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Hello, my stranger 21 본문
Hello, my stranger 21
“1시간만 더 하면 된다더니,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피곤해 죽겠네.”
“누나, 피곤하시죠. 제가 차에 미리 히터 틀어놨어요.”
“히터 틀면 피부 건조해진다니까.”
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오늘 일정이 모두 끝나고 완전히 녹초가 되었지만 재잘 재잘, 입만은 살아있다. 오늘만 3번째 스케줄. 드라마가 끝나도 바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차라리 드라마를 다시 찍었으면 하고 바랄 줄이야. 아, 이 말은 절대 다른 의도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각 언론사의 인터뷰, 밀린 광고 촬영, 행사 참석… 해외에서도 부르는 곳이 많아 최근에 비행기를 몇 번이나 탔다. 지난 번엔 일본에 가는지도 모르고 가서 중국어로 인사를 했을 정도니까. 아무튼 바쁘고 또 바쁘고 정신이 없다.
“범아, 내 핸드폰 좀.”
이 와중에도 저 조그맣고 네모난 물체에 뭐 그리 신경이 쓰이던지.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노예라더니, 저야 말로 진짜 노예다. 정신적인 노예. 송이는 밴의 시트에 푹 기대 앉아있다가도 급히 떠오르는 핸드폰 생각에 벌떡 일어난다.
“뭐야. 배터리 없잖아! 무슨 배터리가 하루를 못 가.”
“하루 종일 그것만 들여다보고 계시니 배터리가 다 닳죠.”
“내가 언제! 에이씨. 충전 좀 해놓지.”
충전 케이블을 찾아보지만 평소 발에 치이게 굴러다니던 것도 막상 찾으려니 보이질 않는다. 앞으론 항상 백프로 꽉꽉 채워놔- 하고 범이에게 명령하듯이 말해놓고 짜증을 내며 풀썩 다시 시트에 누워버린다.
“......”
켜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습관처럼 버튼을 눌러본다. 검은 화면에 팝- 나타나는 메시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 그것들의 공통점은 기다림, 두근거림, 또…
“민준이 형!”
“......?”
운전을 하던 범이가 대뜸 외치는 말에 눈을 번쩍.
“아까 민준이 형한테서 메시지 온 것 같긴 하던데.”
“뭐? 왜 말 안 해줬어!”
“촬영 중이신데 어떻게 말해줘요. 끝나고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깜빡 했네요.”
“...그, 그래?”
민준에게서 메시지가 왔었다는 말을 뒤늦게 전해 듣고 버럭 송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곧 너무 흥분했다 싶었는지 급히 목소리를 낮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을 옆 자리로 툭 던져버린다. 나한테 연락할 일이 뭐 있다고… 아예 몸을 창문 쪽으로 돌아누워 보지만, 오히려 어두운 창 위에 말풍선들이 떠다니기 시작하는 것만 같다.
“......”
뭐라고 보냈을까, 언제 보낸 걸까, 내가 아까 해질 무렵에 메시지를 보냈었으니까… 혹시 나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 온갖 생각이 다 드는, 집에 가는 이 길이 너무 멀다.
…
쾅!
송이는 문이 열자마자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는 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충전기, 충전기… 정리 안 한지 꽤 된 방에서 부산스럽게 충전기를 찾아다가 핸드폰을 연결한다. 켜져라, 켜져라… 그런다고 빨리 켜지는 것도 아닌데.
“켜졌다!”
한동안 그저 아무 쓸모 없는 딱딱한 기계에 불과했던 핸드폰이 환하게 빛을 내며 그 의미를 되찾는다. 이어 밀린 알람들이 몰려서 오고 빠르게 하나씩 살펴본다. 필요 없는 건 머리에 담아두지도 않고 버려버린다. 어디 프로그램 작가인데 출연해주셨으면 한다, 인터뷰 좀 해 달라, 딸내미 김치 좀 가지러 집에 와라… 많이도 쌓인 목록 틈에서 ‘도민준’ 이란 이름을 발견하고 바삐 움직이던 엄지손가락을 멈춘다. 송이는 불도 켜지 않은 캄캄한 방 바닥에 주저앉아 핸드폰 속으로 들어갈세라, 천천히 메시지를 읽어간다.
= 미안해요. 스케줄이 이제 끝나서 답장이 늦었네요. 많이 바쁜 것 같던데, 저녁은 먹었어요?
