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청춘기(靑春記) 9 본문
청춘기(靑春記)
- Youthology
# 9
[bgm] Clazziquai - 잠 못 드는 밤
# MALIGN LAKE, JASPER
“너 왜 자꾸 그 쪽으로 가!”
“내가 그러려는 게 아니라 바람 때문이라니까?”
“하.. 이거 자꾸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아.”
가는 길이 평화로웠다면 돌아오는 길은 전쟁 같았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갔던 건 바람을 잘 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려니 그 바람 때문에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여유를 만끽하고 풍경을 감상하기는커녕, 이 커다란 호수 위에 표류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있는 힘껏 노만 저었다.
“우리 제 시간에 갈 수는 있을까?”
“제 시간에 가는 것보다 무사히 갈 수 있을 지를 걱정해.”
“아아… 도민준, 나 팔 아파.”
“잠깐 쉬어. 내가 할 테니까.”
맞바람을 뚫고 열심히 노를 저어봐도 아주 먼 곳의 산 봉우리처럼 선착장은 가까워지질 않는다. 게다가 둘이 힘이라도 맞지 않으면 보트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린다. 송이가 하도 힘들어하는 것 같길래 잠시 쉬라고 하긴 했지만 민준 혼자서 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으니 송이도 오래 쉬진 못했다. 민준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아까 근처에 있었던 서양인 부부와 어린 아이, 셋이 탄 배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도 고생을 하고 있거나 포기했음이 분명하다. 송이는 계속해서 배를 빌린 시간을 넘기면 추가 요금을 내야하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 민준은 돈 더 나오면 자기가 내겠다고 했지만, 송이는 너도 돈 없잖아- 라며 거절한다. 그럴거면 돈 얘길 하질 말던가.
“여기 근처에 보트 대고 그냥 걸어갈까? 가서 사정 말하고.”
“아냐, 나 괜찮아.”
“갈 수 있겠어?”
“응, 나 보기보다 튼튼해.”
분명 송이는 쉬지 않고 노를 저어야 하는 게 힘에 부쳐보였지만 괜찮다고만 했다. 먼저 타자고 졸랐는데 이제와서 못 가겠다고 할 수가 없어 쓸데없이 고집 부리는 게 뻔하다. 민준은 걱정 반, 어쩔 수 없음 반으로 송이에게 맞춰 같이 노를 저었다.
갈수록 말은 없어졌다. 제대한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저도 그러한데 송이는 보통 힘든게 아니겠다 싶었다. 그냥 타지 말자고 할 걸. 그렇지만 부탁하던 송이의 그 표정을 생각하면 아마도 다시 거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준은 그녀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하고선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과 물살에 깊은 호수 가운데 쪽으로 밀려들어갈까봐 쉬지도 못하고 계속 계속 노만 저었다. 올 때보다 몇 배는 더 긴 여정 같았다.
“이제 좀만 힘내자.”
말이 없던 송이가 조금 밝아진 목소리로 외친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출발했던 선착장이 정말로 가까워져 있었다. 민준도 반가운 마음으로 좀 더 힘을 내었다. 100m, 50m, 10m...
“하, 드디어 다 왔다!”
“고생했어.”
절대 오지 못할 것 같았던 선착장에 드디어 도착했다. 불안했지만 무사히 배를 댄 후, 민준은 먼저 내려서 송이가 내리는 걸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송이는 선착장에 나와 있는 직원이 내민 손을 덥석 잡고 먼저 뛰어내린다. 아, 그래. 민망한 손을 뒤로 하고 답답한 구명 조끼를 벗었다. 열심히 움직인 건 팔이었는데 송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가지곤 비틀대며 앓는 소리를 낸다. 맞바람이 불면 힘들지도 모른다는 걸 경고해주지 않은 직원에게 송이는 억울하다는 듯 it was so hard because of wind! 라고 토로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수염으로 덮인 그 직원은 허허실실 웃으며 이런 일이 자주 있다고 했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래.
정말 이런 경우가 흔한 건지 대여 시간보다 늦은 것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다. 송이는 다행이라며 걱정하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밖으로 나선다. 그곳을 나오자마자 앞에 보이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으아,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그러게, 돌아올 때 맞바람이 문제일 줄이야.”
“아이고, 내 어깨야.”
