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청춘기(靑春記) 3 본문

# 청춘기(靑春記) 3

SCIENCE AND LOVE 2016. 9. 1. 14:34

 

 

청춘기(靑春記)

-Youthlogue

# 3

 

 

 

 

 

# 지금, VANCOUVER TO JASPER VIA RAIL

 

 

 

“그러니까, 이 기차표를, 그 인간한테서 샀단 말이야?”

“어.”

“왜?”

 

 

365일 중,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 오늘 이 시간, 대한민국도 아니고 태평양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의 어느 점 같은 이 기차 안에서 그것도 서로 나란히,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인물과 함께 만 하루의 여정을 보내게 될 거란 이 모든 건, 마치 신이 억지로 끼워 맞춘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왜긴 왜야, 너랑 가려다가 취소한 여행인 줄 몰랐으니까 샀겠지.”

“하… 기가 막혀서.”

 

 

하지만 생각보다는 복잡하지 않았다. 송이, 송이의 전 남자친구, 그리고 민준. 셋 모두 같은 학교 같은 과이니 잘 아는 사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말이다. 민준은 두어달 전 학교 선후배 모임에서 송이의 전 남친, 종열을 만났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민준은 방학 동안 여행을 가고 싶어했고, 종열에겐 환불 할 수 없는 티켓들이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이렇게 간단한 우연이었으니, 그 바쁘신 신께서도 끼워 맞추기가 참 쉬웠겠지.

 

 

“윤종열. 취소 수수료따윈 안 아깝다더니.”

“아…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 형은, 진짜.”

 

 

말도 안 되는 퍼즐을 맞춰보는 사이 기차는 출발했고, 단 한 번뿐인 그 때의 설레는 순간은 허무하게 놓쳐버렸다. 어쨌거나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이상, 꼼짝없이 이 갑작스런 만남에 적응해야만 했다.

 

 

“……”

“……”

 

 

대충 사건 개요만 브리핑한 후, 한동안은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앉아만 있었다. 기차가 천천히 도시를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낯선 풍경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대상을 알 수 없는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민준에게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뭐부터 물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고작 30만원이 아까워 더 많은 돈을 들여 여행을 왔고, 그 인간은 고작 30만원이 아까워 후배에게 표를 팔았다. 그리고 이 인간은 고작 몇 만원을 아껴보자고 선배에게 덜컥 표를 샀다.

 

송이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시 한 번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부터는 무조건 좋은 게 좋다고, 좋은 생각만 하기로 했으니까. 어차피 각자의 몫이었고, 그 표를 그냥 내버려두든, 남에게 팔든, 그건 그 사람 마음이다. 표를 팔아 마련한 돈을 보태 다른 여행을 간 것도, 아마 나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말했듯이 ‘30만원’은 누구 집 개 이름이 아니니까. 어차피 안 갈 여행이었고, 가기로 마음 먹은 건 나다. 이 여행은 더 이상 그 사람과의 여행이 아니고, ‘나의 여행’이다. 나 혼자만의 여행이다.

 

그런 식으로 다시 한 번 이 여행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니,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얼마에 샀는데?”

 

 

송이는 이제 살짝 가라앉은 투로, 기차 안내 책자를 읽고 있는 민준에게 물었다.

 

 

“20만원.”

“참 나. 많이도 받았네. 어차피 날릴 거였으면서.”

“그러게.”

 

 

민준은 안내 책자 같은 건 애초에 관심 없었던 것처럼 덮어버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송이는 아까부터 어이없는 실소를 머금고 있는 민준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또 물었다.

 

 

“…진짜, 내 얘긴 못 들었어?”

“장난해? 내가 그 사연을 알고도 이 자리를 샀을까봐? 난 그 형이랑 너랑 헤어진 줄도 몰랐어!”

“아님 됐지,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냐…”

“만약 알았더라도, 어차피 너도 안 오려던 거였잖아.”

“…그렇긴 하지.”

