 다른 사물함을 빌려 쓰는 게 더 비효율적일 것 같았다. 내 일이 아니면 상관이 없긴 하지만, 부탁을 거절할 만큼 냉정한 성격도 아니다. 적어도 스스로 생각하기엔.

민준은 월요일 아침부터 사물함 문을 열자마자 나는 이상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물함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삼각 김밥에서 나는 냄새인 것 같다.


“하……”


이 작은 사물함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 열 올리게 만들다니. 신기한 능력이다.


‘잠시만요!’
‘……?’
‘저 다음 수업에 늦어서.’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고 있으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급하게 민준을 밀어내고 자신의 책만 쏙 빼가질 않나,


‘나중에 정리해 놓을게요.’


이미 2/3는 본인의 물건들로 가득 채워놨으면서 정리조차도 더럽게 안 한다. 마음 먹고 자신의 것은 왼쪽, 송이의 것은 오른쪽, 이렇게 분리를 하고 정리를 해 놓아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어지럽혀져 있곤 했다. 그냥 같은 공간에 서로의 물건을 함께 두는 것이 이렇게 스트레스 받는 일일 줄이야. 정말 피곤했다.


“아, 진짜.”


아마 지난주에 넣어 두고, 깜빡 잊은 듯한 삼각 김밥은 주말 내내 혼자 사물함 안에서 썩어갔다. 민준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삼각 김밥을 손가락 끝으로 겨우 잡아 꺼냈다.


“어? 안녕하세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임시 사물함 쉐어메이트는 때마침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타났다. 송이가 월요일 1교시 수업이 있다는 건, 기숙사 식당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아침을 챙겨 먹는 걸 보았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 때쯤 나타날 걸 예상하기도 했다.


“헉, 맞다. 삼각 김밥.”
“……”


송이는 해맑은 표정으로 다가왔다가, 민준의 손가락 끝에 걸려 있는 참치 마요네즈 삼각 김밥을 보고 그제야 지난 주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눈이 엄청나게 커지며 놀란다.


“…그거 금요일 저녁에 잠깐만 넣어두려고 했던 건데…갑자기 술자리 약속이 생겨가지구…”
“사물함은 대체 언제 고친다고?”
“아… 그게 과사에 물어봤는데, 다른 데에도 작업이 밀렸다고…’
“빨리 좀 고쳐달라 그래.”


짜증이 한껏 난 민준의 말투를 눈치챘는지, 송이는 고개만 끄덕 끄덕.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들어 애처롭게 보이려는 척, 쳐다본다. 처음엔 마주치기만 해도 도망치려고 하더니 -물론, 알코올이 좀 들어갔을 땐 예외다- 이젠 뻔뻔한 눈빛을 드러내며 물러서지 않는다. 이제 내가 만만하다는 건가.

민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송이를 쳐다보고는 삼각 김밥을 툭 던지고 갈 길을 갔다. 얼떨결에 그걸 받아 든 그녀의 쨍한 목소리가 들렸다. 윽, 냄새!

본인이 저지른 건 본인이 알아서 해결해야지, 민준은 뒤도 안 돌아보고 수업을 들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도민준, 어디가?”
“나, 전자기학.”
“그거 209호인데?”
“아, 그래.”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갔을 무렵 마주친 동기 친구의 말에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강의실을 헷갈려 하다니. 그 쨍한 하이톤의 목소리 때문에 정신이 없다. 월요일 아침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밝은 웃음에 정신이 팔렸다.


“송이 언니, 왜 남의 사물함을 뒤지고 있어.”
“어, 내 사물함 망가져서, 잠깐 같이 쓰는 거야.”


3층에서 2층으로  계단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 정신 없는 목소리가 복도에 가득하다.


“헐, 도민준 선배 사물함이네?”
“어.”
“대박. 언니 도민준 선배랑 친해?”
“음… 그냥 서로 옆 사물함 쓰는 사이?”


딱 2층에 발을 내렸을 때 걸음을 멈춘 건, 바로 코너 벽 너머 들리는 자신의 이름 때문이었다. 남의 얘길 엿듣는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 앞을 지나기가 좀 그랬던 것뿐이다.


“와- 언니 사물함에 자주 놀러와야겠다.”
“왜?”
“나도 그 선배 얼굴이라도 가까이서 한 번 보게.”
“그러니까, 그 사람을 왜?”
“왜긴 왜야. 입학 때부터 얘기 엄청 많이 들었는데! 키도 크고 잘 생기고 공부도 잘 하고, 축구도 잘 하고.”
“아… 그으래?”