“너는 뭐 제대로 젓지도 않더만.”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민준이 옆에 따라 앉으며 한마디 하자 송이는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어필하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린다. 온 몸에 진이 다 빠진다며 축 늘어져있던 송이는 그래놓고도 한다는 말이,
“그래도 재밌었다, 그치?”
이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겠다며 다시는 이런 거 안 타겠다고 했던 송이가 금세 생글 웃으며 재밌었다고 말하고 있다. 민준은 다시 어린 아이로 돌아온 송이의 설렌 표정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어, 그래 참 재밌었다. 너와 함께 올 거라곤 단 0.1%의 확률도 생각하지 않았던 이 곳에서의 시간이, 신기하게도 참 즐거웠다.
“하아……”
민준은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머 멀리 호수에 떠 있는 몇몇의 보트를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의 고요한 물결 위에 마주 보고 앉은 자신과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저들은 곧 돌아가는 길에 꽤나 고생을 좀 하겠지. 그러나 저 순간 만큼은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고민도 없이, 웃고 있었으리. 민준은 옆에서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송이를 돌아보았다. 왜? 라고 눈을 들어 묻는 그녀를 보아도, 아직은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
“아, 잘 놀다 간다.”
“고생만 한 건 아니고?”
“에이, 이 정도는 고생도 아니지.”
민준과 송이 두 사람은 호수 앞 벤치에서 한참을 쉬다 다시 돌아가는 중이었다. 송이는 이번에도 자기가 운전하겠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됐다고 한 번 사양하니 바로 알았다고 조수석에 올라타더라. 올 땐 차를 얻어 타는 것에 조금 미안해하는 기색이었지만(전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젠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다. 송이는 이번 여정에 대해 제법 만족한 얼굴로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래야 기억에도 남고 그러는 거지, 뭐.”
“…어.”
아마도 생생하게 남게 되겠지. 분명 좋은 기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후회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 예전처럼. 그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달려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순 영어 밖에 안 들리네-“
“캐나다니까 영어 밖에 안 나오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송이는 마음에 드는 걸 찾지 못하고 그냥 음악이 나오는 어느 채널에 멈추고는 뒤로 젖힌 시트에 기대 앉는다. 흐르는 노래는 오래된 컨츄리 풍의 팝송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달리며 듣는 노래 치곤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민준은 오는 길에도 보았던 새까맣게 탄 숲들 사이를 속도를 높여 달렸다. 아직 밖은 밝았지만 시계를 보니 벌써 5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저녁은 뭘 먹지, 아니, 뭘 먹을지 고민하기 전에 같이 먹자고 해도 되겠지, 굳이 말 안 해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려나. 자연스러운 게 어딨어. 민준은 운전대를 잡고선 혼자 마음 속으로 실랑이를 벌였다. 물어보자, 못 물어볼 건 뭐야. 별 것도 아닌데.
“천송이, 저녁 뭐 먹을까?”
“……”
“……?”
별 것도 아니었지만 나름의 다짐이 필요했던 질문에 송이는 반응이 없다. 옆을 돌아보니 송이는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잠자코 눈을 감고 있었다. 노를 젓느라 온 힘을 다 쓰더니,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 짧은 사이 말 거는 것도 못 알아차릴 정도로 깊게 잠이 들다니.
“……”
그녀를 굳이 깨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옆에서 재잘대지 않으니 정신 사납지 않아서 좋다. 민준은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팝송이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껐다. 뭐라는 건지, 노래도 되게 촌스러워. 그리고 브레이크를 살짝 밟아 차 속도를 줄였다. 길이 꽤 구불구불하게 나 있기 때문이다. 야생동물 주의 표지판을 보았기 때문이다.
# JASPER DOWNTOWN
“......”
말린 호수에서 다시 재스퍼 다운타운으로. 1시간보다 조금 긴 시간을 달려오는 동안, 송이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내 꾸벅 꾸벅 조는 게 상당히 불편해보였지만 운전 중이라 뭘 어떻게 해줄 수도 없었다. 다운타운의 한가한 길가에 차를 세웠지만 그 때까지도 송이는 말 그대로 꿀잠을 자고 있었다.
