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Hello, my stranger 14 본문
Hello, my stranger 14
#
“과거의 귀인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현실을 볼 것. 행운의 물건 책, 운동화, 행운의 색 검은색…”
이런 신문 속 오늘의 운세 같은 걸 얼마 만에 보는 건지.송이는 대기실 테이블에 있던 신문을 아무 생각 없이 펼쳐보다 띠별 운세 코너에 시선을 멈추었다. 뭐라 뭐라 한자가 써있는 건 모르겠고, 자신의 띠인 그림을 찾아 오늘의 운세를 읽었다. 어렸을 때 재미로 많이 해 본 별자리 운세, 타로 같은 건, 행운조차 기대할 수 없는 살벌한 현실 속에서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라 관심도 두지 않은 지 오래였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실을 보라. 이런 건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 아냐? 하여간 말도 안 돼.”
“그냥 재미로 보는 거죠, 뭐.”
“그리고, 행운의 물건이 책이라니? 내가 아까 책에 긁혀서 이 상처가 났는데.”
송이는 이런 거는 나도 쓰겠다- 하며 신문을 도로 테이블 위에 내팽겨쳤다. 그리고는 응급 처치로 대충 반창고를 붙인 손등 위의 긴 상처를 들어보이며 괜히 오늘의 운세에다가 화풀이를 했다. 리허설 도중, 세트에 있던 책장이 기울어지면서 책 몇 권이 떨어졌는데, 하필 그 아래 송이가 있었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책 모서리에 손등을 긁혀 피가 날 정도의 스크래치가 생겼다.
“촬영 끝나고 병원 가봐요, 누나.”
“에이, 뭐 이런 걸로. 카메라에 안 잡히게만 하면 돼.”
걱정하는 매니저에게 괜찮다고 말했지만 뒤돌아서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작은 상처에는 죽네 마네 하며 앓는 소리를 내지만 정말 아픈 상처는 꾹꾹 참아내기 마련이지.
‘내가 오른쪽에 설게요.’
‘…왜요?’
‘나 왼쪽 얼굴 잘 나오는 쪽으로 선다고 말했었잖아요.’
‘근데 이번엔 아예 대본에 써 있는데요. 주호가 오른쪽 책장 아래 서 있다.’
‘뭐 어때요, 별로 안 중요할 것 같은데.’
‘감독님이 오케이 하시면 바꿀게요.’
‘일단 바꿔요, 그럼.’
리허설 직전, 감독님이 없는 틈을 타 민준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했었다. 안 그래도 왼쪽 얼굴이 조금 더 괜찮게 나오는 편인데 오늘따라 오른쪽에 작은 뾰루지까지 나서 영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는데 민준이 한 번 거절을 하자 더 억지를 부렸다. 그냥 괜히.
민준의 옷깃을 잡아당겨 강제로 자리를 바꾸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장이 기울어지며 책이 우수수 떨어졌고, 바로 그 아래에 있던 송이가 손을 다치게 된 일이었다. 그래서 더 아픈 티를 못 냈다. 자리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고집을 피우지 않았더라면, 쓸데없이 억지 부리지 않았더라면.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없었더라면’ 하는 후회는, 폭풍우가 몰아친 후에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날갯짓을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
바람 좀 쐬고 올게. 밖에 비 오는데요. 누가 밖에 나간대. 피가 베어있는 반창고를 떼어내고 새로 반창고를 붙였다. 한 개로도 모자라 두 개를 이어 붙이고 나서야 상처가 가려진다. 그리고는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과거의 귀인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어?”
대기실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답답함을 해소해보려 했지만 습한 공기가 가슴을 더 조여왔을 때 즈음,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만나게 되었다.
“어머, 혜영이 맞지?”
“…어! 송이야!”
“맞구나!! 웬일이야!”
대책 없던 고3 시절, 연기 학원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그 친구를 지금 이 촬영장에서 만나게 되다니. 송이는 뜻밖의 만남에 매우 반가운 얼굴로 복도 한 켠에 앉아있던 친구에게 다가갔다.
