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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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기(靑春記) 2

SCIENCE AND LOVE 2016. 8. 29. 16:19


청춘기(靑春記)

-Youthlogue
# 2

 

 

 

 

 


# 명인대학교, 4년 하고도 4달 전

 

 


“다른 애들은 안 온대?”
“응, 다들 일 있다고 못 온다는데.”
“그래? 흠… 근데 남자들 축구 하는데 우리가 가서 뭐해?”
“몰라. 그냥 동기들이랑 선배들이랑 인사하고 친해지는 거지 뭐.”

 


그렇게 오랜 시간 고대하고 기대하던 대학생이라는 게 된 지 얼마 안 된 3월 초. 수업 쉬는 시간 중, 새내기 여학생들이 쪼르르 모여 앉아있는 자리로 와 반갑게 인사를 하던 선배는, 워낙 목소리도 크고 말도 재미있게 하는 편이라 OT 때부터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선배는 파릇파릇한 꽃들이 여기 있네-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나타나더니, 내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고는, 쉬는 시간이 끝나기 직전 본래의 목적을 드러냈다.

 

우리 과 축구 소모임이 있거든. 너네 동기 남자애들도 이번에 많이 가입했어. 내일 처음 경기 하는데, 구경 올래? 아니, 아니. 강요하는 거 아니고, 편하게 와. 끝나고 회식도 있는데 너넨 그냥 얻어먹기만 하면 돼. 진짜 강요하는 거 아니라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생이니까 ‘선배’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엔 일단 무조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뭐 대단한 부탁도 아니고 그냥 구경 오라는 거니까. 게다가 술도 사준다니. 그래서 이제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동기 여자애들과 함께 가기로 했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대부분이 못 간다고 통보를 해왔다. 결국 수업이 끝난 오후, 송이와 다른 동기 둘이서만 운동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중 여고를 나온 탓에, 모르는 남자들만 잔뜩 있는 자리는 좀 적응이 안 되는데- 송이는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옆에 친구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송이 언니. 나 잠깐 어디 좀 갔다 올게.”
“어디?”

 


함께 운동장으로 가던 동기가 문자 하나에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기 전까진 말이다.

 


“승원 선배가 나 좀 보재.”
“헐, 너 그 선배랑 사귀기로 한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뭐야아.”

 


입학하고 있었던 첫 개강 파티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다음 날부터 둘이 같이 붙어 다니더니. 아무래도 20살 지원이와 24살 복학생 선배는 올해의 우리 과 첫 캠퍼스 커플이 될 것 같다.

 


“언니, 먼저 가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어어, 그래.”

 


뺨이 붉어진 채로 잠깐 갔다 오겠다 말하며 뛰어가는 저 애는, 아마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송이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휴우…”

 


결국 대여섯의 여자 애들 중에 송이 저 혼자만 남았다. 이럴 줄 알았어. 송이는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처럼 쌀쌀한 기운에 코트 단추를 잠갔다. 나도 그냥 가지 말까, 혼자 가서 뭐해. 근데 그랬다가 지원이가 진짜로 다시 돌아오면 어쩌지? - 고민을 해보았지만 저 멀리 파란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잔뜩 몰려 있는 운동장 쪽을 보니 가고 싶지 않은 마음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타이밍이라는 게 참.

 


“어? 맞지? 지난 번에 수업 시간에서 본 신입생.”
“…아… 네.”

 


하필 거기서 그 때 약속한 선배를 마주칠 줄이야.

 


“혼자 왔어? 다른 애들은?”
“음… 그게, 좀 있다 온대요.”
“그래? 가자, 잘 왔어.”

 


너무나도 반갑게 맞이하는 표정에, 송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선배를 따라 운동장으로 갔다. 아. 내가 이렇게 할 말 못하고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었나. 스스로를 답답하게 생각하며 지원이가 제발 연애고 뭐고 다시 돌아와주길 간절히 기도했다.

 

 

 

 

 

 

 

#

 


“여기는 신입생, 이름이…”
“천송이요.”
“어어, 천송이. 우리 축구 하는 거 보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초대했지.”
“…안녕하세요.”