깨워야하나, 이대로라면 한없이 잘 것 같은데. 민준은 시동을 끄고 송이를 부르려다 말고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밖으로 나갈까 했지만 그러다 깰 것 같았다. 가만히 있기도 뭐해 할 것을 찾다 뒷좌석에 둔 카메라가 떠올랐다. 민준은 안전벨트를 풀고 송이의 어깨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히 몸을 돌려 뒷자리의 카메라로 손을 뻗었다. 숨소리도 조심스럽다.
전원을 켜고 아까 말린 호수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았던 풍경은 솔직히 눈으로 담는 것과는 달랐다. 절대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말린 호수의 사진을 몇 장 넘기니 뱃머리에 앉은 송이의 뒷모습이 나온다. 그 뒤로는 거의 대부분이 그녀의 사진이다. 뒷모습만 나온 사진. 눈 앞에 보이는 건 천송이뿐이었으니.
‘뭐야, 왜 몰래 찍어.’
‘너 찍은 거 아니거든.’
그 중 단 하나, 송이의 얼굴이 나온 사진이 있다. 그나마도 옆모습이지만. 무섭다면서도 기어이 뒤로 돌아 마주 보고 앉은 송이가 잠시 딴 곳을 보는 사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금세 들키고 말았지만.
민준은 사진 속 그녀를 직접 보고 있었던 그 시간을 생각했다. 솔직히 눈으로 담는 것과는 다르다. 절대 다 표현할 수가 없다.
“......”
그건 분명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여어, 도민준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같은 과이자 축구부 선배인 종열과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인사 정도만 하는 정말 ‘선후배’ 의 사이. 그를 오랜만에 만난 건 지난 학기 축구부 모임에서였다. 연례 행사로 치뤄지는 졸업한 OB 멤버들과 재학생 YB 간의 경기가 있었던 주말이었고, 보통은 잘 가지 않는 뒤풀이 술자리에 참석했던 날이었다. 그 곳에서 축구 경기 중엔 못 봤던 종열 선배를 만났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만남이었음에도, 민준은 제일 먼저 그녀를 떠올렸다. 그 이름을 생각해도 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찌할 수도 없었다.
군대를 가고 두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였나, 친구에게서 송이와 종열 선배가 사귄다는 얘길 스치듯 들었었다. 그 때가 거의 3년 전이었고 그 뒤론 소식을 들을 일도, 물을 일도 없었다. 듣고 싶지도 묻고 싶지도 않았다는 것에 가까웠겠지만.
대화를 나누거나 진심도 아닌 안부를 묻는 것 따윈 하고 싶지 않았지만 종열은 왜 술을 마시지 않냐며 민준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괜한 경계심과 씁쓸함은 오히려 제 자신에 대한 고집을 부리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묘한 기분을 느낄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 자체가 한심한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대꾸해주고, 적당히 웃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쿨하고 싶었던 것 같다. 쿨해야 할 대상도, 쿨한 게 정말 뭔지도 몰랐으면서.
‘야, 너 여행 엄청 좋아하는구나? 나도 이번 여름에 여행 가려다가, 사정이 있어서 급하게 취소하게 됐어.’
‘아, 그래요?’
‘도민준 넌 또 계획 있어?’
‘아니요, 아직…’
‘캐나다 어때, 내가 가려던 데가 캐나다였는데.’
‘...캐나다요?’
작년 한 해 내내 휴학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놀아도 보고, 많은 걸 해보아서 아쉬울 것도 없었다. 3년 만에 복학을 해서 지난 학기 전공 공부를 따라가기에도 벅차 이번 여름 방학 땐 공부에 좀 더 신경 쓸 생각이었다. 게다가 남은 알바비도 그리 많지 않았고. 그럼에도 갑자기 그 사람의 티켓을 대신 사고, 그 사람의 일정을 대신 하기로 한 건, 그냥 불필요한 객기였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그 얘길 꺼냈더라면 가볍게 거절했을 수도 있었던. 그건 나 답지 않았다 분명… 인정하긴 싫지만 말이다. 여행을 앞두고도 많은 후회를 하였지만 되돌릴 수 없었던 낯선 자존심까지.
“......”
그 이상한 객기가 결국 그녀를 눈 앞에 있게 만들었다. 같은 날 같은 비행기에, 같은 기차 옆 자리에, 같은 곳에, 같은 시간에… 같은 이 순간에.