설마, 라는 뉘앙스가 가득한 시큰둥한 반응에 약간 기분이 묘했다. 아니, 물론, 잘난 척 하는 것도 아니고 저를 추켜세우는 말이 다 사실이라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일종의 뒷담화라 그런 건지, 동의를 해주지 않은 것 때문인지, 기분이 묘한 이유가 애매하다.


“말은 해봤어? 착해?”
“음… 내 생각엔.”


어쨌거나 그 말에 왜 더 귀를 쫑긋, 기울였을까.


“…싸가지 없어.”


하- 민준은 실소를 뱉었다. 나름 옆의 동기에게 속삭이며 말은 했지만, 다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은 딱히 듣기 좋은 말이 아닌 건 분명했다. 나 참. 싸가지 없이 굴게 만든 게 누군데.


“하…”


민준은 더 이상 숨어(?)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코너를 돌아 벽 뒤에서 나왔다. 갑자기 나타난 민준을 발견한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란다. 민준은 무언의 눈빛으로 송이를 빤히 쳐다보며 두 사람의 앞을 지나갔다. 송이는 뜨끔했는지 잠시 시선을 피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그 눈싸움에 참전한다. 내가 뭘 어쨌다고, 라고 말하는 듯이. 역시, 뻔뻔한 게 맞다.


 

 

 

 

 

 

 

# 명인대학교, 대운동장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매주 목요일 오후, 학교 운동장에서 과 동기, 선후배들과 축구를 한다. 남들처럼 학교 생활을 잘 하고 싶다거나, 인간 관계를 만들어 보자-하는 부수적인 이유 같은 건 따로 없었다. 모든 운동을 좋아하지만 그 중 축구를 보는 것도, 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었을 뿐이었고, 그런 규칙적인 체육 활동이 생활의 밸런스를 맞추는 데에 좋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운동장에 와서 축구를 하고 적당히 뛰었다 싶으면 알아서 빠지고 돌아간다. 끝나면 모두들 술을 마시러 가기 바쁘지만, 그런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잘 가지 않는다. 가끔 친한 친구 몇 명만 있을 때나, 선배가 꼭 오라고 할 때에나 참석하는 정도. 요즘엔, 학기 초에 대거 들어온 신입생들이 너무 축구를 못해서 짜증이 난다. 아무리 동네 축구라 해도 수준이 맞아야 하지.


“오빠! 저번에 다친덴 괜찮으세요?”
“야, 너 오늘도 후보야?”
“제가 오늘 음료수 사왔어요! 맨날 얻어먹기 미안해서.”


게다가 이 남자 소굴에서 들리는 이질적인 목소리는, 언제부터인가 매주 나타나 불필요한 불편함을 만든다. 

처음엔 복학생의 꼬임에 어리버리하게 속아서 왔는가 싶더니, 이젠 자기가 이 축구부 매니저라느니, 응원단장이라느니, 하면서 여기저기 간섭을 해댄다. 오프사이드가 뭔지도 모르고 일단 골망에 공만 들어가면 다 되는 줄 아는 애가 무슨. 저 여자애 때문에 유니폼도 마음대로 못 갈아입는다.


“안녕하세요.”
“……”
“…그 사물함… 다음 주면 고쳐준대요. 진짜.”


축구를 하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고 있는 운동장 스탠드엔, 진작부터 송이가 와서 한 가운데에 떡하니 앉아있었다. 오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어쩌고… 벌써부터 시끄럽다. 민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멀찍이 떨어진 곳에 가방을 두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려 하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던 송이가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사물함 얘기를 하길래 알았다고 하고선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서 쭈뼛 서 있던 송이는 민준의 눈치를 보다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총총 뛰어가버린다.


“……”


대체 남자들끼리 공 차는 곳에 여학생 하나가 있어봤자 뭘 한다고 처음부터 여기엘 데리고 온 건지 모르겠다. 다들 시커먼 얼굴만큼, 속도 시커멓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밥 사주고, 술 마시자고 하고, 괜히 연락하고…


‘야, 천송이 이쁘지 않냐.’
‘난 이번 신입생들 중에 걔가 제일 예쁘더라.’
‘난 별로. 얼굴은 괜찮은데, 좀 너무 말괄량이 같달까.’
‘어, 조용한 줄 알았는데 술 마시니까 확 바뀌더라.’



마음대로 얘기해도 되는 연예인 가십거리처럼, 아무렇게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런 걸 다 알고선, 저 인간들과 하하호호, 웃고 있는지.


