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Hello, my stranger 13 본문
오늘이 어제가 되고, 어제는 과거가 되고. 여름은 늦여름이 되고, 늦여름은 가을이 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갔다.
Hello, my stranger 13
#
드라마 ‘여행’ 촬영 37일 째의 날.
오전.
방영일이 다가오면서 슬슬 언론과 인터뷰도 많아지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을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도 촬영장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다들 고생하는 와중에 화기애애함을 잃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송이는 현장 분위기 메이커로, 모든 스태프들이 다 좋아했다. 그래서 송이는 항상 재밌는 얘기도 하고, 리액션도 오버해서 하고, 일부러 더 밝은 척 하려 애썼다. 그래야 자신의 기분도 더 좋아지는 것 같았다.
“다음엔 마주 보는 장면에서 내가 이 쪽에 설게요. 왼쪽 얼굴이 더 나아서.”
“네.”
그리고 그는 말이 짧아졌다. 물론, 송이에게 하는 말만 짧아졌다. 짧아도 너무 짧아졌다. 최근에 ‘네’ 말고는 다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네, 선배님 마-음대로 하세요’ 라든지, ‘저도 왼쪽 얼굴이 나은데요?’ 라든지. 꼭 뒤에 꼬리처럼 붙어다니던 얄미운 말들도 없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민준은 그 재수없던 입을 닫아버렸다. 항상 저 입 좀 꼬맸으면- 하고 바랐었는데, 정작 말이 없으니까 더 재수없어졌다.
한 씬을 마치고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뿐인데, 민준은 시큰둥하게 대충 대답을 하고서는 세트장을 빠져 나가버린다. 요즘 들어 늘 이런 식이다. 서로 말을 덧붙이고 덧붙이다 다툼이 되어버리는 상황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
예전에도 민준은 항상 자신을 은근히 무시해왔다. 그러나 그 무시와 지금의 무시는 약간 다르다. 처음엔 잘 몰랐던 그 차이를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 ‘무시’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본 적이 있었다. 저 자식이 나를 또 무시했어. 맨날 개무시하네. 너만 무시하냐, 나도 무시할 거야. 하도 이렇게 생각하고 다니다보니 게슈탈트 붕괴 현상을 겪었나. ‘무시’라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였다.
1.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2. 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김.
그 때 알았다. 이전의 제 자신이 민준에게 2번이었다면, 지금은 1번이라는 거다.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다. 아니, 마치 존재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
송이는 냉정하기만 한 민준의 뒷모습을 보며 그냥 돌아서서 다음 촬영을 위해 대기실로 향했다. 이제는 그 1번의 의미를 알고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무시. 시선을 주지 않아도 괜찮아.
“아, 피곤해. 어떻게 쉴 시간을 안 주냐.”
송이는 대기실로 들어오자마자 피로함을 호소하며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미국에서 돌아와서도 휴일은 거의 없었다. 시차 적응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한국에서 촬영을 이어갔다. 이러면 초반부터 다크 서클이 진하게 늘어진 채로 화면에 나오게 생기는 거 아닌가 걱정이었다.
“애초에 시작이 늦었으니 어쩔 수 없죠.”
“그러게, 방영 시작하면 더 심하겠지?”
옆에서 매니저가 한 마디 거든다. 캐스팅 때문에 일정 자체가 늦어진 것이라 이렇게 바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근래에 영화만 찍었더니 이렇게 바삐 돌아가는 드라마 촬영 환경에 살짝 적응이 덜 되었다.
“그래도 민준이 형이 극적으로 캐스팅 되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방영 날짜 미뤄야 될 수도 있었잖아요.”
사실 남자 주인공 때문에 드라마가 엎어지니 마니 하는 소리까지 돌았으니, 제대로 시작된 것만 해도 다행이긴 하다. 이렇게 빡셀 거 다 알고 있는 일이었지 뭐. 근데 내가 잘못 들었나, 민준이 형이라니? 송이는 소파에 누운 채로 범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소파 옆에 서 있는 범이는 별 생각 없이 과자나 주워 먹고 있었다.
“야, 윤범. 너 언제부터 도민준 보고 형이라 그랬냐?”
“아… 제가 그랬나요. 미국에서 좀 친해져서…”
“참 나. 친해질 사람이 따로 있지.”
송이가 민준의 욕을 할 때마다 은근히 맞장구 치면서 편들어주던 놈이, 이제는 형이라니? 송이가 맘에 안 든다는 듯이 말하자 범이가 눈치를 보면서 뒷머리를 긁적인다.
“민준이 형 착하고 좋은 사람이던데, 누난 맨날 왜 그리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착하긴. 그 인간이 나 무시하고 비아냥대는 거 뻔히 다 봐왔으면서.”
“그건 누나가 먼저 시비를 거니까 그런 거죠.”