민준은 여기가 어딘지도 언제인지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송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작 21살이었던 모습.
“으음…”
이제는 또 고작 25살인 모습이 천천히 눈을 뜬다. 정신을 못 차리고 두리번거리는 그녀는 다 왔냐며 한참 전에 물었어야 할 말을 한다. 어, 방금 도착했어.
송이는 제대로 다 뜨지도 못한 눈을 하고선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켠다. 아이고, 팔이야. 하는 것도 잊지 않고. 민준도 따라 차에서 내려 가볍게 몸을 풀었다. 늘어진 하품과 함께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송이가 민준을 보며 말했다. 머리가 헝클어져있다.
“배고프다.”
“...어.”
“있잖아, 우리도 바비큐 해 먹을까?”
“...밖에서?”
“응, 어제 아네뜨에서 부러웠잖아.”
배를 타자고 말할 때처럼 해맑게 웃으며 하고 싶은 걸 말하는 송이.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항상 한 발 늦는다. 항상 그게 미안하다.
#
“대박! 엄청 싸다!”
“생각보다 얼마 안 하네.”
다운타운에 있는 마트는 꽤 규모가 컸다. 송이는 제일 먼저 카트를 빼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호수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던 가족들이 계속 기억에 남았던 건지, 민준의 동의에 송이는 또 한껏 들뜬 것 같았다. 제일 먼저 Meat 코너에 가서 고기값을 확인한 송이는 한국보다 훨씬 싼 가격을 반가워했다. 내내 돈이 어쩌고 투덜댄 게 신경 쓰였는지, 말은 안 했지만 혹시 가격이 비쌀까봐 걱정했던 모양이다. 2명이 먹을 양에도 15 캐나다 달러 정도 밖에 하지 않아 은근슬쩍 메인 메뉴를 돼지고기에서 소고기로 바꾼다.
“등심 좋아해, 안심 좋아해?”
“등심.”
“에이, 난 안심 좋아하는데. 안심이 훨씬 부드럽잖아!”
“그럼 안심으로 해.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음… 그럼 이거랑 이거랑 하나씩 사자. 어때?”
“맘대로.”
이걸로 할까? 이게 더 좋아보이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느낌으로, 흐흐. 포장된 고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내려놨다하다 하나를 택하고는 카트 안에 넣는다. 송이는 처음엔 자긴 고기만 먹어도 된다더니 예상보다 비용이 줄어서인지 다른 것도 사도 되냐고 묻는다. 왜 저한테 허락을 맡는지 모르겠지만 알았다고 대답하니 잽싸게 다른 코너로 쪼르르 달려간다. 민준은 송이가 남겨둔 카트를 끌고 뒤를 따라갔다.
“......”
어느 쪽으로 갔는지 그새 보이지 않는 송이를 찾다 채소 코너에 있는 걸 발견했다. 뭘 고를지 고민하고 서 있는 송이를 보고 있는 느낌이 이상하다.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기분.
송이는 멀리 있는 민준에게 버섯을 들어보이며 오케이? 하고 또 묻는다. 고개를 끄덕인 민준은 또 뭘 사야하나 생각하며 마트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마실 걸 사야지 하고 눈에 보이는 음료수를 아무거나 하나 집었는데, 다른 손이 먼저 민준의 손목을 낚아챈다.
“어허, 내가 말했지, 콜라는,”
“빨간 거.”
“어. 잘 아네.”
3년 반이라는 시간치곤 아어이다가 잘 맞았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반응한 말과 함께 빨간 라벨의 콜라를 집으며, 이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콜라 좋아해?”
“응, 좋아하지.”
“적당히 마셔, 몸에도 안 좋은 거.”
“다른 거 다 끊어도 이건 못 끊지!”
좋아하지도 않던 콜라를 마시게 되고, 어떤 브랜드의 콜라인지 나도 모르게 확인할 때마다 떠오르던 목소리. 네 말대로, 그건 그만두지 못하겠더라.
“이제 다 샀나?”
“음… 여기서 살 수 있는 건 다 산 것 같아.”
“그럼 빨리 가자, 배고프다.”