 


내가 언제 보고 싶다 그랬지. 뻔뻔한 선배의 거짓말에 그냥 하하, 하고 웃으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스무 명 가량의 남자들 앞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인사를 했다. 그 시커먼 남자들이 환호를 하며 박수를 쳐대자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거창했던 소개 후, 다른 남자 신입생들 소개는 대충 빨리 빨리 넘어가고, 그들은 모임의 목적대로 공놀이를 하러 운동장으로 흩어져 나갔다. 송이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기분을 속으로 삼키고 스탠드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는 룰 같은 것도 하나도 모르고 그저 골대에 공이 들어가면 점수가 나는 줄로만 아는 축구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동장 보다는 지원이나 다른 동기들이 오지 않을까, 운동장 반대편을 더 자주 돌아봤던 것 같다.

 


“…흐아암.”

 


아무리 축구를 모른다고 해도 가끔 빨간 티를 입고 봤던 국가대표 경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어설픈 뜀박질들을 보고 있자니 게임이 시작된 지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하품이 나왔다. 가만히 앉아있어서 조금 춥기도 했다. 그래도 전반, 후반이 지나면 끝이 나고 밥이라도 먹으러 가겠지. 90분 경기라는 것 정도는 안다고. 그러면 사람들하고도 좀 친해질 테고. 선배들 많이 알아둬서 나쁠 건 없잖아.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해보았지만 자꾸만 되돌아가는 길로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앉아있을 때, 옆을 돌아본 것도 그저 타이밍일 뿐이었다.

 


“…엄마야! 깜짝이야.”

 


대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남자가 정확히 3m 옆에 서 있었다. 송이는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 했다. 스탠드에 서 있는 그 키 큰 남자는 그런 송이를 왜 저러냐는 듯 한 번 쳐다보더니, 입고 있던 야상을 벗었다.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파란색 유니폼을 꺼내는 걸 보니, 선배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송이는 선배라는 걸 알아채자마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송이를 한 쪽 눈을 찡그린 채로 빤히 보았다. 아, 뭔가 더 설명이 필요한가, 나의 정체에 대해?

 


“어…저는, 그러니까, 신입생인데요.”
“……”
“…응원. 응원 왔어요.”
“……”

 


나도 내가 여기 왜 와 있는지 모르겠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묻지도 않았는데 더듬거리며 말하는 송이에, 남자의 나머지 한 쪽 눈도 찌푸려졌다.

 


“동네 축구에 응원은 무슨…”
“……? 아, 그게…”

 


애매한 웃음을 뱉으며 어이없다는 듯 거두어버리는 시선. …방금, 비웃은 거? 송이는 순간 당황했다. 아까 남자들에 둘러싸여 자기 소개를 해야 했을 때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송이는 머리 끝까지 꽉 찬 민망함에 제대로 된 변명도 하지 못했다.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하. 거 참 – 송이는 다시 앉지도 못하고 자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뻘쭘하게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야.”
“…네?”

 


괜히 축구하는 사람들을 보는 척, 뻣뻣한 자세로 운동장 쪽을 보고 있으니, 옆에 서 있던 선배(가 맞겠지)가 대뜸 야, 하고 불렀다. 목소리 톤이 생각보다 낮아서 조금 놀라며 돌아보니, 그가 여전히 표정을 구긴 채로 송이를 보며 알 수 없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

 


뭐지, 어쩌라는 거지. 나보고 가라는 건가. 송이가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답답하다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다시 흘러 나왔다.

 


“뒤돌아 있으라고, 옷 갈아입을 거니까.”
“아, 네, 네!”

 


티셔츠 끝을 들어 올리려다 멈춘 손. 그 아래 살짝 드러나 있는 살색. 송이는 그제야 그걸 발견하고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이번엔 아마 귀 끝까지 빨개졌을 것이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홀딱 벗은 것도 아니고 남자의 몸을 좀 봤다고 새삼스레 놀라는 건, 아까도 말했듯이 여중 여고를 나와 남자와 함께 있는 상황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

 


아무리 그래도 왜 여기서 옷을 갈아입고 그런다니. 송이는 눈까지 꼭 감고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아래로 다다닥 달려가는 소리에 조심히 눈을 뜨고 눈동자만 돌려 아래를 보니, 그 선배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운동장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제야 움츠렸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어휴…”

 


등에 23이라고 쓰여진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그는, 공 쟁탈전이 한창인 곳 반대편에서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신입생 한 명을 불러다가 너 나오라고,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갔다.