입이 귀에 걸린다는 말이 딱이다. 물론 본인은 그런 지도 모르고 있겠지만. 송이는 집에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드라마가 끝난 지 2주. 그동안 가끔 연락은 하곤 했었다. 가장 먼저 연락한 건 민준이었다. 종방연 날 이후 사흘, 인사도 없이 대뜸 윤재가 같이 게임 하자는데 해도 되냐고 묻는 문자가 왔었다. 그 뜬금없는 내용보단 발신자 이름에 놀라 한참을 또 확인하고 확인했더랬지.
그렇게 안부 같은 것이나 굳이 서로에게 물을 필요 없는 용건들을 몇 번을 주고 받다가 최근엔 더 바빠지는 바람에 조금 뜸하던 참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손이 근질 근질 했다. 뭐라고 보내지. 무슨 설문조사에서 잘 어울리는 드라마 커플로 우리가 뽑혔다는데 봤냐고 물어볼까, 지금 광고 중인 아웃도어 그 패딩 진짜 좋냐고 물어볼까. 매일같이 고민하고 고민하다 오늘 처음으로 송이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 뭐해요, 오늘 춥네요.
고작 한 줄 밖에 안 되는 문장을 생각해내는 일은 고등학교 작문 시간 때보다 어려웠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이미 민준의 메시지는 3시간 전에 와 있었고 얼른 답장을 보내야 했다. 또다시 어려운 작문의 시간. 그러나 어렸을 때와 다른 건, 그 땐 하기 싫었고 지금은 하고 싶다는 것. 스스로 하고 싶다는 것.
- 배터리가 없어서 나도 답이 늦었네요. 이제 막 집에 들어왔어요. 저녁은 먹을 시간도 없었어요. 그 쪽은요?
도민준씨는요? 민준씨는요? 후배님은요? 내가 그를 뭐라고 불렀더라. 도민준. 온전히 그 이름 세 글자만 말해도 상관 없었던 때가 있었는데. 송이는 조급하면서도 신중한 답장을 보내고선 다시 집에 오는 동안 느꼈던 초조함을 느꼈다. 메시지 옆 숫자 1이 사라지길 바라면서.
“……”
하지만 그 숫자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밤 12시가 넘어있었다. 자나. 자고 있을 수도 있겠다. 괜히 보냈나? 내가 보낸 메시지 알람에 깼으면 어떡하지. 짜증내는 거 아닌가 몰라 – 송이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쭉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아이고. 내가 지금 뭐 하는거냐. 다 늦은 시간에 코트도 안 벗고 방바닥에 이러고 앉아서. 송이는 아무 것도 못하고 이 핸드폰 하나에 매달려서 울고 웃는 제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답장 오면 알아서 알려주는데 뭘 그리 신경 쓰는지. 쳐다보고 있다고 답장이 빨리 오나? 안되겠다 싶어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고 왔다. 화장품을 바르고, 아닌 밤 중에 방 청소까지 했다.
“진짜 자나보네.”
그 짓을 다 하고도 숫자 1은 그대로 있었다. 송이는 거의 포기한 상태로 긴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누웠다. 아아아. 큰일났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다. 덥다. 다시 이불을 내리고 발로 차버린다. 언젠가 이랬던 강원도의 어느 날 밤처럼, 그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스쳐지나갔다.
“...미쳤네, 미쳤어.”
눈에 안 보이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러나, 눈에 안 보이니 더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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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벽 5시 30분, 그의 답장이 온 시간.
= 밥은 챙겨 먹고 다녀요.
오전 9시, 내가 그 메시지를 본 시간.
“...아아…”
우리는 3마디의 대화를 나누는 데에 15시간이 걸렸다.
송이는 잠도 안 깬 눈으로 제일 먼저 메시지를 확인하고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뭐가 이리도 어려운지 참. 이럴 줄 알았으면 보기 싫어도 매일 같이 얼굴 봐야 할 때 이야기라도 많이 할 걸. 이건 뭐 얼굴 보는 것도 못하고 이야기도 못하고.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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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나한테 너무 한 거 아니냐? 무슨 쉴 틈을 안 줘.”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뭐어?”
“...라고 안대표님이 그러셨어요.”