고기, 약간의 채소와 음료수, 일회용품 등 살 건 다 샀다. 짐들을 트렁크에 싣고 아네뜨 호수로 가는 길에 송이의 숙소에 들러 나중에 정말 먹고 싶을 때 먹으려고 아껴둔 즉석 밥과 꽁꽁 싸매고 온 김치를 가지고 나왔다. 집 주인에게 부탁해 필요한 식기도 빌렸다. 또 중간에 주류샵에 들러 맥주 몇 캔을 사고 주유소에서 땔감으로 쓸 장작도 샀다. 그것 참 한 군데에서 다 팔 것이지, 다 각자 다른 곳에서 사야했다.
밥 한 끼 먹으려니 살 것도 들를 곳도 많아 거의 1시간을 보내고 거의 기운이 다 빠진 채로 호수에 도착했다. 민준이 우리 꼭 이렇게까지 밥을 먹어야 하겠냐며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 꼭 이렇게 밥을 먹어야겠다며 여전히 달뜬 송이를 보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 ANNETTE LAKE, JASPER
“아직 불 안 붙었어?”
“조금 붙은 것 같긴 한데, 잘 안 되네.”
아네뜨 호수가, 화로와 피크닉 벤치가 있는 장소에 자리를 잡고 바로 식사 준비를 했다. 송이는 테이블에 신문지를 깔고 가져온 것들을 꺼내 세팅을 했고, 민준은 화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웠다. 주변에 마른 풀과 나뭇가지들을 모아 첫 불을 붙인 후 장작에 옮겨붙이려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먼저 테이블 세팅을 마친 송이가 도와주겠다며 화로 앞에서 고군분투(?) 중인 민준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남은 신문지를 접어 민준과 함께 부채질을 해본다. 펄럭펄럭, 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재와 연기도 마구 날린다.
“으, 눈 따가워.”
“넌 그냥 저기 가서 앉아있어.”
“그래도 같이 하는 게 낫지.”
하필 바람도 화로 입구 쪽으로 불어서 매캐한 연기가 고스란히 두 사람의 얼굴로 날아왔다. 민준이 송이에게 벤치에 가서 앉아있으라고 해도 송이는 괜찮다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계속 바람을 불어넣는다. 송이가 연기를 피한답시고 눈을 꽉 감고선 민준의 어깨 뒤로 얼굴을 숨긴다. 미련스럽긴. 민준은 최대한 연기가 가지 않게 조금 더 송이 쪽으로 가까이 붙어앉았다.
“붙었다.”
“정말?”
그래도 둘이 같이 열심히 부채질을 해서 그런지 빨리 장작에 불이 붙었다.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장작 위로 불길이 더 커졌다. 와, 우리 드디어 저녁 먹을 수 있는 거야? 어, 드디어. 송이가 -감격의 눈물은 아니지만- 연기 때문에 따가운 눈가를 닦으며 한참을 대기한 재료들을 가지고 온다.
그릴 위를 덮은 알루미늄 호일에 고기를 올리자 치익- 하고 맛있는 소리가 난다. 대박. 나 지금 침 고였어. 며칠 밖에 지나지 않긴 했지만 지겨운 빵과 감자 튀김 욕을 하며 배낭여행객답지 않은 만찬을 한껏 기대 중인 송이는, 이 곳에 오자마자 호수의 차가운 물에 담가둔 맥주 캔을 꺼내온다.
“아직 시원하다. 먹기 전에 한 잔 할까?”
“나 운전해야 돼.”
“아, 맞다. 에이… 그래도 한 모금만 해. 아님 나랑 짠만 해주든지.”
송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민준에게 캔을 건네고는 고기를 뒤집으라고 시킨다.
“짠-”
“굳이 해야 해?”
“응, 빨리.”
당연한 거라며 민준의 손에 들린 맥주 캔에 자신의 맥주를 들이민다. 민준은 하는 수 없이 건배에 응한다.
“도민준.”
“왜.”
“고마웠어, 오늘 나랑 놀아줘서.”
“...뭐야, 새삼스럽게.”
“고맙다는데 대답이 그게 뭐냐.”
“고기 탄다.”
“......쳇.”