 


“춥지도 않나…”

 


송이는 아직 쌀쌀한 늦겨울 날씨임에도 반바지를 입고 뛰는 남자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다시 스탠드에 앉았다. 모두의 관심사는 오로지 축구공이었고,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심심하고 추웠다. 입고 있던 코트깃을 더 여미며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원이는 결국 운동장에 오지 않았고, 전반 45분, 후반 45분만 할 줄 알았던 어설픈 축구 경기는 ‘10분만 더, 10분만 더’를 반복하기만 하고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세상에서 제일 재미 없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하나는 군대 이야기, 하나는 축구 이야기, 마지막 하나는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라더니, 축구 소모임 첫 회식은 온통 그 세 가지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좀 취한 상태에서 들으니 제법 재미가 있더라. 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한 삼겹살 집에선 조금 어색했던 분위기가, 2차로 간 술집에서는 꽤나 화기애애해졌다.

 

복학생 오빠들은 서로 송이에게 밥을 사주겠다며 자기들 마음대로 순번을 정했고, 한 학년 위 선배들은 우리 과는 학번 이런 거 없다고, 동갑이면 그냥 친구라고, 말을 놓으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선뜻 그러지 못했을 테지만, 술 기운을 빌려 그러자고 신나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친구야!’를 외쳐댔다.

 

그 옆 테이블에선 자제라는 걸 모르는 꼬꼬마 신입생들은 잔뜩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쯧쯧. 송이는 그래도 술이라고 해봤자 마셔본 지 이제 한 두 달 정도 밖에 안 됐을 저 앳된 20살 신입생 동기들과는 자신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1년 더 수험생 생활을 하며 알코올을 자주 접해본 덕택에,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몇 잔 더 마시면 감당하지 못할 상태가 된다는 것도.

 

갑자기 그 사람이 떠오른 것도 그 때 즈음이었다. 응원은 무슨, 이라고 의미 없이 축구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저를 비웃고, 언제 봤다고 반말로 야, 라고 불렀던 선배. 딱히 뭘 보고 생각난 건 아니고 그냥 뜬금없이, 불현듯, 뭐 타이밍 그런 거.

 


“……”

 


아까 분명히 봤던 등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2…뭐였던 것 같은데. 그건 아무래도 곧 알코올 임계값에 도달했다는 신호가 분명했다. 송이는 시끄러워서 대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아까 식당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그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아까 운동장에 있던 웬만한 사람들은 다 참석한 것 같은데.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까 서로 통성명 했던 사람인지 아닌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뿔테 안경 낀 사람이 대체 몇 명이야. 송이는 찬 얼음물을 마시며 시간을 확인했다. 손목 시계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나서야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는 숫자를 읽어냈다. 11시 45분. 가야 한다. 기숙사 문 닫는 시간이 12시다. 안 가면 오늘 길거리에서 자야 한다. 신기하게도 살아나는 귀소 본능에 송이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가야 돼요.”
“왜! 벌써?”
“저 기숙사 살거든요..”
“에이, 그냥 밤 새!”
“안 되는데…”

 


모두들 가지 말라고 붙잡는 바람에 송이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밤을 새고 기숙사 문이 열리는 새벽 6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송이는 어지러운 기운에 옆에서 누군가가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송이, 또 어디가! 바람 쐬러요. 가는 거 아니지? 네, 안 가요-

 

송이는 찬 바람을 좀 쐬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술집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개강 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골목은 아직도 시끌벅적했다. 송이는 잠깐 술집 문 밖에 서 있다가 곧장 몸을 돌려 기숙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숙사 무단 외박이면 벌점 1점이다. 그리고 벌점 5점이면 기숙사를 나가야 한다. 대학가 자취방 월세도 비싼 판에, 어렵사리 들어간 기숙사에서 쫓겨날 순 없지. 송이는 그렇게 인사도 없이 혼자 기숙사로 돌아갔다. 술에 취한 티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하면서. 겁도 없이.

 

 

 

 

 

 

 


#

 


“어어, 잠시만요!!”