같은 소속사 배우가 나오는 영화 VIP 시사회, 새로 광고를 찍게 될 기업 관계자들과의 만남, 그리고 몇 년 째 모델로 있는 의류 브랜드의 새 시즌 화보 촬영… 오늘도 역시 몸이 하나로는 모자라다. 드라마 이후로 여기저기서 찾아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 그렇다고 쉬는 날도 하나 안 주는 회사가 참 징글 맞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맞는 말이긴 하지. 언제 내리막길 걸을지도 모르는 거고.
“발바닥 아파 죽겠네.”
한창 촬영 중, 겨우 얻어낸 쉬는 시간 내내 오늘 하이힐 위에 올라 혹사 중인 발을 주물렀다. 아직 날씨가 추운데 봄 시즌 옷을 입고 촬영하려니 더 고생이었다. 끝나려면 한참 남은 것 같은데, 힘들다, 힘들어. 배도 고프고…
“근데 우리 저녁은 안 먹어? 배고파서 서 있을 힘도 없다야.”
“안 그래도 김밥 사러 가려고 했는데…”
“또 김밥이야?”
“그게 아니라, 오늘 마침 도시락 들어와있대요.”
“그래? 내 팬이 보냈대? 어디? 천송이 갤러리?”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스태프들 것까지 다 준비했더라구요.”
오올. 천송이 잘 나가는데. 누구 말대로 밥은 챙겨 먹고 다니게 해주는 구나- 매니저의 말에 반색하며 대기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이미 스태프들은 팬들이 줬다는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천송이씨 잘 먹을게요- 인사를 받으니 괜히 어깨가 으쓱, 맛있게 드세요, 하고 화답한다.
“어머, 초밥이네. 마침 먹고 싶었는데.”
“누나 건 따로 있어요.”
“오- 내 건 스페셜이야?”
몇 시간 째 굶었는지. 진짜 사람 밥은 먹여가며 일을 시켜야지 말이야. 한 켠에 잔뜩 쌓여있는 도시락 중에 특별히 따로 준비되었다는 도시락을 건네 받고 어느새 피곤함을 잊고 기분이 좋아진다. 누나 도시락엔 또 뭐 있어요? 몰라, 뭐 하나 더 들어있긴 하네- 범이와 민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송이의 도시락 뚜껑을 여는 걸 지켜본다.
“헐, 이거 개불 아니에요?”
“어? 진짜네. 나 이거 엄청 좋아하는데.”
“언니, 이런 것도 먹을 줄 알아요? 으으. 전 징그러워서 못 먹는데.”
“징그럽다니!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다른 사람들 도시락과 차별화(?)된 건 초밥 옆에 따로 그릇에 잘 담겨있는 개불. 도시락 메뉴로는 정말 난생 처음 볼 정도로 매우 독특하긴 하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쨌거나 좋아하는 거니까. 근데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지. 평소 정말 좋아하는 음식은 간장 게장, 개불, 산낙지, 이런 거지만, 방송이나 인터뷰에선 샐러드, 과일, 이런 거나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기에 제대로 진짜 취향 저격한 메뉴 선택이 의외였다. 역시 팬들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니까.
“근데 나 개불 좋아하는 거 진짜 거의 아무도 모르는데… 가족들 빼곤.”
“누나가 어디서 말했나보죠, 뭐. 빨리 드세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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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선물에 좋은 기분으로 남은 촬영을 마쳤다. 송이는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간만에 SNS에 글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새 팬들과의 소통이 좀 뜸했지. 아까 도시락을 들고 찍은 사진을 선택하고 글을 썼다. 팬 분들이 주신 도시락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하트.
“……”
확인 버튼을 누르려다 잠시 멈칫 했다. 정말 내가 개불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면 될 걸, 아까부터 자꾸 그게 궁금하다. 송이는 SNS에 글을 올리려다 말고 윤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천윤재. 뭔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아?”
= 공부 중이었어.
“네가 무슨 공부…”
= 뭔 일인데! 용건이나 빨리 말해.
“너, 도민준이랑 만나서 게임 했어?”
= 어. 지난 주말에.
“이 자식이. 그 사람 바쁜데 왜 네가 오라 가라야.”
= 잠깐 한 거야, 잠깐. 그리고 민준이 형이 오라고 한 거거든?
“암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 혼낼 게 뻔한데 내가 누나한테 왜 말해. 그리고, 민준이 형이랑 아무 사이 아니라며?
“...그렇지! 그렇긴 하지. 근데 혹시 도민준이…”
= 민준이 형이 뭐?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야.”
