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청춘기(靑春記) 10 본문

# 청춘기(靑春記) 10

SCIENCE AND LOVE 2016. 10. 10. 01:29



청춘기(靑春記)

- Youthology

# 10






# 명인대학교, 대운동장




“또 있네.”



밤 9시. 농구 코트의 조명에 의존해 운동장의 일부를 자신의 공간처럼 쓰고 있는 민준을 보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그 모습을 스탠드 한 켠에 앉아 가만히 보고 있는 것도 세 번째이지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나와 기숙사로 가는 길에 운동장을 흘깃 살펴본 것은 그보다 더 많았다. 또 있네, 라는 말은 사실 이제야 있네, 라는 말에 좀 더 가까울 지도 모른다. 



“……”



이제 왜 혼자 축구를-축구라기 보단 공놀이가 더 맞는 말 같지만- 하고 있는지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았다. 대단한 이유가 있지도 않을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저번엔 혼자서 열심히 뛰어다니더니 오늘은 골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만 있다. 축구공을 한 번 높이 띄웠다가 발등으로 받아 툭툭 튕기고 있는 민준을, 송이는 가만히 앉아 턱을 괴고 쳐다보고 있었다. 


어, 나 저거 알아, 트래핑. 축구부 경기 몇 번 좀 봤다고 이젠 그런 것도 안다고. 하나, 둘, 셋… 열 다섯. 민준은 공을 발등 위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열 다섯 번을 튕겼다. 오, 좀 하는데, 싶었지만 민준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다시 시도를 한다. 이번엔 7번 밖에 못했다. 또 다시 도전. 이번엔 14번. 한 번 더 도전. 하나, 둘, 셋… 열 아홉, 스물. 아슬하게 성공한 스무 번째 트래핑 후 공이 저 멀리 날아간다. 은근 승부욕 있나보네. 민준은 천천히 걸어가 공을 줍고는 더 이상 공을 발등 위에 올려놓지 않았다. 


민준은 나름의 목표를 이루고는 한동안 농구 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학생들을 구경하더니, 그대로 운동장 반대편으로 가버린다. 



“……?”



매번 잠깐 앉아있다 기숙사로 들어갔었기에 그가 돌아가는 건 못 봤었다. 기숙사 안 가나…? 기숙사 쪽이 아닌 도서관 쪽으로 사라지는 민준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물론 송이 자신 쪽으로 왔다면 더 당황했겠지만.


송이는 민준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 스탠드에서 일어나 운동장을 빙 둘러 그가 간 방향으로 쫓아갔다.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 옆 중앙 도서관 건물 쪽으로 가니, 민준은 저 멀리 도서관 입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는가 보네. 잠깐 쉬러 나온 건가… 나도 여기 며칠 왔었지만 한 번도 못 봤는데. 



“…어휴, 뭐하는 거래.”



송이는 민준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버린 후에도 멍하니 서 있다 문득 제가 왜 이러고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뭐하는 거야, 스토커야 뭐야. 넋 놓고 있다가 얼마를 까먹은 거야. 잠깐, 아주 잠깐만 바람 쐬려던 거라며… 송이는 환하게 불이 켜진 도서관 안에 가득 찬 사람들 보고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는 몸을 돌려 기숙사로 향했다. 12시까지 공부할 거다, 오늘.









# 사흘 후, 명인대학교, 중앙 도서관



“언니, 자리 잡았어?”

“그냥 메뚜기 뛰려구.”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 찾은 도서관엔 오늘도 여지없이 학생들로 바글 바글했다. 무시무시한 시험 기간이다. 열람실보다는 매점과 휴게실에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지만. 송이는 오늘 열람실 자리 잡는 데에 실패해 그냥 빈 곳을 돌아다니며 공부하기로 했다. 



“공부 많이 했어?”

“아니.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모르겠어.”

“나두. 그럼 언니 공부 열심히 해.”

“응, 너두.”



송이는 도서관 입구에서 동기와 짧게 인사를 나누고 열람실 안으로 들어갔다. 빈 자리는 많은데 다들 책만 펼쳐놓고 주인은 없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 한바퀴를 둘러보았다.