“인원수 찼으면 빨리 뛰시죠?”


민준은 대충 준비 운동을 마치고 송이와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축구 하러 왔으면 축구나 할 것이지.


 

 



 

 


 

“도민준, 갈 거지?”

“아니.”

“왜! 아까는 간다며.”

“오늘 너무 많이 뛰었어. 피곤해.”

“21살 대학생이 할 소리냐.”

“사람도 너무 많고. 다음에 갈게.”

 

 

보통 1시간 정도 뛰고 나면 대충 빠지는데, 오늘은 너무 무리했다. 거의 2시간을 넘게 쉬지 않고 뛰었다. 신입 애들이 축구를 너무 못하는 탓이다. 이번 학기에 개강 후 한 번도 회식에 참석한 적이 없어서 오늘은 그 자리에 가려고 했었다. 축구부 회장인 동기가 한 번은 좀 나오라고 하도 닥달하길래. 그러나 약간 지친 몸으로 시끄러운 술 자리 틈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 중 술 취한 누군가를 끌고 뒤치다꺼리 해줘야 할 것도 뻔했다.

 

다음엔 꼭 와라? 아쉬워하는 친구는 민준에게 다음엔 꼭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는 자리를 떴다. 짐을 정리하고 다같이 운동장 옆 체육관 샤워실로 씻으러 가는 사람들을, 스탠드에 앉아 쳐다보았다. 술 마시려고 축구를 하는 건지, 하여간 이해가 안 된다.

 

 

“……”

 

 

아직은 해가 짧은 초봄의 저녁. 어둑어둑해진 운동장엔 밝은 조명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민준은 사람들이 운동장 반대편으로 다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을 돌리고는 허리를 숙여 축구 양말을 벗었다.

 

 

“아… 멍들었네.”

 

 

아까 축구를 하던 도중에 정강이를 아주 세게 차였다.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도 쭉 통증이 있었지만 무슨 고집에서 계속 뛰었는지- 민준은 오른쪽 정강이에 뻘겋게 든 피멍을 살펴보았다. 오래 가겠는데-

 

 

“……?”

 

 

이제 저만 남았다 생각한 운동장 스탠드, 등 뒤에서 긴 그림자가 하나 더, 불쑥 나타났다. 민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다들 갔어요?”

“어. 좀 전에.”

 

 

초반엔 축구 경기를 구경하고 있다가 도중에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던 송이는, 모두가 가고 나서야 어슬렁 나타났다.

 

 

“에이, 잠깐 낮잠 자고 온 사이 다 가버렸네.”

“……”

“아니이, 혼자 축구만 보고 있기 재미없어서요. 너무 졸려서 기숙사 가서 잠 좀 자고 왔는데…”

 

 

다 저녁인데 무슨 낮잠. 게다가 누가 물어는 봤나.

 

 

“그 쪽은… 안 가요?”

“어.”

 

 

왜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아- 하고 그냥 수긍한다. 저의 기본적인 성향에 대해 대충은 파악한 모양이다. 민준은 축구화를 운동화로 갈아신으며 송이가 빨리 먼저 가기를 바랐다.

 

 

“허억! 다리에 그게 뭐예요? 다쳤어요?”

 

 

그러나 그녀는 계속 그 자리에 꾸물거리며 서있더니 민준의 다리를 보고 기겁하게 놀란다. 스탠드에서 한 계단 내려와 민준의 옆에 선 송이는 민준의 다리 위 큰 멍을 보며 자기가 다 아픈 것 마냥 눈살을 찌푸린다.

 

 

“진짜 아프겠다… 괜찮아요?”

“어.”

 

 

자꾸 가까이 다가와 들여다보는 게 영 부담스러워서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운동장 쪽으로 내려가려 발을 디디자 통증이 좀 느껴지긴 했다. 약간 다리를 절뚝거리며 천천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하나의 그림자가 뒤에 따라붙는다.

 

먼저 앞서 나가진 않고 뒤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조용히 따라오는 긴 생머리의 그림자.

 

 

“……”

“……”

 

 

아무 말이 없으니 더 거슬렸다. 그렇다고 뭐라 말을 하라는 것도 아니지만. 민준은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하며 빨리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맘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운동장을 나와 아직 학생들이 많은 농구장을 지나고, 불이 밝게 켜진 도서관 앞을 지나고, 5호관 앞을 지나고, 본관을 지나고, 호수 앞을 지나고… 발 끝만 보며 걸었다.

