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Hello, my stranger 19 본문
Hello, my stranger 19
“우리 드라마 팀 하고는 처음 작업하는 건데, 정말 잘 맞았어요. 끝나간다니까 정말 아쉬워요. 마치, 우리 드라마 제목처럼, 여행을 끝내는 느낌이랄까.”
리포터의 뻔한 멘트가 시작되면 피곤함을 감추고선 기계적으로 웃고, 기계적으로 대답한다. 민준과 송이는 촬영을 하다 말고 한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이고 뭐고, 바빠 죽겠는데 난데없이 인터뷰라니. 이 프로그램 피디가 감독님의 선배라더니, 선배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인터뷰 자리를 마련한 게 뻔하다.
“시청자 분들이 천송이, 도민준 두 분 케미를 굉장히 좋아해주시는데, 평소 두 분 호흡은 어떠하신가요?”
이런 질문도 하도 많이 받은 지라 이젠 거리낌없이 대답할 수 있다. 정해진 틀에서 오버하지도 않고 오해 사지도 않을 만큼만 딱 적당하게.
“저희야 뭐 찰떡 호흡이죠. 서로 조언도 많이 하고, 천송이 선배님께서 워낙 또 잘 해주시고…”
“그래서 그런 케미가 드라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군요? 드라마를 보고 진짜 같다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뭐… 그렇게 봐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이런 말은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오케이. 아예 처음 듣는 말도 아니고,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들었던 말이니까 괜찮다. 연기를 정말 잘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정말 ‘진짜’가 아니니까. 근데, 뭐가 진짜라는 거야? – 송이는 굉장히 비즈니스적인 질문과 답변이라는 걸 알면서도 살짝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민준을 보니 더더욱.
“그럼, 오늘은 무슨 촬영하시는 중인가요? 저희한테만 살짝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지금 촬영 중인 장면에 대해 묻는 질문에 민준과 송이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마주본 채로 빤히 서로의 눈을 보았다. 후반부의 중요한 내용을 당연히 발설할 수 없었기에, 말하지 말라는 눈빛을 암묵적으로 주고 받았다.
“아… 그건……”
그것뿐이었으면 송이가 먼저 대답하려 했는데. 마주했던 민준의 눈이 순간적으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걸 느끼고서는 멀쩡했던 생각이 돌연 멈추었다. 입술. 분명히 아주 조금 아래로 움직인 눈동자는 입술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 말문마저 막혔다.
“그건 당연히 비밀이죠. 본 방송에서 확인해주세요-“
송이가 말하려다 말자 얼른 민준이 끼어들어 대신 대답을 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긴 했는데 아무래도 카메라에 당황하던 모습이 그대로 찍혔을 것 같다. 얼굴이 빨개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긴 건 상관없다. 민준이 눈치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송이는 이상하게 바싹 마르는 것만 같은 입술을 잘근, 조금씩 물어뜯기 시작했다.
왜 이러니. 정말 ‘진짜’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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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감기 걸렸어요?”
“아니? 왜?”
“얼굴이 좀 붉은 것 같아서요. 화장도 떠 있고.”
“그래? 차 안이 좀 더워서 그런 것 같은데. 넌 안 더워?”
“덥긴요, 오히려 추운데.”
머리를 만져주다 말고 송이의 이마에 짚어보는 민아의 손이 차다. 얼굴이 뜨거운 건가. 송이는 손에 든 거울을 들어올려 오늘따라 유난히 푸석해보이는 피부를 들여다본다. 손 부채질로 얼굴의 열을 식혀보아도 아까부터 바알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잘 가라앉지 않는다. 얼굴 뿐만 아니라 온 몸에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부터 무의식 중에 물어뜯은 입술도 거칠어 보인다. 괜히 그랬어.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겠지. 아, 내가 무슨 소릴. 어쨌거나 영 입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거 입술색 나한테 좀 안 어울리지 않아?”
“괜찮은데… 오늘은 뭐 어때요, 어차피 키스하면 다 지워질 텐데.”
민아는 능청스럽게 말하고는 킥킥, 웃는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쪼그만게. 송이는 푼수 같이 웃고 있는 민아를 거울을 통해 노려보았다. 지금 누구 심정도 모르고, 참 나.