“……”



도서관 지하에 3개로 나뉘어진 일반 열람실 중 제 3 열람실부터 들어간 건, 어제와 그제 모두 이 곳에서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제 3 열람실 문으로 들어가 가장 안쪽 작은 창문이 있는 구역. 350번에서 380번대 좌석. 매번 똑같은 곳에 앉는 건 아닌데 민준은 이틀 전에도, 어제도, 오늘도 대충 이 근처에 앉아있었다. 민준이 중앙 도서관으로 들어간 걸 본 다음 날, 오늘처럼 열람실에서 그를 보았었다. 그를 찾으려 일부러 1 열람실부터 3 열람실까지 다 둘러본 건 절대 아니지만, 마침, 우연히 말이다. 아무튼. 송이는 오늘로서 민준이 이 쪽 자리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결론을 내렸다. 세 번이면 꽤 신뢰도가 높은 통계이니까. 


이번엔 그가 앉은 곳과 같은 열에 빈 자리가 있었다. ‘6시부터 8시까지 저녁 식사.’ 라고 부재 시간을 알리는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책상에 냉큼 가방을 올렸다. 저녁을 2시간이나 드시나. 어쨌거나 첫 번째 메뚜기는 성공적. 송이는 의자에 앉아 책과 노트, 필통을 꺼내고는 슬쩍 허리를 젖혀 더 안 쪽에 앉아있는 민준을 보았다. 하나, 둘, 셋… 여섯, 일곱 옆 자리. 뭐 거의 끝과 끝이다. 공부를 하고 있는 민준은 귀와 어깨 밖에 안 보인다. 역시 우리과 엘리트는 열공 중이시구나. 



“……!”



그러다 갑자기 민준이 의자에서 일어나길래 송이는 깜짝 놀라며 얼른 허리를 숙여 책상 가림막에 머리를 숨겼다. 괜히 필통에서 아무 펜이나 꺼내 노트에 글씨를 끄적이는 척했다. 이어 등 뒤로 민준이 지나가는 인기척이 느껴지고, 한참 있다 고개를 드니 열람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휴우…”



뭐가 안도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숨을 내쉬고는 책장을 넘겼다. 민준은 5분쯤 지나 돌아왔고, 송이는 그때서야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첫 시험이니까 무조건 열심히 해야 돼. 잘 해야지. 잘 할 거야- 이런 결심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만.





2시간 정도 지났나. 송이가 화장실에 1번, 물을 마시러 1번 나갔다 왔는데 민준은 그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겹지도 않나. 1등 하려면 저래야겠지만. 


원래 자리 주인은 8시까지 오겠다더니 8시가 넘어도 오지 않았다. 저녁 먹고 후식 먹고 수다 떨다보면 시간 금방 가지, 특히 시험 기간엔 더. 송이는 그 사람이 돌아오면 그 때 일어나기로 하고 계속 그 자리에서 공부를 했다. 










#



“저기요.”

“……!”



아. 난 분명 수학 공식을 외우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언제부터 잔 거지. 아예 엎드려 팔까지 베고 편하게도 자고 있었다. 여기 제 자리인데… 라고 작게 말하는 주인은 3시간 반 만에 나타났다. 


송이는 정신이 덜 차려진 채로 책상 위를 정리했다. 대체 얼마나 잔 거냐. 송이는 자괴감을 느끼며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아…”



비몽사몽한 가운데에 다른 좌석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거운 머리를 버틴 팔이 저렸다. 그러다 일곱 자리 만큼의 옆 책상이 비어있는 걸 발견했다. 책 한 권 없이 깨끗이 비워진 책상. 민준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



뭐야, 밤 샐 기세로 공부하더니 되게 일찍 갔네. 빈 책상을 보며 잠깐 서 있는 사이, 다른 학생이 와서 그 자리에 앉는다. 에이, 저기 앉으려고 했는데. 송이는 아쉬운 마음으로 근처를 더 둘러보았다. 밤이 되니 오히려 학생들이 더 꽉 차 있었다. 그냥 기숙사 들어가서 할까. 기운이 빠져 더 이상 도서관에 있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하는 수 없이 송이는 그대로 도서관을 나왔다. 



“하아, 언제 공부하지.”



도서관 밖으로 나와 조금 찬 바람을 맞으니 완전히 잠이 깨는 것 같다. 어수선한 마음이 영 한심스럽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더 한심스러운 생각을 한다. 도서관을 나와 운동장 쪽으로 향할 수록 마치 학습된 것처럼 뭔가 기대하게 되는 것 말이다. 



