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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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llo, my stranger 20

SCIENCE AND LOVE 2016. 1. 25. 07:56


 


 

낯섦. 


그것은 여행의 가장 큰 묘미다. 낯선 곳, 낯선 기후, 낯선 잠자리, 낯선 음식,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낯선 세계를 경험하고, 동행의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기도 하며, 때로는 나도 몰랐던 내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여행이 끝이 날 때쯤이면 우리는 이 낯섦과 이별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낯선 것을 익숙해하고, 익숙한 것을 낯설어하는 아이러니.

 


 




Hello, my stranger 20

 



 


 

 

25시간 째 깨어 있다. 틈틈이 잔다고 잤지만, 이동 중에 밴에서 잠깐 눈 붙이는 게 어디 피곤이 풀리겠나. 마지막 방송 당일 날까지 정신 없게 찍는 짓은 하지 말자는 동의 하에 막방 전날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래, 오늘만 끝나면, 오늘만 지나면.

 

 

“…...”

 

 

송이는 패딩 안에 품고 있던 대본을 꺼내 훑어보았다. 찍은 장면마다 펜으로 체크를 해둔 대본은 어느새부터인가 작은 자필 글씨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하나의 씬 넘버. 가장 마지막 문단 아래 쓰인 ‘끝’이라는 단어와 마침표 하나. 어쩌다보니 마지막 촬영이 드라마 엔딩 씬이 되어 그 느낌이 더 크게 다가온다.

 

 

“자, 엔딩이자 마지막 촬영입니다. 유종의 미를 거둡시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사람들이 몰려 있는 촬영 장소로 향했다. 민준은 이미 카메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만 저 빈 자리에 서면 끝이 시작된다.

 

 

“아. 이제 잠 좀 실컷 잘 수 있겠네.”

“…그러게요.”

 

 

리허설을 하고, 촬영 직전 민준이 중얼거린 말. 아마도 일종의 작별 인사일 것이다. 후련한 듯이 말하는 민준을 보며 웃으며 맞장구는 쳤지만, 단순히 잠을 실컷 잘 수 있다는 이유를 반길 수만은 없다. 드디어 끝이다. 안 끝날 줄 알았는데 끝이 나네 – 자꾸만 ‘끝’이라는 걸 강조하는 것만 같은 민준의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 후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말 후련하니, 너는.


 

맑은 하늘, 얼어버린 듯 고요한 거리, 하루의 끝자락. 프레임의 한 쪽에서 나타나는 주호, 이어 반대 편에서 나타나는 선하. 서로 바라보며 웃고, 가까이 다가선다. 한 사람은 큰 배낭을, 한 사람은 캐리어를 끌고.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이제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화면 중앙에 마주 서고, 주호가 고개를 기울여 선하에게 짧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 손을 마주 잡고 출발. 다시 시작. 그것이 이 드라마의 끝이다.

 

 

“……”

 

 

흔한 인사처럼 쪽-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마찰음. 이건 진짜가 아니지만, 진짜가 아닌 이것도 이젠 더 이상 없을 거란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든다. 이건 민준이 저에게 하는 것도 아니고, 컷이라는 신호가 떨어지면 프레임 밖에서는 절대 있을 일도 아닌데. 혹시나 눈에 아쉬움이 묻어있을까봐 더 입술 끝을 당겨 미소 짓는다. 다음은 민준이 손을 잡아와야 하는데 웬일인지, 그는 무언가 망설이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는다. 숨을 들이내쉬어 크게 한 번 들썩이는 어깨.

 

 

“아- 죄송해요.”

“왜, 민준씨. 괜찮았는데.”

 

 

결국 민준은 스스로 흐름을 끊었다. NG. 잘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송이는 의아한 눈으로 민준을 보았다.

 

 

“한 번 더 할게요.”

 

 

민준은 No good이 아닌, Once more를 말하고 있었다. 한 번 더. 그 말에 송이는 이상하게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조금 전까지 자신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준비가 되었단 의미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 순간을 몇 분이라도 뒤로 미룰 수 있다는 것에 조금 마음이 놓였던 것뿐이다.

 

 

“헤어지기 싫구나.”

 

 

스태프들 중 누군가가 웃으며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스타트 지점으로 돌아간다. 이 모든 것과 헤어지기 싫어서, 처음부터 한 번 더.