 


기숙사 문을 잠그려 나와 있는 경비 아저씨를 발견하고 더 빨리 뛰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일찍 일찍 다녀, 학생. 이라는 경비 아저씨의 훈계에 네, 알겠습니다아. 하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행이라며 혼자 웃었다. 

 


“하아. 힘들어 죽겠네.”

 


학교 후문가의 술집에서부터 기숙사까지 뛰어오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술도 많이 마셨는데 속이 더 울렁거렸다. 기숙사 로비에서 잠시 숨을 돌리다 곧 있을 점호 시간까지 방에 들어가 있어야 해서 얼른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한 번 더 아슬하게 점호에 맞춰 방에 들어가자,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들이 왜 이제 들어오냐며 대신 안도를 해주었다. 903호 인원점검 왔습니다. 저희 4명 다 있어요.

 


“콜라, 콜라…”

 


무사히 벌점 1점을 아끼고 옷도 갈아입기 전에 송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다시 1층으로 내려가 휴게실로 가는 거였다. 물로는 해결 안 될 갈증을 반드시 탄산이 가득한 콜라로 풀어야 할 것만 같았다. 뭐가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휴게실에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쪽쪽거리며 연애질을 하고 있는 커플이 있었다. 송이는 눈살을 한 번 찌푸리고는 휴게실 한 켠의 자판기 앞에 섰다.

 


“……?”

 


천 원짜리 지폐를 5번 만에 집어넣고선 빨간 거 마실까, 파란 거 마실까, 고민을 하다가, 무언가를 본 것만 같은 기분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휴게실 한 쪽 구석에 혼자 앉아있는 남자. 책을 읽고 있었다. 

 


“……”

 


그래도 콜라는 빨간 거지- 버튼을 눌렀다. 차가운 콜라 캔을 꺼내 양 볼에 한 번씩 갖다대고 캔의 뚜껑을 땄다. 치익- 탄산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흐릿한 정신에 두 개의 숫자가 뚜렷하게 떠올랐다.

 


“23번…”

 


송이는 방금 전 돌아보았던 휴게실 오른쪽 구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을 반쯤 덮은 앞머리, 책에 집중해서 살짝 구겨진 미간, 오늘, 아니 이제 어제였던 저녁 내내 없었던 사람. 

 


“23번… 맞죠?”

 


머리 속에 희미하게 떠다니던 그 백 넘버가 생각나자, 저도 모르게 그에게 물었다. 조용한 휴게실에 던져진 물음표에, 23번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더 목이 마른 것 같았다. 마른 침을 삼켰다. 콜라의 탄산이 녹아 나오는 소리들이 들렸다.

 


“……?”

 

 

 

 

 

 

 

#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그 다음날 1교시를 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송이는 몸소 체험 중이었다. 룸메이트와 아침은 꼭 챙겨먹자고 약속한 건 기숙사에 들어온 지 단 며칠 만에 깨졌고, 곧 죽어도 사수하고 싶었던 맨 얼굴은 알이 없는 안경으로 가려야 했다. 다신 술 안 마셔, 별로 소용 없어 보이는 다짐을 하며 내내 꾸벅 꾸벅 졸기만 했던 수업을 겨우 마치고 나왔다.

 


“으으, 힘들다.”

 


바로 다음 수업을 가기 위해 기운 없이 복도를 걸었다. 알코올이 온 몸의 수분을 뺏어가 버린 건지, 생수 한 통을 다 비워도 목이 말랐다. 탈탈 털어 물을 마시고 빈 통을 구겨버렸을 때, 맞은 편에서 키가 큰 남학생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송이는 괜히 신경이 쓰여 점퍼의 후드를 뒤집어 쓰고 복도 한 쪽에 붙어 걸었다.

 


“……!”

 


그렇게 그냥 갈 길을 갈 걸, 왜 굳이 고개를 들어 눈치를 봤는지. 송이는 마주 오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후드 모자를 더 깊게 눌러 썼다. 23번. 이제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 숫자의 남자가, 어제의 무표정을 그대로 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23번 맞죠?’
‘맞아, 23번이었어. 그게 왜 기억이 안 나서. 흐흐.’