“……”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민준은 오늘도 운동장 축구 골대 앞에 있었다. 주기적으로 공을 안 차면 입에 가시가 돋나. 도서관에서도 그의 의자 아래 축구공 가방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멀리 있어 누군지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냥 알았다. 유일한 조명이 되어주는 농구 코트엔,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1팀 밖에 없었다. 그는 불빛이 비추는 작은 영역 안에서만 발 끝으로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친구들이 다 가버린 놀이터에서 홀로 남아 아쉬움을 털어내지 못하는 어린 아이처럼. 


보지 말고 그냥 들어가자, 송이는 혼자 중얼거리며 기숙사 방향으로 걸었다. 그렇지만 저절로 눈길이 향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민준은 지난 번처럼 발등 위에 공을 올려놓고 공을 튕기기 시작한다. 오늘은 20번을 넘길 수 있으려나. 하나, 둘, 셋, 넷… 민준이 트래핑하는 걸 지켜보고 있으니 송이는 어느새 스탠드 앞에 서 있는 저를 찾을 수 있었다. 놀라운 학습의 능력이란. 


도민준이 20번을 넘기면 가는 거야. 딱 그것만 보고 가는 거야. 


다시 하나, 둘, 셋…


그러나 민준은 그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매번 20의 문턱 앞에서 공을 떨구었다. 답답하긴.


여느 때처럼 스탠드의 어두운 쪽에 전공책을 깔고, 턱을 괴고 앉아 민준의 발 끝만 보며 속으로 숫자만 세고 있을 때,



“천송이!!”

“……!?”



갑자기 운동장에 크게 울려퍼진 제 이름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민준이 정확히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농구공이 바로 옆으로 탕-하고 튕겨져 나간다. 



“…악!”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공은 송이를 아슬하게 피해가 뒤 쪽으로 굴러간다. 



“하아…”



한참이 지나 누군가가 달려오는 발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농구 유니폼을 입은 한 남학생이 급히 뛰어와 죄송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을 한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하니  한 번 더 사과를 하고 공을 주우러 간다. 



“…놀래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어느새 민준이 스탠드 위로 올라와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아, 깜짝이야. 공에 맞을 뻔한 것보다 더 놀랬네. 송이는 뭔가 들켰단 생각에 약간 민망함을 느꼈다. 시선을 피하고는 농구 코트 쪽을 가리키며 구시렁댔다. 



“에이씨, 농구를 하는 건지, 야구를 하는 건지.”

“그렇게 멍 때리고 앉아있음 어쩌잔 거야?”

“아니이… 몰랐지, 난.”



민준은 타이르듯 송이를 탓했다. 난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쳇. 



‘천송이!’



공이 날아오는 걸 알고 그는 분명 그렇게 이름을 불렀다. 송이는 한숨을 크게 쉬며 옆에 털썩 앉은 민준의 눈치를 보았다. 그도 조금 놀란 표정인 것 같다 느낀 건… 여기가 어두워서일까…



“…나 있는 거 알았어?”

“…맨날 귀신처럼 앉아있는데 어떻게 모르냐.”

“아……”



몰래 보는 것도, 비밀스러운 관중도 아니었네. 



“…음… 난… 그냥 지나가다가 보여서. 바람도 쐴 겸.”

“누가 뭐래?”

“……아니.”



변명이 너무 구차했나. 하지만 정말 그 이유 말곤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지나가다가 보여서, 보이길래 보았을 뿐.



“……”

“……”



송이는 나란히 앉아있는 이 어색함의 무게를 견디며 민준이 저를 탓했던 것처럼 그를 원망했다. 그러길래 눈에 보이지만 않았어도. 왜 눈에 띠여가지고. 당연히 그걸 말로 꺼낼 순 없었지만.


무거운 어색함을 먼저 깨트려준 건 민준이었다.



“기숙사 들어가려던 거 아니었어?”

“어…”

“…가자, 그럼.”

“응?”

“들어가자고.”

“어어, 응. 가자.”



먼저 일어나는 민준에, 송이는 얼른 따라 일어났다. 성큼 앞서나가는 민준의 걸음에 맞추려 애썼다. 