 

 

하긴 그도 저만큼이나 황당하고도 남겠지. 모두가 가진 비슷한 마음과 비슷한 기대감으로 여기까지 왔을텐데, 시작하자마자 믿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다니. 게다가 뭔가 속은 기분까지. 약간은 욱한 얼굴로 송이의 말에 대답한 민준은 이내 표정을 정리하고 뒷목을 만진다. 원래 감정 같은 건 잘 안 드러내는 성격이었는데.

 

 

“화낸 건 아니고, 그냥 좀 당황스러워서.”

“…어. 나도.”

 

 

예상치 못한 만남을 반가워하기도 전에 한바탕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서로의 잘못도 아닌 일 가지고. 그것이 휩쓸고 간 자리엔, 왠지 모를 적막이 남았다. 정말 반가운 건지도 잘 모르겠다. 인사도 없이 메워버린 3년 반의 시간. 인사는 늘, 없었다.

 

 

“……”

“……”

 

 

 

 

그간 소식을 모르고 산 것도 아니었다. 그가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고, 강원도 어디 추운 동네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는 것도, 휴가를 나와 종종 학교에 놀러왔었다는 것도, 제대하고 바로 복학하지 않고 휴학을 했다는 것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격증을 따고 여행을 하면서 1년을 보냈다는 것도, 친구들에게서 들었다. 바로 지난 학기, 졸업을 유예하고 한 학기를 더 다니고 있을 때, 그가 복학했다는 이야기도, 알음알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냐고, 관심 없는 척 했지만-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3년 반 만에 만나고도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마치 며칠 전에 본 사람처럼 물었던 걸까. 하지만 그건 잠시였을 뿐, 긴 공백은 다시 원래의 길이를 되찾고, 나란히 앉은 두 자리를 멀게 만들었다.

 

 

 

 

“……”

“……”

 

 

세 사람의 복잡하고도 간단한 관계로부터 시작된 우연은, 이제 세 사람이 아닌 두 사람만 남겨두었다. 이 기차에 올라탄 사람은 예전의 남자친구가 아닌, 어쨌거나 도민준이다. ‘왜’라는 건 제쳐두고, ‘어떻게’를 생각해야 한다. 서로 고개를 돌리고 반대편만 바라보고 있는 이 어색함을, 앞으로 남은 이 긴 시간을, ‘어떻게’ 풀어낼 건지.

 

 

“안 심심하고 좋네.”

“…그래, 뭐.”

 

 

안부라도 물어야 하나, 그럼 무슨 말로 시작해야하나 망설이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뱉었다. 그러자 복도 건너 반대쪽 창 밖만 보고 있던 민준이 송이를 돌아보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때서야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 같았다.

 

그대로인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남자 애들 군대 갔다 오면 달라진다더니. 이미 집을 떠나온 지 만 하루가 지나서 그런 탓이겠지만, 거뭇하게 자란 수염이 그런 생각을 갖게 했다. 눈이 마주친 시간이 길었나. 송이는 문득 자신이 민준을 보고 있는 것처럼, 민준도 저를 빤히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 지금 엄청나게 초췌한데. 송이는 민준의 시선을 의식하자마자 얼른 머리를 정리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라리 심심한 게 나을 지도 모른다.

 

 

“강 건너네.”

“그러네. 예쁘다.”

 

 

어색함을 깨버릴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걸, 민준도 느꼈는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야깃거리로 화제를 돌렸다. 이제는 반대편이 아닌 송이가 앉은 쪽 창문 밖을 가리키면서. 밴쿠버 도시를 빠져 나온 기차는 어느덧 어느 강 위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서쪽으로 꽤 기운 해는 강 위를 반짝임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송이의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창 밖 풍경을 보며 예쁘다, 하고 중얼거려도 더 이상 혼잣말이 아니게 되었다는 건, 정말로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좋게 생각하면, 뭐든.

 

 

“이 강이 3개의 호수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이 만들어낸 거라더라.”

“잘난 척은 여전하시네.”

“이게 무슨 잘난 척이야.”

 

 

강물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있는데 옆에서 뜬금없이 하는 민준의 말에, 송이는 눈을 찌푸리며 속에 있는 말을 필터링 없이 내보냈다. 슬쩍 웃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민준. 송이는 그제야 내가 정말로 도민준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르치듯 잘난 척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크지 않은 표정 변화, 나지막한 목소리, 그런 것들에서 말이다.