“하하, 죄송해요. 키스씬은 언니가 찍는데 내가 왜 좋아하지.”
“조용히 해라.”
“...네.”
이게 대단원의 막도 아니고 엄청난 반전의 장면도 아니고, 이 드라마에만 있는 것도 아닌데 뭐 그리 난리래. 처음도 아니고, 아마추어 같이. 뭐…도민준하고는 처음이지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키스가 처음이라는 게 아니고 키스 연기가 처음이라는 거다. 특별할 것도 없다. 밥 먹고 대화 하고 울고 웃는 연기와 다를 바가 없는, 그냥 연기의 일부일 뿐.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네.
“어휴, 왜 이렇게 덥냐. 나 바람 좀 쐬고 올게.”
겨울 온지가 언젠데 자꾸 더우시대-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말하는 민아를 뒤로 하고 밴에서 내렸다. 차디찬 공기가 얼굴에 닿자 상쾌하기까지 한 기분이 든다. 멀리서 한창 준비 중인 촬영 현장을 고개를 들어 살펴본다. 예정 시간보다 한참 지났는데 왜 아직도 안 부르는 거지. 송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도 길게 내뱉어진다. 차라리 빨리 찍어버리지. 피가 마르는 느낌이네.
“…어휴, 깜짝이야.”
그 긴 입김이 공중에 퍼지기도 전에 대각선 반대편에 서 있던 밴의 문이 드륵, 열린다. 송이는 뭐에라도 들킨마냥 화들짝 놀랐다. 하필 거기서 내리는 것도 민준이다. 혼자 그렇게 생각한 걸 수도 있겠지만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새 같아서 조금 당황했다. 모른 척 하기엔 이미 눈이 마주쳤다.
“…...”
“……”
민준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송이도 대충 따라 인사한다. 그러고서는 우물쭈물, 다시 차에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여기서 피해버리면 이 어색함을 인정하는 꼴만 될 것 같았다. 민준도 딱히 어딜 가려고 했던 건 아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이유 없이 시시콜콜한 잡담으로 말을 걸곤 했던 걸 생각하면 이 침묵은 누가 봐도 어색하다.
어색하지 않다. 아무렇지도 않다. 오늘도 그저 어제의 내일일 뿐이다 – 송이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일부러 큰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저녁 뭐 먹었어요?”
“설렁탕이요.”
“아…요 앞에 그 유명한 집?”
“네. 선배는요?”
“나…나는, 그냥 분식 세트?”
“그런 거 먹을 바엔 그냥 제대로 식사를 해요.”
“…남이사.”
먹긴 먹었지. 김밥 딱 한 개. 입맛이 없어 본인이 좋아하는 참치 김밥이 눈 앞에서 다른 사람들 입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만 있었지. 그런데 도민준 너는 밥을 잘도 먹었겠다? 대화하는 데에 좀 거리가 멀었다 생각한 건지 민준이 조금 가까이 다가온다. 송이는 ‘그 씬’ 촬영을 앞두고 긴장한 기색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민준이 약간 얄미워지려 했다.
“크흠. 긴장… 안 되나 봐요?”
“무슨 긴장이요?”
“왜 그… 이제 찍을 씬이요.”
키스를 키스라 말하지 못하고.
“아아. 뭐 긴장할 게 있나요. 처음도 아니고.”
“…몇 번 해봤는데요?”
“음… 3번?”
“에계, 겨우 3번? 나는 보자… 한 20번? 20번은 했겠다.”
“자랑이에요?”
“아니, 뭐… 자랑은 아니고.”
송이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여태까지 찍었던 키스씬의 수를 세어보고선 민준을 비웃었다. 솔직히 20번은 좀 오버한 것 같긴 한데, 아무튼 그만큼이나 경험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난 ‘그런 씬’을 앞두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사실을 민준에게 알리고 싶은 건지, 제 자신에게 세뇌시키고 싶은 건지.
난데없는 송이의 키스씬 경험 타령에 민준이 피식 웃는다. 밥도 잘 먹고, 긴장도 안 하고, 내 말에 웃기까지. 왠지 모르게 민준이 더 더 얄미워졌다. 그래도 나 천송인데. 내가 키스씬 찍었던 남자 배우들은 너보다 훨씬 잘난 사람들뿐인데, 알기나 해?