있잖아, 왜 밤에 혼자 축구해? 그냥, 바람 쐬려고. 시험 기간이라 게임도 없고. 답답하기도 하고. 아아, 그렇구나. 앞으로 운동장 근처에 있을 거면 조심 좀 해. 넋 놓고 있지 말고. 응, 알았어. 



운동장에서 기숙사로 가는 조용하고 한적한 캠퍼스의 밤 길- 긴 건지, 짧은 건지 애매한 길을 가는 동안 대화는 고작 그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기숙사에 가까워질 수록,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고 있다는 거였다. 더 이상 그의 보폭을 맞추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시험이라는 걱정이 좀 들긴 했지만, 고작 이 정도는 괜찮을 지도 모른다. 










# 또 며칠 후, 명인대학교, 중앙 도서관



중간고사 3일 전, 총력전이다. 하지만 전공책을 달달 외우는 것보다 어려운 건 도서관 열람실 자리를 하나 맡는 것이다. 기숙사 방에서 공부하는 건 침대의 유혹이 너무 강해 진작에 포기했다. 진짜는 때와 장소의 핑계를 대는 법이 없지만. 


송이는 오늘은 반드시 열람실 많은 자리 중 하나를 얻어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새벽 5시 반에 기숙사를 나섰다. 열람실 좌석 중 1/3은 인터넷 예약을 받고 나머지 2/3은 새벽 6시부터 선착순으로 발권할 수 있는데, 인터넷 예약은 매번 시간을 까먹거나 클릭 전쟁에서 질 때가 대부분이었다. 어차피 하루 종일 공부를 해야하니 새벽부터 나오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도서관엔 이미 많은 학생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래도 내 자리 하나 쯤은 있겠지, 하며 기다리다 다행히도 발권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제 3 열람실 안 쪽 자리 쯤에.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게 대체 얼마만인지. 송이는 일어나자마자 대충 씻기만 하고 부랴부랴 왔던지라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았다. 지금이 6시 반이니까 새벽 2시-시험 기간엔 기숙사 문 닫는 시간이 2시로 연장된다-까지, 밥 먹고 수업 하나 듣고 오면 적어도 15시간은 공부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했다. 실천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최대한 그렇게 하려는 노력의 시작으로, 잠을 깨우기 위한 커피를 사러 나갔다. 학교 후문 근처에 시험 기간이면 새벽부터 나온다는 커피 트럭을 찾아갔다. 달달한 모카 라떼를 한 잔 샀다. 그리고 열람실 안으로 돌아오니, 



“…어.”



3 열람실 안 쪽, 송이의 자리 근처에 익숙하지 않은 듯 익숙한 넓은 등이 눈에 띄었다. 바른 자세, 왼손에 쥔 펜. 오늘은 축구공 가방이 없다. 그 날 이후, 늦은 밤 혼자 운동장에 있는 민준을 볼 수 없었다. 아마 다음 기말고사 때 즈음에나 볼 수 있을 지도. 


송이는 아는 척을 하려다 말을 걸기도 좀 애매해서 그냥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일찍 나왔네. 아침은 먹고 나왔나. 인터넷 예약하고 왔나? 아님 현장 발권했나. 쟨 안 졸린가? 꼭두새벽부터 공부가 되나?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오전에 2시간짜리 수업을 하나 듣고 점심까지 먹고 도서관으로 돌아오니 책상 앞에 앉자마자 잠이 쏟아진다. 알기론 민준도 같은 시간에 수업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밥은 먹기나 한 건지 민준은 벌써 자리에 앉아있었다. 쉬지도 않나.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책상 위만 보는 민준의 페이스를 쫓아가다간 먼저 지쳐 나가 떨어질 것 같았다. 


졸리면 안 돼, 절대. 송이는 제 뺨을 몇 대 두들겼다. 강의 자료를 보고 있지만 멍한 머리에 들어오는 글자가 없다. 잠깐 쉬다 올까, 아님 딱 10분만 잘까. 아니야, 10분이 30분이 되고, 1시간이 되니까 그건 절대 안 돼. 송이는 연신 하품을 해대며 몰려드는 졸음을 참았다. 



“어, 그래, 이거.”