 

 

“……”

 

 

사실은 그 말을 듣고 보니 강물이 왠지 더 파랗게 보였다. 아주 저 멀리, 여러 호수들이 모두 모여 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되기까지, 대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그들은, 서로 만날 줄을 알고 흘러가고 있었을까. 아름답게 반짝이는 물결과 수평선 근처가 오렌지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 다시, 4년 전 명인대학교

 

 

“송이 언니, 왜 그렇게 책을 다 들고 다녀? 무겁게.”

“어? 그냥, 대학생처럼 보일려구.”

 

 

송이는 두꺼운 전공책 3개를 양 팔 한아름 안고선, 왜 그러고 있냐고 묻는 동기에게 차마 ‘사물함에 갈 수 없어서’ 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사물함에 갈 때마다 복도를 기웃거리면서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는 짓을 며칠 동안 반복했는데, 하필 짐이 많은 오늘, 등 번호 23번이자 A-148번 사물함을 사용하고 있는 도민준이 그 앞에 서서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바람에 자신의 사물함 근처에도 못 갔다. 송이는 팔이 빠질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전공책을 다 짊어지고는 강의실로 들어갔다.

 

 

“어이구야. 무거워.”

 

 

책상에 앉자마자 책들을 던져놓고 팔을 주물러댔다. 사물함을 멀쩡히 놔두고 이게 뭔 고생이래. 쪽팔림은 exponential 함수를 따라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졌는데, 창피해야 할 이유가 뭐람. 다음엔 그냥 아무렇지 않게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이, 천송이-”

 

 

수업 준비를 하는 동안, 축구 소모임에서 만난 선배이자 술 자리에서 친구 먹은 태준이라는 애가 소란스럽게 강의실로 들어오며 송이에게 인사를 해왔다. 그것도 옆에, 바로 그 A-148번 사물함의 주인을 달고.

 

 

“어어, 안녕.”

 

 

당황스러움에, 송이는 인사도 대충하고 고개를 숙여 책을 펼치는 척했다. 역시, exponential은 절대 0이 되지는 않는다.

 

 

“그 때 그 슛이 들어갔어야 했는데.”

“걔는 연봉이 얼만데 그것 밖에 못하냐.”

“너보단 잘해, 그래도.”

 

 

태준은 다시 민준과 하던 얘기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그거 보느라 잠을 못 잤느니, 무슨 선수가 잘했으니, 못했느니, 들어보니 새벽에 본 해외 축구 경기 얘기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대화를 하며 송이의 옆 자리까지 왔고, 태준은 민준과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또 송이에게 말을 걸었다.

 

 

“참, 천송이. 오늘 저녁에 애들이랑 같이 술 마시기로 했는데, 너도 올래?”

“오늘?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아, 왜! 와라. 응? 이왕이면 네 친구들도 데리고.”

“시간 되면 갈게.”

 

 

최대한 민준 쪽으로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답을 해주었다. 태준은 아싸, 하고 좋아하고는 정신 사납게 머리를 왔다 갔다 하더니 민준에게도 말했다. 도민준, 너도 가자. 그 말에 송이는 스스로 그어놓은 선을 저도 모르게 넘어 민준을 쳐다보았다. 민준은 눈썹을 슬쩍 들어올리며 별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러지 뭐.

 

 

“오케이. 야, 근데 도민준 너도 이 수업 들어?”

“아니, 난 너처럼 재수강 같은 거 안 키워.”

“재수 없긴.”