 


차라리 필름이라도 끊겼더라면 덜 창피했을까.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불과 몇 시간 전, 술에 잔뜩 취해 인사도 생략한 채 이름도 아닌 등 번호로 사람을 불러대는 여자는, 그 누가 봐도 이상했을 것이다. 혼자 그 숫자를 맞췄다고 좋다고 헤벌레 웃다가, 손에 든 콜라를 들이키고는 그 앞에서 시원하게 트림도 했더라지 아마.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별 다른 대꾸도 없이 저를 쳐다만 보다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던 그 모습이, 눈 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아이씨.”

 


위대한 알코올의 힘을 느끼며, 감당 못할 쪽팔림에 어디론가 숨고 싶어졌다. 스쳐 지나가기까진 몇 발짝 남지 않았고, 그냥 뒤돌아서 가버릴까-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가까스로 쥐구멍을 찾아내었다. 복도 한 쪽에 늘어져있는 사물함. 마침 송이 자신의 사물함이 복도 옆에 있었다. 송이는 급히 방향을 바꾸어 사물함 쪽으로 갔다. 재빠르게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맞추고 사물함 문을 열어 그 뒤로 머리를 숨겼다. 어렸을 때 키웠던 강아지가, 사고를 치면 지 딴엔 숨는다고 이불 속으로 머리만 집어넣고 모르는 척 있던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책이 어딨지이…”

 


사물함에 들어 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괜스레 안을 뒤지는 척 하며 어서 23번이 지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점점 가까워지는 걸음은 야속하게도 등 뒤에서 멈추고, 철컥. 철제 사물함 문이 하나 더 열리는 소리가 났다.

 


“……”

 


헙. 숨을 참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사물함 문 너머를 확인했다가 다시 얼른 어깨를 움츠렸다. 망할. 23번이 바로 옆자리 사물함을 사용하고 있다. 송이는 머리를 거의 사물함 안에 들이밀고 오만 인상을 찌푸렸다. 볼 일 다 봤으면 빨리 갈 것이지, 23번은 뭘 그리 찾는지 사물함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뭐 잊은 거 없어?”
“……?”

 


인사도 생략한 채, 이번에는 그가 먼저 내던진 물음표. 송이는 처음엔 그게 저를 향한 건지 몰랐다. 오늘 새벽, 휴게실에서 그의 심정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한테 물은 건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그 다음엔 저를 알아본 게 맞구나- 하고 망연자실했다.

 


“네? 네??”

 


거의 눈만 내놓은 얼굴을 슬쩍 사물함 문 뒤로 내밀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23번은, 표정이 없는 것처럼 말도 없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의 반짝이는 500원짜리 동전.

 


“……?”
“자판기에서 잔돈 안 가져갔잖아.”
“아……”

 


자판기에 천 원을 넣고, 빨간 콜라를 선택하고, 23이라는 숫자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잊은 500원. 송이는 그의 손바닥 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가 손을 한 번 더 쭉 내밀길래 얼른 500원을 집어 가져갔다.

 


“고, 고맙습니다.”

 


처음 봤을 때처럼 꾸벅,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를 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그는 이미 뒤돌아 가고 있었다. 

 


“……”

 


송이는 바른 걸음걸이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복도 끝으로 그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다시금 찾아오는 쪽팔림에 사물함에 머리를 박았다. 천송이 진짜 진상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술주정이나 부리고, 게다가 더 진상인 꼬라지로 마주치다니- 콩콩콩 이마를 세 번 박고 괴로움에 녹아내리다, 불현듯 다음 수업이 떠올랐다.

 


“헉, 수업.”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수업에 늦게 생겼다. 송이는 정신을 차리고 손에 쥔 500원짜리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사물함에 자물쇠를 걸었다. 바로 옆 사물함을 흘깃 쳐다보았다. 옆자리니 자주 마주치게 될 지도 몰라. 젠장.

 


“……”

 


송이는 사물함 위 쪽에 작게 쓰인 이름표를 보았다. 천송이, 그리고 그 옆에 쓰인 이름은 더 이상 23번이 아니었다.

 


“…도민준.”

 

 

 

 

 

 

 

 

 


 

날이 참 좋구나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여름이 갑자기 가버려서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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