“이게 몇 년 만이야. 너무 반갑다, 혜영아.”
“어어, 나도 정말 여기서 송이 너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어떻게 여기서?”
“나 오늘 여기 보조 출연이거든.”
“정말? 다시 연기 하기로 한 거야?”
“그냥, 알바 삼아. 잘되면 계속 하는 거구.”
송이가 갑작스레 드라마로 데뷔하게 되면서 학원은 그만 두었지만, 유일하게 계속 연락하던 친구였다. 하지만 입시에 실패한 친구는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택했고 재수를 하게 되면서 점차 연락이 뜸해졌었다. 서로 바빠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아주 오랜만에 우연히 만나게 되어 기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친구의 손을 붙들고 반가운 마음을 나누다 아예 친구를 데리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진짜 신기하다. 나 아까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읽었는데, 과거의 귀인이 찾아온다는 거야! 근데 바로 너를 만나서 나 지금 소름 돋았잖아.”
“정말?”
친구는 여태까지 취업 준비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드라마나 영화 보조 출연을 몇 번 했다고 했다. 오늘은 단순 엑스트라가 아니라 나름 드라마 배역 중 한 명의 친구로 나와 평소보다 제대로 화면에 나올지도 모른다고 약간 흥분해 있었다. 평범하게 다른 학생들처럼 공부를 해서 나름 괜찮은 대학에 진학했지만 꿈을 버리지 못해 계속 이 근처를 기웃거린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엔 상대적으로 쉽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송이는 다 잘 될 거라는 말 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지금은 어디 살아?”
“나 분당에. 송이 네가 사는 데랑 가까워.”
“어어, 그렇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해도 친구는 다 안다고 했다. 집은 어디 살며, 어떤 브랜드의 광고 모델인지, 무슨 영화를 찍을 예정이며, 심지어 누구와 연애를 한다는 그런 소문까지. 그래서 딱히 먼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학원을 다니던 짧은 공통의 시간만을 이야기할 뿐.
“나는 네가 도민준하고 같이 작품 할 줄 정말 몰랐어.”
“…그래?”
그래서 그에 대한 이야기도 피할 수 없었다.
“사실, 너랑 도민준이랑 만나는 줄 알았는데, 그러자마자 바로 오디션이… 그렇게 되어서.”
“……”
“너도 알겠지만, 좀 안 좋은 소문이 있었잖아.”
“…하하. 뭐, 그랬지.”
도민준이 잘하는 거 알고 천송이가 일부러 접근했대. 걔 연기 배운지 얼마 안 됐잖아. 도민준한테 중요한 건 다 빼먹고, 정작 오디션 때는 다른 대본 알려줬대. 그래서 도민준 오디션 망치고 떨어졌잖아. 천송이만 붙고. 걔가 좀 예쁘잖아. 얼굴로 꼬신 거지 뭐 – 8년 동안 수없이 받아보았던 악담과 악플들을 견디게 해 준, 19살이 감당하긴 어려웠던 이야기들.
송이는 어쩔 수 없는 민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씁쓸함을 숨긴 채 웃었다.
“만나고 뭐 그랬던 건 아니구… 오해가 좀… 있었지.”
“지금은 잘 지내니까 같이 드라마도 찍고 그러는 거 아니야?”
“어? 어어. 그치. 지금은 뭐, 동료고 선후배지.”
“그래.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둘 다 잘 나가잖아! 너무 부럽다.”
혜영이 너도 잘 될 거야. 나는 좀 늦었지. 아니야! 도민준…도 얼굴 알린 지는 얼마 안 됐잖아. 걘 늦게라도 잘 될 줄 알았지 – 어릴 적 우리 모두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다 민준의 얘기가 나온 김에 친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혜영아, 아까 그 말 있잖아. 소문…”
“소문? 아, 그 학원 다닐 때 도민준이랑?”
“응.”
“그건 왜?”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 도민준이, 그랬어?”