 

 

민준은 피식 웃으며 태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송이는 문 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을 보다, 언제 앉았는지 바로 뒷자리에서 또 뭐라고 말을 거는 태준 때문에 마지막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

 

 

그 날 저녁, 대학 와서 난생 처음 있는 과제를 하려 기숙사 책상 앞에 앉았지만 도무지 집중이 안 되었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룸메이트가 노트북으로 뭘 보는지 시도 때도 없이 혼자 웃어댔기 때문이다. 뭐 대단한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조용히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송이는 소심하게 고민을 하다 그냥 책을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술 마시러 안 올 거냐는 태준의 문자에 답장을 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대충 티셔츠와 청바지에 가디건을 걸치고 학교 근처 술집으로 갔다. 거기엔 송이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열 명 정도의 축구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술 한 잔을 받아들고는 한 명씩 인사를 했다. 10번도 있고 36번도 있었다. 심지어 22번도 24번도 있었는데- 23번은 없었다. 그 때는 대놓고 물어보기도 그래서 그냥 넘겼다가, 그들의 재미없는 축구 얘기 중 마침 민준의 이야기가 나온 틈을 타 자연스레(본인의 생각엔) 옆 자리의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안 와? 전에 회식 때도 못 본 것 같은데.”

“도민준? 어, 걔는 원래 이런 자리에 잘 안 와.”

 

 

그럴 거면 오겠다는 대답은 왜 했대. 그러거나 말거나. 송이는 축구 얘기 좀 그만하라고 시커먼 남자들을 만류한 뒤, 그 날도 기숙사 통금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술을 마셨다.

 

 

이번엔 12시를 5분 남겨두고 기숙사에 들어갔다. 인원 점검까지 아직 몇 분 남았으니, 휴게실 쪽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콜라가 마시고 싶었다. 12시 직전이라 그런지 휴게실엔 아무도 없었다. 알코올 기운이 잔뜩 들어있는 숨을 몰아쉬고는 자판기 앞에 서서 천 원짜리 지폐를 넣었다. 이 자판기는 왜 자꾸 지폐를 뱉어내는지. 3번의 시도 끝에 천 원을 넣고, 빨간 콜라를 뽑았다. 곧바로 캔을 따서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고는 방에 들어가야지- 휴게실을 나왔다.

 

 

“…맞다, 잔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또 잔돈을 가져오지 않은 게 생각나 다시 휴게실로 달려갔다. 다행히 잔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송이는 500원짜리 동전을 바지 주머니에 구겨넣고는 급히 엘리베이터를 타러 뛰어갔다.

 

 

 

 

 

 

 

 

 

#

 

 

날은 많이 풀렸고,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은 아직도 설레고 좋았고, 젊은 간을 믿고 일주일에 3번 이상 술을 퍼마셨으며, 몇 년 동안 지겹도록 한 공부는 하기 싫었다. 그래도 철없는 애들처럼 수업을 빼먹진 않았다. 비록 수강신청을 망쳐 시간표가 거지 같았지만.

 

그리고 사물함 앞에 서 있는 그를 보고도 피할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한 번 더 보러 갔던 축구 경기에서도 보고, 아침마다 기숙사 식당에서도 보고, 도서관에서도 보고, 그래서 그런가- 눈에 익은 느낌이었다. 물론, 단 한 번도 인사를 한 적은 없지만.

 

 

“……”

 

 

다음 수업 책을 가지러 사물함이 있는 복도에 들른 송이는, 저와 같이 사물함 쪽으로 가고 있는 민준을 보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바로 그 소심한 마음을 다잡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안녕하세요.”

 

 

아무렇지 않게, 혹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했지만 민준은 살짝 한 번 송이를 돌아보는 것 말고는 다른 화답이 없었다. 언제나 표정이 별로 없다. 송이는 사물함에 문을 열려고 했지만 나란히 둘 다 사물함을 이용하기엔 공간이 좁았다. 그래서 민준이 가면 쓰려고 잠시 그의 등 뒤에서 기다렸다.

 

 

“……?”

 

 

민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물쇠를 손에 쥐고 송이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왜 쳐다보는 거지. 오늘은 분명 추레하지 않고 화장도 잘 먹었는데-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약간 기가 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데, 그가 특유의 톤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

 

 

“비밀번호 누를 건데.”

“아…”

 

 

아, 비밀번호. 뜬금없는 요청에 송이는 얼른 시선을 반대편으로 거두었다. 송이가 보고 있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민준은 그제야 비밀번호를 누르고 자물쇠를 열었다.