= 뭐래… 겨우 그 말 하려고 전화했어? 나 공부 해야 돼. 끊어!
뚝, 끊어진 전화에 이 싸가지 없는 시키가 하고는 열을 낸다. 어쨌거나 목적이 있어 무작정 윤재에게 전화를 한 것이긴 한데,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감당이 안 되는데, 더 감당이 안 될 지도 모른다. 송이는 계속된 의구심을 이만 접어두기로 한다. 그리고는 아까 쓰다만 SNS 창을 다시 띄우고, 글을 좀 더 덧붙여 쓴 뒤에 확인 버튼을 눌렀다.
팬 분들이 주신 도시락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고맙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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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지루해. 졸리다. 내가 이거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송이는 한 명품 브랜드의 패션쇼에 초청되어 관객석에 앉아 쇼를 관람하고 앉았다. 다른 곳도 아닌 뉴욕 한복판에서. 화려한 신상 의류와 가방, 액세서리들에게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잠시. 쇼가 길어지니 점점 잠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에 워낙 보는 눈과 카메라가 많아 하품도 억지로 참아가면서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딱 잠이 올 시간이다. 하여간 이 어메리카 대륙은 아무리 와도 시차 적응이 안 된다니까.
드륵.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클러치에서 진동이 울린다. 송이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클러치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사진을 하나 찍는 척 하고는 무릎 위에 올려 슬쩍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본다.
= 패션쇼 어때요.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인데.
민준의 메시지. 내용이 뭐든 일단 입꼬리가 올라간다. 미국에 며칠 동안 간다고 지난 번 대화 때 말하긴 했는데, 아마 지금쯤 여기저기 기사로 떴을 송이의 패션쇼 참석 사진을 본 모양이다. 지금 한국은 한창 새벽일 텐데. 이렇게 시간 변경선을 몇 개나 넘어야 서로의 시간이 맞아떨어진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적어도 같은 날에는 있다는 거다.
- 아니요, 이번 SS 시즌은 별로네요. 근데 늦었는데 아직 안 자요?
몰래 표정 관리를 하며 빠른 손 놀림으로 답장을 보내고선 괜히 런웨이 위에 집중하는 척 한다. 저 옷은 좀 마음에 드네, 어우. 저 모델 워킹 너무 별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다시 1만 킬로미터 떨어진, 내가 있었던 14시간 전을 살고 있는 그에게로 온 신경이 쏠린다.
= 스케줄 끝나고 조금 전에 들어왔어요. 배고파서 뭐 좀 먹으려는데 집에 먹을 게 없네.
- 나보고 밥 챙겨 먹으랄 땐 언제고.
= 그러게요. 요즘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네요.
- 밤에 먹으면 속에 안 좋으니까 그냥 자요. 피곤하기도 할 텐데.
= 안 피곤한데.
- 내일은 스케줄 없어요?
= 있죠. 그런데 괜찮아요. 진짜.
- 잠깐, 지금 패션쇼 끝나서 박수 쳐야 돼요
마침 디자이너와 모든 모델들이 한꺼번에 나오며 쇼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이럴 땐 또 일어나서 박수를 쳐줘야 하기에 대화를 멈추고 본 일에 충실한다. 드디어 끝났네. 길어지는 박수 세례에 혹시나 또 대화가 끊기는 건 아닌지 초조해하다가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송이는 제일 먼저 그 자리를 뜬다. 이렇게 시간이 맞아서 계속 이야기 하는 게 거의 처음인데. 쇼장을 나오면서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 아. 난 끝났을 거라 생각하고 보낸 거였는데. 미안해요.
- 상관없어요. 계속 지루했거든요.
= 관심 없는 곳에서 웃으며 앉아있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죠.
- 대표님이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데, 그래도 이건 뭐 쉴 틈을 안 주니. 그 쪽도 바쁘죠?
= 그렇죠. 요샌 조금 나아지긴 했는데, 곧 또 해외 촬영 나가야 해요.
- 어디 가는데요?
= 유럽 여기저기. 이번엔 좀 길 것 같아요.
- 아…
한국-미국에 이어 유럽이라니. 이거 무슨 장거리 커플도 아니고. 아니, 커플이란 말은 아니고… 아무튼, 유럽도 시차가 좀 있으니까 한국에서보다 이렇게 더 자주 연락하는 타이밍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면 우리는 계속 이런 식으로만 만나야겠네. 서로 핸드폰 속 메시지를 통해서만, 티비를 통해서만, 기사를 통해서만… 진짜로 보는 건, 언제 하지-
= 그럼 뉴욕에서 언제 들어와요?