“나와계셨네요. 이제 촬영 들어간대요.”
“아……네.”
때마침 조연출이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달려와 촬영 재개를 알린다. 그 말에, 여태 부정하고 있었던 두근거림이 배로 커졌다. 부정맥이야 뭐야. 왜 이래, 하루 종일. 조연출은 다시 촬영장 쪽으로 달려가고, 송이는 가야 되는 걸 알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민준이 먼저 가길 바랐는데 민준도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저…”
동시에 말을 꺼냈고, 내내 괜히 피해온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 다음, 뭐라 할 새도 없이 민준이 먼저 손을 뻗는다. 얼굴로 다가오는 큰 손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빡, 천천히 감았다 뜨니 민준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 빨간색 미용실 머리 핀.
“이거 꽂고 키스할 건 아니죠?”
이걸 여태까지 앞머리에 꽂고 있었다니. 맙소사. 송이는 또다시 창피함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민준의 손에서 잽싸게 핀을 빼앗았다. 아, 왜 빼요. 앞머리 누르고 있었는데. 그럼 다시 껴요 - 민준이 손에 든 핀을 다시 송이의 머리에 끼우려 하자 옆으로 잽싸게 도망간다. 왜요, 이것도 괜찮은데. 하지마요, 좀!
민준의 장난에 웃음이 터지고 그나마 조금 긴장이 풀린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지금은 일단 좀 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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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흔들림과 엇갈림이 끝난 겨울 밤. 고요한 건 이 곳의 차가운 공기뿐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 요동칠 것도, 괴로울 것도 없는 마음은 어떤 초조함도 없이 그를 기다린다. 조용한 골목. 한 해의 끝자락을 밝히는 조명들이 그 곳을 가득 빛내고 있다. 그가 반드시 돌아올 길목에 서서 벅찬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으면, 마침내 그의 모습이 나타난다. 약속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만남. 마치, 처음 만난 날처럼.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이제 숨길 필요도, 억누를 필요도 없다. 길의 끝과 끝에서 마주 보고, 웃고 나면, 그가 천천히 다가온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제 우리가 서로 마음껏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목적지가 확실한 시선의 끝.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손이 얼굴을 감싸온다. 하나씩 느껴지는 손가락의 촉감…
“…아. 죄송합니다.”
모두가 숨죽이며 집중한 순간. 송이의 어깨가 움찔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카메라에 다 담길 정도로 컸다. 송이 자신도 그걸 알았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사과를 한다. 앞에까지 좋았는데.
“손이 너무 차서…”
“아. 죄송해요.”
민준의 손이 볼에 닿자마자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은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송이는 NG 낸 것이 괜히 민망해 민준의 손이 차다는 탓으로 돌려버린다. 민준은 자기 때문이었다는 말에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고선 손을 비벼가며 급히 따뜻하게 해보려 한다. 송이는 몰래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다시 갈게요.”
바로 촬영이 진행되고,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송이의 볼 위로 올려진 민준의 손은 아직도 조금 차가웠지만 이젠 손을 탓할 수도 없었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민준의 눈이 감기며 내리깐 속눈썹이 보인다. 송이도 따라 눈을 감으려 하지만, 이상하게 그럴 자신이 없다.
“컷! 송이씨, 눈 감는 타이밍이…”
“…죄송합니다.”
컷, 이라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눈이 감긴다. 액션이라는 말이 유효한 동안에는, 마치 눈을 감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송이는 또 혼자 자책하면서 땅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한참이 지나서야 뭔가 다짐하고선 다시 고개를 들어 연기를 시작하지만,
컷, 컷, 엔지, 다시, 다시…
송이의 NG는 계속되었다. 이젠 죄송하다는 말도 정말 죄송해서 할 수도 없었다. 입술이 닿기 직전, 송이는 벌써 7번째 고개를 숙였다. 날은 춥고, 티는 내지 않지만 NG가 거듭될수록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송이는 점점 제 자신에 대한 짜증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지난 번 강원도에서의 촬영 때도 이랬는데. 그러나 지금은 그 때처럼 자신을 지켜봐 줄 사람이 없다. 때론 나를 진정시키기도 하고, 때론 나를 불안하게도 하는 그 사람은, 지금 나의 프레임 안에 함께 들어와 있다. 그래서 더 힘들지만, 그래서 또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나 왜 이러지.”