 

참 목이 뻣뻣한 남자다. 아무리 친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오고 가는 중에 몇 번 봤으면 가벼운 목례라도 하지. 내가 먼저 인사도 했는데. 그러고보니 내가 뭘 그렇게 본다고 자꾸 보지 말라고 그러는지. 남의 몸도, 남의 비밀번호도 관심 없는데.

 

송이는 혼자서 소리 없이 구시렁거리며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민준의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다소 빈정이 상한 마음에 감정을 실어 사물함 문을 세게 확- 열었는데,

 

 

“…헉.”

 

 

툭, 그만 반쯤 떨어져버린 A-147번 사물함의 문짝. 안 그래도 평소에 좀 허술한 것 같더라니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 송이는 황당한 표정으로 이게 뭔 일인가- 얼빠진 표정으로 망가진 사물함을 바라보았다. 그 다음엔 지나가던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걸 보고, 마지막으로 옆에서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하하…”

 

 

이게 왜 이러지- 송이가 너덜너덜한 문을 붙잡고 고쳐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나사 하나만 더 빠트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당황해 하고 있으니 민준도 잠깐 들여다 봐주었지만, 문짝은 이미 제 기능을 잃은 것 같았다.

 

 

“과 사무실 가서 말해.”

“아…네.”

 

 

도와주려는 것도 잠시, 민준은 그저 남 일이라는 듯 관심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사물함에 책을 집어넣고 다른 책을 꺼내고, 자신의 용건에 집중했다.

 

 

“…하아.”

 

 

그래 뭐, 고장 난 건 고쳐 달라고 하면 되지. 근데 지금 당장은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다음 수업이 있는데, 안에 뭐가 들었는지 훤히 보이는 사물함을 두고 가기도 그렇고. 개강 총회 때 요즘 학교에 사물함 도둑이 많다고 하니 꼭 채우고 다니라던 과 회장 선배의 말이 떠올라 더더욱 찝찝했다. 그렇다고 안에 든 걸 다 들고 갈 수도 없고…

 

 

“……”

 

 

사물함을 부순 2호관 괴력녀라고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가는 거 아니냐는 생각과, 비싼 전공책을 도둑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옆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고 있는 민준을 돌아보았다.

 

 

“저기요.”

“……?”

“잠깐 사물함 좀 빌려 쓰면 안돼요?”

 

 

 

 

 

 

 

 

#

 

 

내가 왜 너의 곤란을 봐줘야하냐는 눈빛을 견뎌내고는 결국 그의 사물함을 다시 열게 만들었다. 수업을 듣고 오면 다시 꺼내가기로 하고 송이는 잠깐 동안만 민준의 사물함에 자신의 짐들을 맡겨두기로 했다. 민준은 분명 탐탁지 않아했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고 그도 그걸 인정했으니까.

 

 

‘사물함 도둑 많다면서요.’

‘불안하면 다 꺼내서 가져가든가.’

‘이 많은 걸 어떻게 나 혼자 다 들고 가요.’

‘……하.’

 

 

그의 사물함은 전공책 몇 권과 소설책 하나, 그리고 파란색 축구 유니폼이 잘 개어져 있었다. 얼마 전에 세탁을 한 건지, 문을 열자 섬유유연제 냄새가 확 났다. 다행히 공간이 많이 남아 있어 언제 그렇게 많아진 건지 알 수 없는 자신의 책과 소지품들을 그 안으로 옮겼다. 시간이 없어 일단 닥치는 대로 집어 넣으니 민준이 뒤에서 한숨을 쉬어댔다.

 

송이는 망가진 제 사물함을 뒤로 하고, 다음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고마워요- 인사도 대충 하고 얼른 뛰어갔다. 사실 조금은 ‘또’ 쪽팔려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하필 그 때 그 앞에서 문을 부셔 버릴 건 뭐람.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럽단 생각이 수업 시간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

 

 

“이거 하나 고치는데 무슨 일주일 씩이나 걸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송이는 곧장 과 사무실로 가서 사물함이 망가졌다고 접수를 하고는 다시 사물함이 있는 곳으로 왔다. 사물함을 금으로 만들었는지 수리하는 데에 일주일이나 걸린단다. 동기들 중 누구한테 빌붙거나 짐들을 기숙사로 가져가거나, 어쨌거나 잠시 빌린 공간을 비워주어야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민준의 사물함 비밀번호도 모른 채 그냥 와버렸다.