어찌보면 하기에도, 듣기에도 조금 어려운 말에 대해 민준은 그냥 외면하는 걸 선택했다. 적당히 익은 고기를 민준이 잘라주자 송이는 바로 하나를 집어먹는다. 그리고는 으으음, 너무 맛있어. 돌고래 소리를 내며 맛있다고 난리다. 아, 살 것 같다. 너도 빨리 먹어봐, 응?? 민준이 고기를 굽느라 먹지 못하고 있으니 송이가 젓가락으로 하나를 집어 내민다. 그러자 민준의 표정이 구겨진다.
“나도 손 있거든?”
“으휴, 나도 알거든? 쓸데없을 때만 말대답해요. 어쨌든 내 손 민망하니까 그냥 먹어.”
송이가 젓가락을 더 들이대자 민준은 고개를 뒤로 피하다 어쩔 수 없이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송이가 호들갑을 떨던 것에 공감했다.
송이가 계속 연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길래 다 구우면 가져다 줄 테니까 벤치에 가서 앉아있으라고 했다. 다 된 음식을 일회용 접시로 옮기고, 고기를 하나 더 호일 위에 올린 후 송이가 앉아있는 벤치 쪽으로 갔다. 턱을 괸 채로 빨리 와, 라고 재촉하는 송이의 표정이 환하다. 먹을 거에 저렇게 좋아하는 얼굴이라니, 귀엽긴.
민준은 다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번엔 좀 더 확실히, 심박수가 빨라지며 가벼이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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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배불러.”
송이가 호수를 바라보며 피크닉 벤치에 기대 앉아 부른 배를 두드린다. 송이는 배가 부르다면서도 두 캔 째인 맥주를 야금야금 마시고 있었고, 민준은 처음에 반 캔 정도만 마시고 더 이상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나란히 앉아 호수와 숲, 하늘을 한 눈에 담으며 배부른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하늘 한 쪽이 점점 오렌지빛이 되어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 아직도 밝은 게 이상하지만, 저녁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같은 24시간이지만 하루가 더 긴 것 같아서 오늘이 마음에 든다.
이제 이 호수가에 사람도 거의 없는 듯 했다. 물놀이를 하던 가족도, 음악을 틀어놓고 시끄럽게 파티를 하던 유학생 무리도 다 가고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 이 풍경에 오롯이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다. 덩그러니 자연 한 가운데 뚝 떨어져 있는 이 기분은 생각 외로 나쁘지 않았다. 정말 혼자가 아니어서 일지도 모른다.
“...춥다.”
“그래? 나 차에 겉옷 있는데 가져다 줄까?”
한낮의 열기도 다 가버린 시간. 빈 캔을 내려다놓은 송이가 춥다며 팔을 끌어안았다. 민준이 옷을 가져다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송이가 대답도 없이 가만히 민준을 올려다본다.
“넌 안 추워?”
“응, 난 괜찮은데.”
“...그럼 갖다주라.”
뭐 그리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송이는 한참을 있다가 대답한다. 민준은 차를 대놓은 곳으로 뛰어가 트렁크에 넣어둔 얇은 점퍼를 꺼내어 송이에게 건네주었다. 땡큐. 엄청 크네- 사이즈가 한참 큰 민준의 점퍼를 입은 송이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송이는 처음 봤을 때부터 예뻤다. 모두들 그렇게 말했다.
송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한 사이, 민준은 물가로 가까이 갔다. 하늘빛이 그대로 짙게 비친 잔잔한 수면 위. 오른 편으로 눈을 돌리니, 수풀에 가려져 있던 광경이 드러났다. 한가로운 호수 한 가운데에 커다란 동물 두 마리.
“와…”
사슴 같이 생겼지만 덩치가 꽤나 큰 동물. 어떤 동물이지, 궁금해하고 있을 찰나 송이가 돌아오고 있었다. 민준은 조용히 손짓으로만 송이에게 여기로 와보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며 호기심 어리게 다가온 송이는, 민준이 가리킨 곳의 광경에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진다.
“뭐야? 대박! 완전 동화 같아!!”
“쉿, 조용히 좀 해.”
“어어, 쉿.”
흥분한 송이의 목소리가 커지자 민준이 검지를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아마 저들은 이 곳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왔을 테니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 것처럼.
송이는 벤치에 가서 가방을 가지고 오더니 민준에게 보여준다. 그녀의 가방에 꽂혀있던 동물 모양의 와펜. 둥글고 넓은 뿔이 있고 덩치가 큰 사슴과 동물은 호수 속에서 유유자적 걸으며 물을 마시고 있는 저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송이가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알려준다.