억지로 강의 자료 인쇄물을 넘기다 빨간 펜으로 커다랗게 별표를 그려놓은 페이지를 보았다. 잘 이해가 안된다고 나중에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 여쭤봐야지, 하고 있다가 깜빡한 내용이었다. 지금 교수님을 찾아뵐 순 없으니 대신 우리 과 엘리트한테 물어봐야지. 


송이는 민준에게 물어볼 참으로 책상 가림막 너머로 빼꼼 고개를 들었다. 아, 근데 처음에 뭐라고 하지. 아침부터 봤지만 인사도 안 했는데. 안녕, 방해해서 미안한데, 뭐 좀 물어봐도 될까? 어, 도민준, 여기 있었네. 아, 참. 내가 모르는 게 있어서 그런데, 알려줄 수 있어? 아, 이건 너무 어색하다. 그냥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물어봐야지. 



“……?”



대사까지 생각해 놓고 의자를 뒤로 밀어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 전에 먼저 다른 누군가가 민준의 자리로 다가간다. 과 강의실 근처에서 몇 번 본 것 같다, 한 학번 위, 민준과 동기인 여학생. 민준을 보고 반가워하더니 서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뭐라 뭐라 몇 마디를 더 나눈다. 뭐야, 왜 도서관에서 대화를 하고 그래, 그것도 저렇게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송이는 도로 자리에 앉았지만 계속 힐끔, 그 쪽을 쳐다보았다. 그 여학생도 손에 든  책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묻는 듯 했다. 민준은 망설임 없이 책을 봐준다. 와, 내가 물어볼 땐 바로 안된다고 하더니, 참 나. 왠지 친절해보이기까지 하는 민준의 표정을 보니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



여기서 말하긴 뭐했는지 두 사람은 열람실 밖으로 나간다. 뭘 그리 많이 알려주려고 밖에까지 나가고 그러신대- 송이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다시 책상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대충 그린 별표가 홀로 빨갛게 빛나고 있다. 뭐라고 말을 걸지 그딴 고민 같은 거 하지 말 걸. 타이밍이란. 나 혼자 하지 뭐, 송이는 한숨을 쉬고 강의 노트의 그 부분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



뒤늦게 후회하고 자책해봤자 이미 지나간 시간은 아무 소용이 없다. 쓸모가 없다.



“아이씨…”



또 잤다. 분명, 허리가 좀 쑤셔서 잠깐, 아주 잠깐만 책상 위에 기대려고 했던 건데... 그대로 잠들었다. 눈을 떴다가 보이는 건 온통 책상의 나무색 뿐이어서 화들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1시간도 넘게 잤다. 천송이 네가 미쳤구나, 지금 시험이 며칠 남았는데 퍼질러 잠이나 자다니. 송이는 뻐근한 목을 뒤로 젖히며 좌절했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건 반경 5m 내에 엎드려 자고 있는 학생이 넷 정도는 된다는 거다. 졸릴 시간이긴 하지. 아침에 일찍 일어났으니 적당한 낮잠은 오히려 집중력에 도움이 될 거야. 적당히는 아닌 것 같다만. 



“……?”



최대한 낮잠에 대한 긍정적 효과에 대해 생각하며 음료수나 마실까 했는데 참 신기하게도 캔 콜라 하나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것도 빨간색으로.



“뭐지…”



송이는 캔을 들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가 언제 주고 간 거지, 라는 의문 후에 무슨 생각에서인지 대각선 반대편을 건너다보았다. 여전히 똑같이 까만 민준의 정수리. 에이, 설마, 정말 그럴 거라 생각하는 거니?



“……”



그렇지만 제가 콜라, 그것도 이 브랜드의 콜라만 마신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건, 아마 이 제 3 열람실 안에선 도민준 밖에 없을 것이다. 송이는 아직 차가운 캔을 볼에 갖다대며 설마하는 마음을 정리해보았다. 눈을 껌뻑, 껌뻑. 


모르겠다. 일단은 목이 마르니까 콜라를 좀 마셔야겠다. 송이는 망설임없이 캔 뚜껑을 땄다. 딱- 하는 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 눈치가 좀 보였다. 콜라를 마시다보니 완전히 머리가 또렷해진 기분이다. 역시. 단숨에 콜라를 다 마셔버린 송이는 재차 민준이 앉은 쪽을 보았다. 마침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람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고민 따윈 길게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래서 송이도 얼른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았다. 그 땐 이미 혹시나, 하는 의심이 확신이 되고 난 후였던 것 같다. 