 

한 번 더 다가가고, 한 번 더 마주 보고, 한 번 더 서로에게 웃어 주고,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그렇게 한 번 더 이루어진 입맞춤은 조금 더 깊고 길었던 것 같았다. 손을 잡고 앞을 향해 함께 걷는다. 카메라를 등진 채, 스태프들도 조명도 마이크도 보이지 않는 길… 이 시간이 끝나더라도, 우리에게 한 번 더- 라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는지..

 

 






 

#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오케이 싸인.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큰 박수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란 말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진짜 마지막. 송이는 시원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으로 함께 인사를 했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함께한 사람들. 제일 먼저 감독님께 달려가 아쉬움과 감사의 포옹을 나누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감독님하고 드라마 찍어서 정말 좋았어요. 나야 말로 천송이씨 같은 배우 데리고 작품 찍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지 – 약간은 오글거리지만 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말 하겠나 싶어 진심을 다해 감사의 표시를 한다. 그렇다고 이제 다시 못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코 끝이 찡해진다.

 

 

“고생 많으셨어요.”

“천송이씨도. 종방연 올 거지?”

“당연하죠. 제가 안 가면 그 자리가 빛이 안 나잖아요.”

“맞아, 맞는 말이야.”

 

 

혼자서 눈물 질질 짜기엔 창피할 것 같아서 최대한 밝은 얼굴로 다른 스태프들과도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었다. 할 이야기도 많지만 지금은 잠시 아껴뒀다가 그것들은 내일 종방연에서 하기로 약속했다. 사람들과 정신 없이 인사를 하면서 혹시나 안 챙겨준 스태프가 있나 하나 하나 잘 살펴보았다. 누구랑 인사를 안 했더라. 다 했나, 빼 먹은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안 챙겨주면 섭섭해 할 텐데…

 

 

“천송이.”

“……?”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어디선가 송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길 고양이에게 ‘나비야’ 라고 부르면 쳐다보는 것처럼. 하지만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송이는 주변을 한 번 쭉 둘러보았다.

 

 

“……?”

 

 

하지만 다들 서로 악수하고 인사를 하고 있었을 뿐, 그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는 없는 듯 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다른 이름 부른 걸 착각했나. 송이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채로 다시 몸을 돌려 앞을 보았다.

 

 

“……!”

 

 

아, 깜짝이야. 앞을 보자마자 정면에 서 있는 민준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매번 어디서 이렇게 불쑥 불쑥 나타나는 거야. 놀랐던 마음이 콩닥 콩닥 뛰는 심장으로 이어진다. 민준은 뭘 그렇게 놀래요- 하고 오히려 송이를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 송이는 혹여 방금 전 자신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이 민준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이 싸람이, 지금 내 이름을 막 부른 거야?

 

 

“설마, 방금 천송이라고 나 부른 게 그 쪽이에요?”

“아니요? 아닌데요.”

 

 

특유의 무표정으로 뻔뻔하게 아니요- 라고 대답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소란에 섞여 제대로 들은 건 아니지만 분명 그 목소린… 송이는 미심쩍은 얼굴로 민준을 보았지만 더 캐물을 수도 없었다. 그냥 아닌 거라 믿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민준은 웃는 건지 아닌 건지, 알듯 말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민준의 입술엔 아직도 송이의 것과 같은 립글로즈의 반짝임이 남아있다.

 

 

“……”

“……”

 

 

무슨 말을 할지 안다. 모두가 가지는 마지막 시간. 두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생하셨어요. 저랑 같이 연기 하느라.”

“…알긴 아네요? 내가 고생한지.”

“저도 만만치 않게 고생했단 사실도 아실는지.”

“참 나…”

 

 

송이는 민준의 말에 작게 웃었다. 고생, 많이 했지. 캐스팅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 맨날 으르렁대지, 다른 나라까지 가서 예측 못 할 일에 휘말렸지, 더위부터 추위까지 다 겪었지. 그건 민준도 마찬가지였을 거란 생각에 그 쪽이 뭔 고생을 했냐고, 평소처럼 괜스레 따지진 않았다.

 

 

“선배.”

“……”

 

 

선배, 라고 부르는 민준의 목소리. 요즘엔 자꾸만 그 목소리가 신경 어딘가를 건드리는 것 같다. 분명, 천송이라 날 부른 건 민준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난, 약속 지켰어요.”

“……?”

 

 

민준의 말에, 어색하게 빗겨나 있던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약속. 약속?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거지. 송이는 민준과 했던 약속을 떠올려보았다. 우리가 약속이라는 걸 했었나. 있다면 뭘 어떻게 지켰다는 거지. 대체 무슨 말이야-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마구 떠다녔다. 그 때라도 되물어봤어야 했는데.