- 5일 후에요.
= 난 3일 후에 출국인데.
그거 뭐 어려운 일이라고, 서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만 있게 해달라는 바람.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세계 평화가 이뤄지게 해주세요, 같은 거창한 소원도 아닌데…
= 그럼 못 보겠네.
언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아무 이유 없이 만나던 사이도 아니었으면서, 아무 목적 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도 아니었으면서. 민준의 그 말이 우리의 거리를, 우리의 다른 시간을 안타깝게 만든다.
“......”
쇼장을 나와 카메라 플래시와 셔터 소리, 알아듣기 힘든 말들 같은 익숙한 소음을 지나 차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옆 자리의 매니저가 다음 스케줄을 말해준다. 애프터 파티가 있는데 거기서 사람들을 잘 알아둬야 한다, 어쩌고 저쩌고… 그런 말들을 들으며 송이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뉴욕의 아득한 빌딩 숲, 차로 가득한 도로 위, 노란 택시, 수 많은 사람들, 아름답고 비싼 옷, 반짝이는 클러치…
“누나, 제 말 듣고 있어요?”
“......”
송이는 뉴욕의 밤 거리를 바라보다 손에 쥐어진 핸드폰 속 메시지로 눈을 돌렸다. 오랫동안 보내지지 못하고 하얀 메시지 창에 머무르기만 하고 있는 ‘보고 싶다’ 라는 네 글자. 어차피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할 테지만,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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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오늘 내일 일정 전부 다 취소 됐대요.”
돌아가는 날을 이틀을 앞두고 갑자기 모두 취소된 일정. 송이는 호텔방에서 메이크업을 받다가 듣게 된 소식에 눈을 크게 뜨고 반색했다..
“왜?”
“장소 대여 문제가 있대나 뭐라나.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음...그렇구나.”
힘들고 재미도 없던 차에 스케줄 하나가 취소되었다니 처음엔 그 소식이 반가웠지만 이내 곧바로 시무룩해진다.
“왜 이렇게 시큰둥하세요. 지겹다고 빨리 한국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비행기 표 바꿀까요?”
“일찍 가면 뭐 해… 볼 사람도 없는데.”
어차피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 봤자, 도착했을 때쯤엔 민준은 유럽으로 가고 없을 텐데. 민준이 하루 이틀만 늦게 간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나? 물어볼까?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일하는 건데 내가 뭐 어떻게 할 수가 없겠지. 얄궂은 엇갈림을 원망하며 그냥 호텔 방에 처박혀서 하루 종일 잠이나 자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냥 여기 계시다가 원래대로 돌아가실 거예요?”
“…흠. 그럴까나. 그냥 쉬다가…”
하지만 곧, 여기까지 와서 오랜만의 휴식일에, 내가 잠만 자야겠어? 어차피 돌아가면 눈코 뜰 새 없이 또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만 할 텐데- 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범아, 나 한국 가면 스케줄 어떻게 돼?”
“음… 화보 촬영이랑 잡지 인터뷰, 영화 관계자 미팅...”
“그거 다 며칠만 뒤로 미루자.”
“‘네??”
“야. 나도 이 참에 좀 쉬자. 이렇게 살다가 진짜 쓰러지겠어.”
“하...하지만…”
“내가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만. 딱 일주일만 쉬었다 한다고.”
“안대표님이 허락 안 하실 텐데...”
“안 하면 어쩔 건데. 내가 지금 우리 회사 먹여 살리는데, 내가 쓰러지면 전부 다 손해라구.”
“아이씨… 안 되는데…”
그래서, 잠깐의 휴업 선언. 어디서 무얼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딱 일주일만. 힘든 몸과 복잡한 마음을 둘 다 좀 쉬게 해주고 싶었다. 이 시간만은 다 잊자고. 발 아픈 하이힐도, 추운 날씨 속에 입어야 하는 얇은 드레스도, 억지 미소도. 그리고 이런 현실 때문에 자꾸만 엇갈리는 그의 문자를 기다리는 것도, 실체도 없이 속상해하고 섭섭해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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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왜 이 곳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 좋다.”