“음…아니. 나도 그냥 애들이 하는 말 들은 거라…”
“아…”
“도민준이야 학원 유명 인사였으니 애들이 말하기 좋아했지. 다들 금방 잊었어. 옛날 일인데 너무 신경 쓰지마.”
송이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옛날 일인데 내가 또 뭐하러 들췄지. 방금 전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한 오늘의 운세도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고 말하는데. 후회할 것도 없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그랬을 텐데. 뭐가 아쉬워서.
반갑지 않은 옛날 일에 약간 마음이 심란해졌지만, 과거의 귀인을 만난 기쁨을 먼저 앞세웠다. 친구와 전화 번호를 교환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서로 응원도 해주었다. 재회도 잠시, 다음 촬영 때문에 송이가 먼저 나가보아야 했다. 친구가 갑자기 생각난 듯 싸인 몇 장을 부탁해왔다. 친구들이 하도 졸라댄다면서 조금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이거 촬영 끝나고 해줄게.”
“…그럼 혹시, 도민준 것도 부탁해도 될까?”
“아아…그럼! 해줄 수 있지. 아님, 아예 지금 불러 줄까?”
“아니, 아니! 그렇게까진 안 해도 돼. 걔는 나 모를 걸. 아는 척 하기도 그렇구.”
학원의 모든 학생들은 도민준을 알고 있었지만, 도민준은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그 애는 그 때부터 빛이 났었지. 송이는 또 딴 데로 튀어버린 생각을 제자리로 돌려놓고선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단단히 약속을 했다. 친구는 정말 몇 초 밖에 나오지 않는 씬 때문에 하루 종일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대신 송이는 자신의 넓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해주었다.
대기실을 나서면서 내일도 신문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매니저님.”
“…예? 저요?”
“…친구가 부탁해서 그러는데… 도민준씨 싸인 좀 몇 장 받을 수 있을까요?”
“아아. 그럼요. 근데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들어가봐야 해서 그런데, 형한테 말해서 내일 갖다 드릴게요.”
“그게, 오늘 받아야 되는데…”
“그럼 직접 가서 받으실래요? 형 대기실에 있어요.”
“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민준의 대기실 문을 두드렸다. 범이에게 시킬까 생각도 했었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줄 건데, 그렇게 하긴 좀 그랬다. 정말 친구를 위해서, 하는 수 없이. 이 정도야 뭐, 큰 부탁도 아니고. 싸인이야 맨날 하는 건데. 도민준이 아무리 꼴보기 싫어도 나도 이 정도는 들어준다, 진짜.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네에- 하고 민준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망설였지만 문을 열지 못했다. 들어오세요- 라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더 들리고 나서야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문고리를 돌렸다. 대기실 소파에 혼자 앉아있던 민준이 열린 문 틈으로 나타난 송이를 보고 의외라는 표정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반가운 것만은 절대 아닐 테니, 무슨 표정을 짓든 뭔 상관이랴.
“……?”
“아……”
여기엔 어쩐 일이냐 묻는 말도 없이, 민준은 문 앞에 뻘쭘히 서 있는 송이를 보고 있었다. 송이는 대기실 안으로 더 들어가지 않고 문에 거의 붙어 서서, 어색한 침묵이 더 길어지기 전에 일단 입을 뗐다.
“친구가 있는데, 그러니까 어… S 아카데미 같이 다닌 친군데, 정혜영이라고, 알려나.”
“……”
“아아, 모르겠지. 다른 반이었으니까. 아무튼, 그 친구를 오늘 만났는데…걔가 연기를 그만 뒀는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한다 하더라고요. 오늘 보조 출연한다고…”
“……”
“우연히 만나가지고 얘기를 하는데… 보니까 친구가 그 쪽 팬인 것 같더라고요. 아니 뭐 하고 많은 배우 중에 왜 그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혹시나 쓸데없는 오해를 살까봐 서론이 점점 길어졌다. 이건 절대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친구 때문에. 그냥 친구도 아니고 옛날에 같은 학원 다녔던 친구, 어렵사리 다시 꿈을 시작하는 친구, 이렇게나 사연이 많은 친구 때문에, 제가 굳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했다는 사실을 최대한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송이의 말꼬리가 길어질수록 민준의 미간은 점점 구겨지기만 했다. 그리고는 답답했던지 먼저 되묻는다.