 

 

“형! 이제 가야 돼요, 늦었어요!”

“어. 알았어.”

 

 

많은 기억들을 다 뒤져보기도 전에, 민준의 매니저가 멀리서 급히 민준을 찾고 있었다. 마지막 촬영 직후 곧바로 다른 스케줄이 있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럼. 종방연 때 봐요.”

 

 

민준은 빨리 오라는 매니저의 다그침에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 하고는 그냥 그대로 가버렸다. 어떤 약속을, 어떻게 지켰는지도 말해주지 않고, 마치 숙제를 남기고 간 듯이. 송이는 머리 속이 백지가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사를 마치고 촬영장은 하나 둘 정리되고 있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송이는 민준이 사라진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준이 말한 ‘약속’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내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또렷한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

 

 

“……”

 

 

지켜야 할 약속이 있을 만큼, 우리가 서로를 믿었던가…

 

 

 

 








#

 


다음 날, 드라마의 마지막 회가 방영이 되었고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정말 재밌었다고 사람들의 문자와 전화가 쉴 새 없이 왔다. 사실은 집에서 혼자 마지막 회를 보다가 마지막 장면을 남겨두고 티비를 꺼버렸다. 주인공들의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의미하는 엔딩. 시작을 알리는 끝. 그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건지, 차마 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저 매번 작품을 끝낼 때마다 캐릭터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어했던 것과 같은 감정이라 여겼다. 그 날 새벽, 사람들의 축하 메시지도 뜸해졌고,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떤 메시지 하나를 기다렸던 것 같다.

 

 

 









#

 

 

“우리 드라마를 위해 고생하신 모든 분들을 위하여!”

“위하여!!”

 

 

또 다음 날 저녁, 드라마 출연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동안의 회포를 푸는 종방연이 열렸다. 선물로 들어온 케이크도 자르고, 건배도 하고, 다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고, 즐거웠던 에피소드들을 나누고, 지난 몇 달 간의 시간들을 함께 공유하며 즐거워하고 아쉬워했다. 마지막 촬영 때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술잔을 부딪히다보니 금세 취기가 올랐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좋은 기분이니 괜찮았다.

 

 

그 날 민준은 계속 송이의 옆 자리에 있었지만 딱히 어떤 대화를 하진 않았다.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아있긴 하지만 누가 보면 모르는 사람인 줄 알 정도로 끝과 끝에 앉아서는, 젓가락 좀 달라는 말 말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민준이 건배를 할 때마다 거의 마시지 않은 소주를 마시는 척만 하고는 빈 물 컵에 따라 부어버리는 것만 여러 번 보았을 뿐이었다. 왜 그러냐고 묻지는 않았다. 내 맘이라고 대답할 게 뻔하니까.

 



 

“아… 취한다.”

 

 

송이는 늦은 밤까지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다들 거의 만취한 상태라 그 속에 껴 있다간 자신도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열이 오른 얼굴을 찬 바람에 식히고 나니 으슬 으슬 춥기 시작했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조건이지만, 얼마 전에 걸렸었는데 설마 또 걸리겠어. 그냥 좀 더 있다 가기로 한다. 이제 이 때쯤이면 예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곧, 이 쌀쌀한 겨울 밤의 공기를 메워주러 올 것이라는 걸.

 

 

“……”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테이블 이곳 저곳에 불려다니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더니, 언제 어디서 또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는지. 놀랍지도 않다. 송이는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 조금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서는 민준을 한 번 슥 돌아보고는, 목도리를 눈 밑까지 끌어올렸다. 내쉬는 숨에 알코올 냄새가 난다. 핑글. 그 냄새에 더 취하는 기분을 느껴 눈을 감았다. 한참 후에 눈을 뜨니 민준이 제게로 손을 내밀고 있다. 손 안의 숙취 해소제. 아무 말도 없이 그것만 대뜸 내밀고 있는 모습이 재밌어서 피식 웃으며 숙취 해소제를 받아들었다.

 

 

“이거 먹을 정돈 아닌데.”

“이제 나이 하나 더 먹으면 필요할 지도 모를 걸요.”

“그런가.”