 

 

“……?”

 

 

불현듯 살짝 눈을 들었을 땐, 그 앞엔 이미 많은 그림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두 개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송이는 언제 간 건지 적어도 사방 10m 안엔 없었다. 드디어 갔네. 민준은 잠깐 쉬어가기로 하고 눈 앞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우리 캠퍼스가 이렇게 컸던가. 기숙사 가는 길이 멀다.

 

 

“……”

 

 

민준은 오른쪽 다리를 곧게 펴고는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젠장, 이건 한 며칠은 갈 것 같다. 민준은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털썩, 벤치에 등을 기대었다.

 

 

‘어! 도민준!’

 

 

뛴 지 한 2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나, 상대에게서 공을 빼앗아 혼자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때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들린 이질적인 목소리. 그 순간, 누군가에게 태클을 당했고, 고꾸라 넘어져 잔디 바닥 위에 한 바퀴 굴렀고, 결국 공을 빼앗겼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죽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자존심 상해 통증을 참고 억지로 2시간 넘게 뛰었다는 사실도.

 

 

 

 

 

 

 

 

 

 

# 명인대학교, 기숙사

 

 

“하……”

 

 

이번 학기 배정된 기숙사 룸메이트들은 다 마음에 든다. 1학년 신입생 2명도 착하고 성실한 것 같고, 나이가 좀 있는 4학년 형도 성격이 털털해서 괜찮다. 다만 그 형의 심각한 코골이를 제외하면 말이다.

 

민준은 축구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와 씻고, 요즘 한창 읽고 있는 책을 읽으며 하루를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자고 있는 4학년 룸메이트 형의 코 고는 소리에 영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자주는 아닌데 피곤한 날이면 저러는 것 같다. 몇 번 룸메 형의 어깨를 흔들어보았지만 그 때뿐이었다. 민준은 이대로 그냥 잘까, 했지만 어차피 자더라도 저 엄청난 소리 때문에 못 잘 것 같았다.

 

결국 민준은 조용히 독서할 곳을 찾아 휴게실로 내려왔다. 각 층에도 작은 휴게실이 있긴 하지만 거긴 대부분 학생들이 티비를 보고 있고, 1층에 있는 공용 휴게실은 매점이 문을 닫고 나면 조용한 편이다.

 

가끔, 자판기를 이용하려는 술 취한 학생이 집중력을 깨뜨리긴 하지만.

 

 

“……?”

 

 

민준은 휴게실 한 쪽 구석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어디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천송이. 그녀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오다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힌 것 같다. 아프지도 않은지, 그녀는 그걸 별로 신경 쓰지도 않고 원래 가려던 자판기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얼핏 시계를 쳐다보았다. 11시 40분. 그래도 시간 맞춰서 들어왔네. 민준은 송이가 자판기 앞에 서는 걸 보고는 다시 책을 보았다. 제발 오늘은 조용히 왔다 가길.

 

지잉, 지잉, 지잉, 자판기가 3번이나 지폐를 뱉어내자 송이가 에이씨, 하고 한 번 성질을 낸다. 4번째에는 성공을 하고 아싸, 좋아한다. 덜컹, 캔 음료가 떨어지고, 나오는 곳 덮개를 열어 음료수를 꺼내는 소리가 난다. 고요한 휴게실의 사소한 소리들이 유난히 예민하게 들린다.

 

 

“……”

 

 

이제는 거스름돈을 꺼낼 차례이지만, 한참이 지나도 쨍그랑,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설마 또 까먹고 간 건가. 민준은 아주 조금 눈을 들어 자판기 쪽을 돌아보았다. 그 때 송이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같은 버튼을 누른다. 덜컹. 이어 빨간색 콜라 두 개가 그녀의 양 손에 하나씩 들려진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온다. 제발 조용히 가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민준의 맞은 편 자리에 털썩 주저 앉는 송이.

 

 

“선물이요.”

“뭐?”

“선물.”

“참 나…”

 

 

달라고 한 적도 없지만, 500원짜리 캔 콜라 선물이라니. 민준은 송이가 쑥 내민 콜라를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덕분에 잔돈도 안 까먹고, 사물함도 빌려주고…”

“필요 없어.”

“에이, 그래도.”