야외 테라스에 앉아있어도 그리 춥다고 생각되지 않는, 딱 좋은 기온. 맑은 하늘, 따스한 햇살, 잔잔하게 흐르는 강,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아직도 푸르른 아주 커다란 나무, 여유로운 사람들과 여유로운 음악, 따뜻한 커피.
이게 얼마만의 여유인지. 송이는 약간 쌀쌀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오랜만에 찾아온 마음의 안정을 깊게 느꼈다. 향이 좋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니 좋다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리필이 영어로 뭐더라. 아, 리필이 영어지.”
샌 안토니오 리버워크의 노란색 간판을 한 어느 카페. 송이는 노란 홀더가 끼워진 잔을 직원에게 건네며 리필을 부탁했다. 예전에도 마셔봤는데 여기가 제일 맛있다며 손짓 발짓, 짧은 영어로 좋은 말까지 해주고 나서 리필을 받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오후의 햇살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자리. 다른 때 같으면 자외선 어쩌고 하면서 피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
아름다운 이 곳을 다시 찾은 건 정말로 충동적인 일, 아니 짓이었다.
송이는 회사에 일방적으로 자체 휴가를 통보하고선 뉴욕에서 바로 국내선을 타고 샌 안토니오로 날라왔다. 왜 이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나는 곳이 여기 밖에 없었다. 어디론가 가야한다면 이 곳이어야만 했다. 그저 로케이션 촬영 때 이런 저런 일들로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앞세워, 익숙하고도 낯선 이 곳에 무작정 또다시 찾아왔다. 아무에게도 제가 이 곳에 왔다는 걸 알리지도 않았고, 전화도 꺼두었다. 안대표도, 범이도, 엄마 아빠도, 윤재도, 아무도 모른다. 정말로 온전히 혼자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 혼자만의.
“……”
송이는 샌 안토니오 강 줄기를 따라 곤돌라가 유유히 지나가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배 위의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들 행복해 보인다. 한 가운데 서서 이것 저것 설명을 해주고 있는 가이드가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하하하, 크게 웃는다. 저거 타고 촬영할 때 좋았는데. 비록 그와는 서로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 내가 왜 이걸 이 사람이랑 보고 있나 몰라.’
‘하. 이하동문입니다.’
지난 여름을 생각하며 피식, 혼자 바람 빠진 웃음을 짓는다. 뭐하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시비를 걸고 싸웠나 몰라. 그렇게 실실 웃다 다시 정색하면서 고개를 흔든다. 어휴. 무슨 벌써부터 그 인간 생각이나 하고 있나 몰라. 이번 여행만큼은 벗어나있자고 다짐했는데. 일주일 생각 안 한다고 안 죽는다.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 좀 하지 말자. – 물론, 그러려면 아예 이 곳에 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흐아암.”
천천히 멀어지는 배를 보고 있다보니 노곤한 기분이 든다. 아메리카노를 진하게 마시고도 이 시간엔 늘 졸음이 쏟아진다. 그 인간도 시차 적응을 잘 못하는 나를 구박하곤 했었지.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지금은 일을 하기 위해 억지로 잠을 깰 필요는 없다. 이 나른한 기분마저 즐기면 되니까.
“......”
송이는 턱을 괴고 살짝 눈을 감았다. 따뜻한 햇볕, 조금은 서늘한 공기의 기운과는 달리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도 그 온도가 적당하다. 좋다, 너무 좋다. 이런 데서 매일 살면 얼마나 좋을까…
“......!”
잠깐 눈을 감고 있으려고 했던 것뿐인데. 잠이 들었던 건지 턱을 괴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지면서 미끌.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져서 테이블에 이마를 부딪힐 뻔 했다. 깜짝 놀라 눈이 번쩍 떠졌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 쪽팔리다. 그 다음은 한국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뭐 이런데서 잠을 자고 있어요?”
“......?”
드디어 만났다- 는 생각.
“무슨 여자가 맨날 이렇게 아무데서나 자는지…”
“……”
그렇게 결국, 나는 낯섦의 길로 되돌아왔다. 그곳에서 다시 만나는, 나의 낯선이여.
Hello, my stranger.
1. 개불 내가 쓰고도 웃긴ㅋㅋ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개불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근데 어째. 송이가 좋아하는 건디
2. 21편 그리고 앞으로 나올 샌 안토니오는 딱 지금 이 맘 때쯤. 그다지 춥지 않아요.
3. 아. 너무 돌아왔다. 이걸 쓰는데 21편이나 걸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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