“도민준!”



복도로 나오자마자 그를 불러세웠다. 민준이 뒤를 돌아본다. 송이는 빈 콜라 캔을 들고 가까이 다가갔다. 인사는 생략하고, 본론부터.



“있잖아, 이거 말이야…”



동시에 시선이 닿은, 달콤하고 톡 쏘는 무언가가 들어있을 것이 기대가 되는, 빨간색 작은 캔.



“이거…”

“나 아냐.”

“……어?”

“나 아니라고.”



채 뒷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민준이 대답을 한다. 마치 이 캔 하나만 보고도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이었다는 말에 조금 당황했다. 준비했던 말은 필요가 없어졌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아직 잠에서 깬 지 얼마 안되어서 그럴 것이고.



“…누, 누가 너래? 혹시 누가 준 건지 아냐고 물어보려고 한 건데?”

“내가 어떻게 알어.”



송이는 되레 언성을 높여 아닌 척 대꾸했다. 민준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썩 친절하지 않은 말투로 말하고는 쌩하니 뒤를 돌아 갈 길을 간다. 



“……”



나쁜 놈. 왜 저래. 아니면 그냥 아니라고만 하면 될 것이지 뭘 그리 정색하고 그러는지. 송이는 잔뜩 못마땅하게 민준의 뒷모습을 노려보고는 쓰레기통 앞으로 갔다. 괜히 마셨어, 하고 캔을 버리려던 찰나, 캔 밑바닥에 붙은 포스트잇 한 장을 발견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연락처를 남깁니다.’ 



그 아래 쓰인 좌석 번호와 전화 번호. 자기 자리 근처의 좌석이긴 했다. 하필 추하게 자고 있을 때 이런 걸 놓고 갈 건 뭐람. 송이는 자신에게 이런 호의(?)는 난생 처음이었지만 기분이 썩좋거나 그러진 않았다.



“…에이.”



전부 다 버리려다 말고 한동안 메모를 쳐다보다, 빈 캔만 구겨서 버렸다. 열람실 안으로 들어가 메모에 쓰여진 자리를 찾다 어떤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목례를 하는 그가 콜라를 준 사람이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송이는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당황해서 급히 자리에 앉아버렸다. 


공부나 하지 왜 도서관에서 이성관계를 만드려는 거야, 참 나. 송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문자라도 해 볼까 고민했다. 얼핏 보았지만 꽤 괜찮게 생겼던데. 그러다 그런 것도 시험 끝나면 하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잠은 확실히 다 깼네. 네 덕분에.







#



또 배불러서 졸릴까봐 저녁도 간단히 먹고 오후 6시 이후로는 마시지 않는 커피도 또 마셨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봐야 할 것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오늘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 같은 것들은 의지로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조금 과장하면 도민준이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는 지도 잊었다. 다음엔 3 열람실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12시 20분 전, 아직 기숙사 문이 닫히는 시간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2시간 정도만 더 하고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슬슬 눈이 침침하고 피곤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 잘 버텼으니 딱 2시간만.



“흐아암-”



왜 이렇게 잠이 오지. 평소 취침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졸음이 쏟아졌다. 아, 나 오늘 새벽 5시에 일어났지. 그럴만도 해. 송이는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



에이씨. 하필 입을 쩌억 벌리고 있을 때 반대편의 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송이는 바로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팔을 내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를 정리하며 곁눈질로 민준을 보니, 벌써 기숙사로 돌아갈 모양이다. 어깨에 가방을 걸쳐매고 마지막으로 책상 위를 정리한 민준은, 다시 한 번 송이를 본다. 



“……?”



왜 보는 거지. 약간 미간이 구겨진 채로 쳐다보는 민준의 의도를, 이 거리에서는 파악할 수가 없다. 민준을 따라 인상을 찌푸려보지만 그가 뭔갈 말해줄 리도 없고. 오늘 오후의 무뚝뚝한 말투가 떠올라서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심기로 민준을 쳐다보다 먼저 고개를 돌렸다. 