뺨을 때려보기도 하고 몇 번이나 숨을 골라보기도 했지만 긴장한 마음은 도무지 풀어지지가 않았다. 송이가 그렇게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 동안 민준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민준을 볼 수가 없었다. 민준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천송이 왜 이러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민준 앞에서! 진짜가 아니라고 얼마나 더 말해야 알아들을 거냐. 한심해, 아마추어 같아, 창피하고 쪽팔려. 정신 차려- 속으로 스스로에 대한 온갖 질타를 해보아도 NG는 8번이 되고, 9번이 되었다.
“감독님, 저 잠시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왜, 송이씨 컨디션 안 좋아?”
“…네. 좀만 쉬었다 갈게요. 죄송해요.”
“아니야. 우리도 좀 쉬지 뭐. 자자, 다들 잠깐 휴식-“
이렇게 가다 더 욕 먹을 바엔 스스로 멈췄다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결국 감독님의 양해를 구하고 촬영을 조금 미루었다. 내내 말없이 서 있던 민준이 뭔가 말할 것 같았지만 그럴 틈을 주지도 않고 촬영 장소를 빠져나와 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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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이럴 때 드라마에선 항상 이 대사를 치지. 나다운 게 뭔데.
“몰라.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는지.”
“설마, 키스씬이라고 긴장하신 거 아니죠?”
“야. 장난해? 내가? 나 천송이야.”
“아, 알죠. 그러니까 더 이상하다는 거죠.”
밴 안에서 머리를 쥐어잡고 괴로워하는 송이에게 범이가 옆에서 속을 더 긁어댄다. 긴장? 누가 긴장을 했다는 건지. 참 나. 내가 키스씬을 몇 번을 찍었으며, 그 상대가 다 누구였는데. 말도 안 돼. 그냥 연기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뿐이야. 가끔 그럴 때가 있다고.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키스씬을 이렇게 감정도 안 잡힌 채로 대충 찍어 내보낼 수가 없으니까 고심하는 것뿐이라고.
“너, 집중 안 되니까 나가 있어.”
“예? 추운데…갈 데도 없는데.”
“좀 나가 있어!”
송이는 옆에서 쫑알대는 매니저가 시끄러워서 밖에 나가라고 소리를 쳤다. 불안과 초조함이 극에 달했고,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범이는 이 밤중에 밖에 나가있으라니, 너무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송이의 신경질 상태를 보니 나가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하고선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나간다.
“근데요, 누나.”
차에서 내린 범이가 다시 문을 닫으려다 말고 송이를 부른다. 송이는 짜증나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빨리 문이나 닫을 것이지.
“왜, 누나 예전에 연기 안 되면 하시던 거 있잖아요.”
“…뭐.”
“진짜라고 주문 걸기.”
“……”
‘나는 지금 연애를 하는 거다. 내가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못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우리 학원에서 제일 잘 생기고, 제일 잘 났다는 남자랑 연애를 하는 거다. 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다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는 거다.’
“몇 년 전만해도 몰입 안되면 혼자서 막 최면 걸듯이 그러셨잖아요. 그러고 나면 바로 단번에 오케이 받아내고.”
“……”
“요샌 안 그러시나 해서요.”
“…그런 건 어릴 때나 한 거지.”
갑자기 생각나서 말해봤어요, 누나. 뭐래. 문이나 빨리 닫아, 임마. 밴의 문이 쾅 닫히고, 송이는 원하는 대로 혼자 남게 되었다.
“……”
진짜라고 주문 걸기. 진짜가 아니라고 할 게 아니라, 진짜라고 생각하기. 진짜가 아니지만, 진짜인 것처럼 내 자신을 속이는 일. 혹은… 진짜일 리 없지만, 진짜이길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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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갔을 땐, 다들 송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뭔 말이라도 걸었다가 어렵게 잡은 감정을 다 깨트릴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민준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송이가 다시 나타난 걸 보고 걸치고 있던 두꺼운 패딩 점퍼를 벗고 촬영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다시 마주한 민준. 분명 떨리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의 성질은 그 전과 약간 달랐다.