“이거야! 무스.”
“무스?”
“응. 거 봐, 이거 쓸데없는 거 아니라니까?”
송이는 기념품에 새겨진 모습을 실제로 목격해 아주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더 가까이 가서 보자며 수풀이 우거져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민준이 뒤따라가며 위험하다고 했지만 송이는 안 위험해, 하고는 수풀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안 위험한 건 어찌 아는지.
송이는 슬금 슬금 한 발짝씩 수풀을 통해 무스가 정면으로 보이는 쪽으로 갔다. 혹시나 자신들을 발견할까 조심 조심, 너무 가까이도 가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그녀의 말대로, 동화 속 같은 장면을 바라보았다.
민준은 조금 뒤에 서서 그 모든 모습을 카메라 프레임에 담았다. 물론 직접 보는 것만큼 그 감동을 읽어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몇 장을 찍은 뒤 송이의 옆으로 다가섰다. 귀를 펄럭이며 물을 가르는 무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뿔이 크고, 한 마리는 뿔이 없었다. 쟤들은 이 고요함 속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호수 건너편 산맥 너머로 이제는 확연하게 해가 지고 있다. 역광이 만들어낸 호수 위의 실루엣, 더 오묘해지는 호수면의 빛깔..
“......”
민준은 저와 같이 말 없이 서 있는 송이를 돌아보았다. 낯선 곳에서의 편안함. 그 균형이 완벽하다. 뭐 어느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게 없다고 생각했다.
“...천송이.”
“응?”
“내일 밴프로 가지?”
“어. 너와 나의 계획표에 의하면.”
“어떻게 가는데?”
“버스. 거기까지 곧장 가는 고속버스 있어.”
오늘 말린 호수에 같이 가자고 말할 때보다는 덜 떨렸다. 떨리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이 가장 어렵고, 어렵지 않으려면 때를 잘 알아야 했다. 그 순간은 그 때가 아니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어야만 했다.
“그럼… 같이 갈래?”
“......?”
“아니… 나는 계속 저 차 가지고 갈 거거든. 어차피 같은 곳으로 가는데 같이 타고 가면 좋을 것 같아서.”
“......”
정면을 보고 있던 송이가 민준의 말에 휙 고개를 돌린다. 불시에 마주한 얼굴이 민준은 괜히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한 말에 대한 당위성에 대해 늘어놓았다.
송이는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빤히 민준을 보고 있다가 다시 앞을 본다. 그래, 라는 답이 돌아오길 바라며 그녀의 입술을 보았지만, 송이는 이번에도 대답이 조금 늦다.
“...왜?”
“그냥, 너 같지 않아서.”
“......”
나도 나 같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때의 나 같지 않길 바라.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지만…”
“......”
“근데 나, 혼자 여행해보고 싶어. 처음에 올 때도 그런 다짐으로 왔구.”
송이는 결국 그래, 라는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이렇게 답할 걸 어렴풋이 예상했던 것 같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싶은 말이었다.
“...힘들지 않겠어?”
“도민준 너랑 다니는 게 더 힘들 것 같은데?”
“장난해? 내가 뭘.”
“...아무튼, 남은 일정은 나 혼자 할게.”
“......그래.”
민준은 웃으며 송이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원래 자주 웃지 않아 미소가 어색한 것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송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작은 목소리로 이어진 말은, 민준 저에게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 곳이 너무 조용해서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녀는 애쓰고 있는 걸까. 애쓰고 있지 않은 걸까.
“후회할 지도 모르겠지만.”
“......”
후회할 것조차 몰랐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후회할 걸 알면서도 우리는 선택이라는 걸 한다. 어쩌면… 후회할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 쟤네 일로 온다!”
잠깐의 정적 후, 송이가 호수 쪽을 가리키며 놀란다. 이제 물을 다 마셨는지 무스 두 마리가 민준과 송이가 있는 쪽으로 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자.”
“그래.”
두 사람은 얼른 수풀을 빠져나왔다. 길을 비켜주고 멀찍이서 그들이 반대편 숲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제 완전히 하늘이 검푸른 색에 가까워졌다. 길고도 짧았던 하루가 저물었다.
“......”
분명한 건, 내가 애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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