 

 

짧은, 오늘의 첫 대화. 송이는 음료 병을 만지작거리며 민준을 보았다. 언제나 알 듯 말 듯한 저 표정.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기 때문일까, 내가 의심하기 때문일까. 무심한 것 같은 얼굴에 눈치챌 정도의 미소가 걸리는 걸 기다리고 있다. 눈을 맞추고 있는 시간이 길어짐에도 피하지 않는 건, 언제부턴가 그랬다. 송이가 숙취 음료를 들고만 있자 민준이 빼앗아서 뚜껑을 따주고 다시 손에 쥐어주며 말한다.

 

 

“알아냈어요?”

“…뭘요?”

“약속이요. 무슨 약속 했었는지.”

“아니요.”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하고 생각해보려다 만 그 약속. 궁금하긴 했지만 그렇게 간절하진 않았다. 오히려 알기를 저도 모르게 거부했던 것 같다. 그것마저 알아버리면 더 이상 남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안 궁금한 가보네.”

“…네. 지켰으면 됐어요.”

“……”

 

 

송이는 그렇게 대답을 하고선 음료를 단번에 다 마셔버렸다. 하- 갈증이 풀리는 탄성이 나오고, 그 동안 민준은 혼자 미묘한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송이는 고맙다는 말도 안 했으면서 뻔뻔하게 빈 병을 민준에게 넘겼다. 민준은 그걸 또 말없이 받는다.

 

 

“이제 가야겠다.”

“다들 2차 간다던데요. 노래방.”

“내일 오전에 광고 촬영 있어요.”

“그럼 인사라도 하고 가지.”

“지금 들어갔다간 다신 못 나올 걸요.”

 

 

송이는 도로가로 더 가까이 나가 택시가 오나 고개를 내밀고 살펴보았다. 매니저는요? 놀게 내버려둬요, 올 때도 택시 타고 왔어요. 혼자서 간다는 말에 민준이 걱정스런 투로 물어온다.

 

 

“데려다 줄까요. 차 바로 요 앞에 있는데…”

“……”

 

 

오늘따라 술을 마시지 않은 민준. 어느 여름 밤에도 한 번, 그랬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아니요. 혼자 가도 돼요. 어린 애도 아니구.”

 

 

나라고 왜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이렇게 잠깐이라도 함께 하는 시간을, 좀 더 긴 시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나는 그저 마지막 인사가 두려울 뿐이다. 첫 인사도 없이 나타난, 그와의 마지막 인사가.

 

송이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고선 눈에 보이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바로 앞에 천천히 멈추는 택시 문을 열고 민준을 돌아보았다. 데려다 달라고 할까- 한 번 더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안되겠다 싶어서 얼른 택시에 올라탔다. 쾅 닫히는 문 소리 이후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우리의 길고도 짧았던 여행. 시작은 마음에 들지도 않고 삐걱대기만 하고 맞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도 모자라 과거와도 싸워야 했다. 시나리오에도 없던 이야기들과 싸워야 했고, 그 틈에서 다시 깨어난 마음과도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다시 잠들 수도 없게 되어버렸는데 정작 그는 입을 닫아버렸다. 그런 그와 매일을 마주해야 하는 것, 상처 받으면서도 자꾸 다가가려는 내 자신, 냉랭한 눈에서 보이는 말도 안 되는 희망과 기대… 그럼에도 나는 그가 나의 모든 희로애락이 되어가는 걸 말릴 수가 없었고, 결국 그대로 여행은 끝이 나버렸다.

 

 

 

“어? 천송이씨 맞으시죠? 드라마 정말 재밌게 봤어요.”

“아아, 네. 감사합니다.”

“드라마 끝나서 아쉬우시겠어요. 저도 아쉬운데.”

“네. 끝나서… 아쉽죠.”

 

 


우리는 이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은 새벽 6시에 일어났다가 내일은 점심 시간이 다 되어서야 일어날 수도 있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마음에 드는 구두를 살 수도 있다. 혹은 물을 끓이다 손을 데일 수도 있으며, 어느 날 밤, 잘생긴 남자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대화를 하게 될 수도 있다. 남자친구의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고, 혹시나 하겠지만 그 남자와 같이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처음 들어보는 정치인에 관한 시위에 휘말릴 수도 있고, 뜬금없이 복도에서 옛 친구를 만날 수도 있는데다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설렘을 느낄 수도 있다.

 

철저하게 계획된 시나리오가 아닌, 이렇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화면 속에만 있는 짧은 생의 이름이 아닌 원래의 이름으로. 낯섦이 아닌 익숙함으로. 익숙한 낯섦이 아닌, 낯선 익숙함으로.

 

 

나는 다시, 그가 없는 익숙함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약속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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