좋겠다, 벌써 집에 가고. 역시 잘하는 애들은 막 새벽까지 공부하고 안 그렇다니까. 하지만 재수는 없다. 아까 나 쳐다보던 게 넌 아직도 공부할 게 많이 남았냐, 뭐 이런 느낌이었달까. 하여간 이상해. 송이는 삐죽 내민 입술로 불만을 표하고 저녁 내내 풀던 물리 문제를 마저 풀기 시작했다. 


문제를 푸는 것도 잠시, 연필 끝이 제 맘대로 컨트롤 되지 않아 다시 허리를 폈다. 스트레칭을 좀 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열람실 안은 많이 비어있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네. 12시면 한창 아닌가, 하며 책상 위에 올려둔 손목 시계를 보았다. 



“…뭐야?”



아까 11시 반이 좀 넘어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7시 20분? 도저히 말이 안되는 시계 바늘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여태 시계를 거꾸로 두고 봤다는 걸. 


송이는 깜짝 놀라 손목 시계를 집어 제대로 보았다. 1시 50분. 기숙사 문이 닫히는 2시 10분 전이었다. 



“으아아, 어떡해.”



여기서 기숙사까지는 걸어서 15분. 달리면 10분 내로 가능할까? 송이는 일단 책상 위의 짐들을 일단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으며 기숙사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했다. 2시면 정확히 문이 닫히고, 그 때 못 들어가면 다시 문이 열리는 아침까지 꼼짝없이 들어가지 못한다. 그 말은, 이 추운 새벽에 갈 곳 없이 발만 동동거리고 있어야한다는거다. 



“미쳤다, 미쳤어.”



송이는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소란스럽게 가방을 챙겨 열람실을 뛰쳐나갔다. 지하에서 단숨에 올라와 말 그대로 캠퍼스를 가르며 최선을 다해 뛰었다. 


아아. 어쩐지 엄청 피곤하더라. 12시가 아니라 2시였어! - 송이는 민준이 저를 그렇게 보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2시 다 돼가는데 왜 기숙사에 안 들어가냐는 거였어. 도민준, 치사하게 지만 시간 맞춰 들어가고. 너무하네, 진짜. 



“하아…하…”



어떻게든 잠은 내 침대에서 내 이불 덮고 자겠다는 일념으로 뛰었다. 운동장을 지나고 본관을 지나 넓은 호수 앞과 학생 회관도 지나도 아직 한참이다. 하필 도서관과 기숙사가 캠퍼스 거의 끝과 끝에 있을 게 뭐람. 기숙사 입구가 저 멀리 보이고,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았지만 도저히 더 뛸 수가 없어 잠시 멈춰서 숨을 골랐다. 


그렇지만 시간은 1시 58분. 숨 쉴 틈도 없다. 송이는 무거운 발을 겨우 디뎌 다시 달렸다. 아… 제발. 경비 아저씨. 평소에 인사나 잘 하고 다닐 걸. 그래도 한 몇 분은 봐주지 않을까? 열심히 공부하다 온 여학생이 집에 못 들어가고 있는데? 약간의 기대를 하며 고등학교 체육 실기 시험 때보다 더 열심히 뛰었다. 


기숙사로 들어가는 골목이 좁고 가로등도 몇 개 없는 곳이라 평소에 무섭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도 안 들었다. 기숙사 정문의 불빛이 몇 걸음 안에 보이자 다리가 풀려 멈춰섰다. 아니길 바랐지만 2시 3분. 


경비 아저씨가 큰 유리 문을 걸어 잠그고, 문을 흔들어 잘 잠겼나 확인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가신는 모습이 보인다. 



“아아…”



안 돼애. 송이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삼키고 문 앞에 가서 부탁이라도 해 볼 생각으로 절로 숙여진 허리를 일으켰다.



“……!?”



잠들었거나 책상 앞에 앉아있거나. 아무도 없는 기숙사 앞의 새벽. 겨우 몇 분 차이로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한 건 저 혼자만은 아니었다. 



“……”



건물 입구에 가만히 서서 이 곳과 통하는 유일한 길 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아까 도서관에서 챙겨나간 가방을 그대로 매고 있었다. 그 길에는 분명, 송이 저 말고 다른 지각생은 없다. 


그는 30분도 훨씬 전에 나갔고, 저처럼 뛰어와서 숨을 헐떡이고 있지도 않았다. 새벽 2시의 문이 잠기는 걸 빤히 보고만 있었다. 



"하아……"



아직도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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