 

 

“아…”

 

 

굳게 닫힌 민준의 사물함을 보고는 약간의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그렇다고 민준의 연락처를 아는 것도 아니고. 마냥 기다려야 하나, 하고 한숨을 쉬려던 찰나, 인기척도 없이 그가 나타났다.

 

 

“……!”

 

 

아, 무슨 맨날 사람을 놀래 켜. 송이는 움찔,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민준이 빨리 와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만 까딱 숙여 인사를 했다. 민준은 말없이 사물함 문만 활짝 열어주고는 어서 방을 빼라는 집주인의 표정으로 송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둔 책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왼팔 위에 책을 하나씩 쌓아 올리고 거기에다가 필통, 파우치, 먹다 남은 초콜릿, 가디건 뭐 이런 것들까지 계속 나오자 송이의 표정처럼 민준의 표정도 점점 일그러졌다.

 

 

“그거 다 들고 갈 거야?”

“뭐… 일단 그래야죠.”

“기숙사까지?”

“…같이 들어주시든가.”

 

 

아무리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라지만 솔직히, 아주 소올직히, 곤경에 처한 이웃을 이렇게 그냥 쳐다만 보고 있는 게 얄미워서, 속에 있는 말을 대놓고 작게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남 도와주고 그럴 성격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럴 거면 말이라도 말든가. 쌓인 책 위에 턱을 올려 겨우 지탱하고는 눈동자만 돌려 민준을 보았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꿈틀거리는 눈썹.

 

 

“…그냥 내 사물함 써.”

“……?”

 

 

하는 말과 표정은 정 반대였지만, 아무튼.

 

 

“진짜요?”

“어.”

“괜찮은데…”

 

 

송이 역시, 말은 괜찮다고 하면서 손은 이미 짐들을 다시 민준의 사물함에 내려놓고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미안하면서도 고맙다는 눈을 하니, 민준이 괜찮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하고는 빨리 집어넣으라는 손짓을 한다. 송이는 씨익 웃고는 사물함 입구에 걸쳐놓은 짐들을 스윽- 안으로 밀어넣었다.

 

 

“빨리 고쳐달라 그래.”

 

 

고개를 끄덕.

 

 

“그 초콜릿 같은 건 좀 빼.”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고, 잽싸게 반 정도 남은 초콜릿을 빼낸다. 남의 둥지에서 태어난 덩치 큰 뻐꾸기처럼, 민준의 사물함엔 오히려 송이의 물건들이 더 많아졌다. 민준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로 사물함 문을 닫았다. 한 번에 잘 닫히지 않아 힘을 줘 세게 문을 닫고는 자물쇠를 건다.

 

 

“감사합니다.”

“……”

 

 

천만에, 라는 전형적인 대답조차 하지 않은 민준은 어깨에 걸친 가방을 고쳐 매고 등을 돌렸다. 어어- 송이는 먼저 가버린 민준을 졸졸 뒤쫓아갔다. 걸음도 어찌나 빠른지, 겨우 그의 보폭을 맞추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비밀번호,”

“……?”

“알려주셔야 되는데…”

 

 

누가 비밀번호 누르는 것도 못 보게 하는 그에게, 비밀번호를 물어보았다. 그가 한 5초 정도 망설였던 것 같다.

 

 

“……”

 

 

 

21살, 백 넘버 23번, 사물함 148번,

 

 

 

“4260.”

 

 

 

그 땐 의미가 궁금하지 않았던 비밀번호 4자리…

 

 

나는 너를 알기도 전에, 너를 설명하는 그런 숫자들을 먼저 알았지. 그 때에, 그 봄에.

그 날이 아마, 기숙사까지 처음으로 같이 갔던 날일 거야. 물론, 너는 그게 같이 간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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