“…그래서요?”
“아, 그러니까 내 말은…”
“……?”
“싸인 좀… 해줘요.”
10장만. 하고 송이는 열 손가락을 다 펴 보였다. 민준의 눈이 완전히 찌푸려졌다. 그럴 땐 양쪽이 서로 다른 그의 눈 크기가 더 눈에 띈다.
#
“친구 이름이 뭐라고요?”
“정혜영이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이 10장. 민준은 송이의 부탁대로 싸인을 하고 있었고 송이가 감시하듯이 옆에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스슥, 싸인을 9장 연달아 하고, 마지막 장은 친구 이름을 써달라고 해서 ‘TO.이름’ 까지 써주었다.
“아니, 이름만 달랑 쓰지 말고 밑에 뭔 말이라도 써줘요.”
“무슨 말이요.”
“싸인 할 때 쓰는 말들 있잖아요. 꿈은 이루어진다, 파이팅. 뭐 이런 거.”
“후우…”
송이가 싸인 밑의 공백을 가리키며 톡톡, 더 써달라고 요청하자 민준이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송이가 말한 그대로 ‘꿈은 이루어진다. 파이팅.’ 한 글자씩 써내려갔다.
“다음부턴 안 해줄 거에요.”
“허얼. 나도 앞으로 싸인 부탁할 생각 없거든요?”
문구 앞에 별표까지 그려주고 나서 펜을 내려놓은 민준이 퉁명스런 말투로 말해왔다. 거 참, 싸인 몇 개 좀 부탁했다고 귀찮은 티를 내다니. 나중에 너네 엄마가 내 싸인 받아달라고 부탁해도 안 들어줄 거다, 임마. 송이는 싸인 종이를 테이블 위에서 확 가로채오며 똑같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거 말고요.”
“……?”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준을 따라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옮겨간다. 어느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온 그의 브라운 계열 체크 셔츠가 눈 앞에 보인다.
“왼쪽 얼굴이 잘 나오니 어쩌니 하면서 자리 바꿔달라는 거요.”
“……”
“나는 대본에 있는대로, 감독님 디렉팅대로 할 거니까, 그런 부탁 아닌 부탁하지 말라구요.”
“…참 나. 한 두 번 그런 거 가지고 되게 뭐라 그러네.”
“괜한 억지 부리니까 다치고 그러지.”
“……”
그 말을 하고 돌아서는 민준의 표정이 쓸데없이 심각해서 약간 빈정이 상했다. 안 그래도 다친 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은데, 왜 잘나신 후배님까지 나서서 들쑤시는지. 같은 말이라도 들으면 두 배로 기분 나쁜 네가 왜. 송이는 다친 손등을 다른 손으로 가린 채로 싸인 종이를 들고 인사도 없이 민준의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다시는 뭐 부탁하나 봐라.”
걱정해주는 말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 손등 위의 상처를 쫓던 눈동자를 못 본 것도 아니었는데. 바라는 것도 없었는데, 왠지 모르게 뺨만 맞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다친 곳은 손인데, 다른 곳이 얼얼하다.
해피뉴이어~!
원래 이 에피소드를 쓰려다가 좀 길어져서.. 미리 일찍 왔네 그려. 곧 15편으로 올게 ㅋㅋ
이번 상플엔 분량을 신경쓰지 말자는 다짐을 계속 상기 중 ・_・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Hello, my stranger 16 (25) | 2016.01.08 |
---|---|
# Hello, my stranger 15 (25) | 2016.01.05 |
# Hello, my stranger 13 (24) | 2015.12.31 |
# Hello, my stranger 12 (32) | 2015.12.24 |
# Hello, my stranger 11 (35) | 2015.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