 

 

민준은 눈 앞에 놓인 콜라를 무시하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좀처럼 넘기지를 못하고 있는 89페이지. 송이는 혼자 뭐라고 중얼대더니 자신의 콜라를 따져 마신다. 그러더니 갑자기 허리를 숙여 테이블 아래를 본다. 그러면서 대뜸 묻는 말이, 다리는 괜찮은가? 민준이 괜찮다고 대답하니 그러냐면서 다시 똑바로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는 콜라를 마신다.

 

 

“왜 책을 방에서 안 읽고 여기서 읽어요?”

“…방이 시끄러워서.”

“어어, 그럴 때 있어. 막 방에서 전화하고, 음악 크게 듣고. 그 쪽 룸메도 그래요?”

“코 고는 형이 있어서.”

“아… 그런 경우도 있겠구나. 그건 좀 스트레스 받겠다.”

 


왜 내가 술 취한 여자랑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시간은 점점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송이는 콜라를 다 마실 때까지 일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민준이 먼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2시 다 됐어.”

“아, 벌써?”

 

 

언제 신발까지 벗고 있었던 건지, 송이는 12시가 다 되었단 말에 운동화를 고쳐 신고 있었다. 민준은 그런 송이를 두고 그냥 휴게실을 나왔다. 괜찮다고 했기에 불편하게 걷는 모습을 보이기도 좀 그래서 최대한 티를 안 내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빨리 걸어갔다.

 

 

“……”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한참 위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숫자를 쳐다보며 서 있으니, 비틀대는 걸음이 툭 어깨를 밀치면서 옆으로 다가와 선다.

 


“…여기 남자 기숙사 엘리베이터인데.”

“아, 그러네. 쏘리.”

 

 

여자 기숙사 엘리베이터는 반대편 쪽으로 더 가야 하는데, 그것도 구분 못할 만큼 취했나. 민준이 턱 끝으로 반대편을 가리키니 송이가 헤헤, 실없이 웃으며 그 쪽으로 걸어간다. 술 냄새- 민준은 올 때와 같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송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라 버튼을 누르고 서 있는 걸 확인하는 사이,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9층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1, 2, 3 …

 

 

“……?”

 

 

민준은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입고 있던 가디건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참 나…”

 

 

빨간색 콜라 캔. 휴게실에서 나올 때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고 나왔는데, 이걸 어느 틈에 집어 넣고 간 건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민준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자 웃음이 터진 채로 손에 쥔 차가운 콜라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아마도 네가 내게 준, 첫 번째 선물이었을 거야. 그 500원짜리 캔도 선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니, 차마 쓰레기통에 그냥 버릴 수가 없더라. 넌 항상… 그런 이상한 재주가 있었지.

 

 

 

 

 

 

 

 

 

 

 

 

# 명인대학교, 2호관

 

 

4, 2, 6, 0, 철컥

 

 

“……”

 

 

웬일로 사물함이 깔끔하게 정리 되어 있다. 147번 사물함은 아직도 망가진 채였다. 나중에 치우겠다더니, 정리를 하긴 했네. 민준은 깔끔해진 사물함 안을 보고 의외라고 생각하며 책을 찾아 꺼냈다.

 

 

“어어! 잠깐만!!”

 

 

다시 사물함 문을 닫으려 할 때 또 어디선가 튀어나온 송이가 소리를 냅다 지르며 달려왔다. 주변이 한 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대낮부터 술을 마셨을 리는 없고.

 

 

“나나, 빨리 빨리.”

“…뭐?”

“대학 영어. 대학 영어.”

 

 

민준이 사물함을 가로 막고 서 있자, 등 뒤에서 팔만 뻗어 손가락질을 한다. 다급한 손짓에 민준은 얼결에 송이가 말한 대학 영어 교재를 사물함 안에서 꺼내주었다.

 

 

“땡큐, 땡큐!”

 

 

빨리, 대학 영어, 땡큐, 이 모든 단어를 두 번씩 되풀이하는 걸로 용건을 끝낸 송이는 교재만 쏙, 민준의 손에서 뺏어다가 왔던 길로 사라진다.

 

 

“…뭐야…”

 

 

민준은 방금 뭐가 지나간거냐는 얼굴로, 급히 뛰어가는 송이를 쳐다보았다. 운동화 끈 풀렸는데. 그걸 말해줄 새도 없이 송이는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은근히 말이 짧다. 동갑이라니 뭐 기분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야, 도민준.”

“…어, 그래.”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쳐다보고 있냐.”

 

 

아무리 그래도…

 

 

“…내가 뭘.”

 

 

 

 

 

 

 

 

 

 

 

 

 


 

별그대 1000일을 맞이하여 업로드

먼지들 추석 잘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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