“이제 괜찮아요?”
“…쪽팔리니까 말 시키지 마요.”
“오케이. 알았어요.”
대답하는 민준의 말투가 묘하게 송이 자신의 투와 비슷하다는 걸 느꼈다. 조금 웃는가 싶던 민준은 이내 원래의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아깐 슛 상황이 아니면 바닥만 보고 있던 송이는 이제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
“......”
민준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그의 눈을 자신의 눈에 맞추었다.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이렇게 나를 보고 있었겠지. 수많은 조명의 불빛이 민준의 눈동자에 비친다.
감독님이 스타트 신호를 주셨던가. 들리지 않았지만 어느샌가 얼굴을 감싸고 있는 민준의 손 때문에 알았다. 손이 뜨겁다 느껴질 정도였다. 촬영장에 돌아왔을 때, 핫팩을 두 개나 손에 쥐고 있던 민준. 그냥 날이 추워서였을 것이다. 손 끝이 귓가를 간지럽히고, 서늘한 공기의 흐름과 함께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살짝 내리 깐 시선이 입술을 향한다. 아마 아까 인터뷰 중에 민준은 정말로 내 입술을 봤을 것이다. 그 때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건 이제와서 아무 상관 없다. 나도 그의 입술을 보고 있으니까.
따뜻한 입김이 먼저 입술 위에 앉고, 이제는 그를 따라 눈을 감는다. 눈꺼풀이 정확히 닫힌 그 순간에, 입술이 입술에 닿는다. 그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나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그 때 두 가지를 느꼈다. 따뜻하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민준도 떨고 있다는 것. 그러나 입술이 더 깊게 파고 들어 그 찰나의 미세한 떨림은 금세 잊었다. 민준의 손가락 사이로 긴 머리카락이 흘러 내리고, 이어 뒷목을 타고 등을 쓸어내린다. 느슨하지 않은 팔이 더 가까이 몸을 끌어당기고, 나의 손은 자연스레 그의 코트 안으로 들어가 허리를 감는다. 입술을 어르는 움직임이 맞닿은 모든 감각들을 살게 한다. 입맞춤은 더 깊어졌다. 민아가 말했던 것처럼, 립스틱 컬러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
천천히 숨을 쉬고, 천천히 입술이 떼어지고, 천천히 눈을 뜬다.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눈동자. 하얀 입김이 섞여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이게 진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가정마저 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건, 진짜니까. 그가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는 건, 진짜이니까. 그 미소를 따라 웃고 있는 나도, 진짜이니까.
“컷, 오케이!”
정말로 최면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깨어나기 전까진 진짜라고 믿으니까.
“두 사람, 정말 좋았어요. 예쁘게 잘 나온 것 같아.”
우주에 떠 있는 것 같던 기분이 제 중력을 되찾는다. 숨을 안 쉬고 있었던 것처럼, 거친 숨이 한 번 내뱉어진다. 송이는 민준의 코트에서 팔을 빼내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온기가 사라지고, 벌써부터 춥다. 두 사람의 연기가 굉장히 만족스러웠는지 감독님의 표정이 아까와는 달리 밝아져 있었다.
“마지막에 둘이 마주 보고 웃는 건, 누구 애드립? 그거 너무 마음에 들어.”
감독님께서 혼잣말로 좋아, 좋았어- 라고 중얼거리다 묻는 말에, 송이와 민준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크게 뜬 눈 깜빡임도 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서로에게 암묵적인 질문. 웃었던가. 확신할 수도 없으니 대답도 없다. 민준이 시선이 송이의 입술을 스친다.
“아… 저희가 웃었나요?”
어쨌거나, 진짜라고 믿으니까. 그 최면이 아주, 아주...길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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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여러 앵글별로 담기 위해 3번의 키스를 더 했고, NG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 둘 다 약한 감기에 걸려 왔다. 사람들이 모두 다 놀렸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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