“…야. 너 누구 매니저냐?”
이게 보자 보자하니까. 안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더더욱 자기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도민준 때문에 약간 약이 올라 있는 상태인데 뭐가 어쩌고 저째? 송이는 당장 그 말을 정정해라- 라는 눈으로 범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이쯤에서 꼬리를 내리고 송이가 원하는 대답을 해줬을 범이가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는다. 손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더니 뭔가 다짐한 듯 그, 그… 말을 몇 번 더듬고는 말한다.
“누나. 이제 그러지 좀 마세요. 막 일부러 싫은 척 하고.”
“내가 뭘 싫은 척 해?”
“아니, 저한테까지 그러실 필욘 없잖아요. 저 다 봤어요.”
“…뭘?”
“미국에서 길 잃고 헤매고 계시다가 제가 찾았을 때요. 그 때 두 분 손 잡고 계셨잖아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얘가 뭐라는 거야. 송이는 혹시나 대기실에 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급히 둘러보았다. 범이는 그 동안 혼자 꽁꽁 담아두고 있었을 말을 홧김에 얘기하고선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다.
“하하, 야- 내가 왜 도민준이랑 손을 잡고 있어.”
“저도 아닐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그냥 지나칠 뻔 했다니깐요? 지나가는 커플인 줄 알고.”
“야, 커플은 무슨. 요즘 나랑 도민준 사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
커플, 그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완전 어이가 없네. 아니 뭐 조금이라도 친하면 몰라. 송이는 당황스러워서 일단 눈에 보이는 신문으로 찰싹, 범이의 머리를 때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나 있어. 잘 거니까.”
“에이씨… 왜 또 저한테만…”
뱀눈을 하고 범이를 노려보다 다시 소파에 누웠다. 궁시렁 궁시렁. 범이가 입이 댓발 나온 채로 멀찍이 대기실 구석에 쳐박힌다. 그 때 민준이 형 옷도 입고 계셨으면서. 하늘색 옷. 범이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이마 위에 팔을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이미 잠은 다 달아났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이름이 끼어들고 나면 머리가 복잡해져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야, 윤범.”
“왜요.”
“그거, 다른 사람들도 봤어?”
“…아니요. 저만.”
“다른 사람한테 얘기했어?”
“아니요.”
“너 얘기했다간 죽어!!”
“맞구만, 손 잡고 있었던 거.”
“아니라니까!!”
신문지를 다시 들어 범이에게로 냅다 던졌다. 나쁜 놈. 그러길래 손은 왜 잡아서. 그래 놓고 왜 모른 척을 해서. 왜 나를 무시해서. 왜 나를 봐주지 않아서.
#
오후.
“어머, 촬감님. 방금 장면 카메라 워크 예술인데요.”
“그래? 고마워, 천송이씨.”
송이는 한 씬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모니터를 하고 있었다. 마침 옆에 촬영 감독님이 계시길래 평소처럼 살갑게 말을 걸었다.
“근데 말이야, 천송이씨.”
“네! 말씀하세요.”
“미국에서 도민준씨랑 뭔 일 있었어?”
“네?”
옆에서 같이 모니터를 하고 있던 민준이 단독 씬 준비를 위해 스태프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뜨자, 촬영 감독님이 송이에게로 다가와서 넌지시 묻는다. 송이는 갑작스런 질문에 깜짝 놀라 너무 크게 대답해버렸다.
“요새 둘이 하도 말도 없고 조용하길래.”
“아…”
안 그래도 조금 전에 범이가 했던 쓸데없는 말 때문에 신경 쓰이던 참에, 촬영 감독님까지 이런 걸 물어보니 괜히 뜨끔한다. 정말 뜨끔할 거나 있는지.
“아, 뭔 일 있었긴 있었지. 내 말은, 둘 사이에 다른 일 있나 싶어서.”
“…아니요. 원래 친한 사이가 아니라…”
“아직도 안 친해졌어? 난 초반에 맨날 둘이 투닥 투닥 다투고 그래서 친한 줄 알았지.”
촬영 감독님은 송이의 말에 아직도 그러냐고, 과장된 표정으로 반응했다. 송이는 약간 어색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저 멀리 다음 장면을 기다리며 서 있는 민준을 보았다. 세트장 한 가운데, 미간을 찌푸리고 대본을 보고 있는 민준. 대사가 잘 되지 않는 듯, 같은 문장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뭔가 있지도 않은 사이였는데, 달라지긴 달라졌구나. 나는 달라지라고 한 적도 없는데. 달라질 것도 없었는데.
“모든 사람하고 다 친하게 지낼 순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미국에서 둘이 그런 일 같이 겪었으면 친해지고도 남았겠다.”
“…뭐. 앞으로 친해지겠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얘기하려면 이 자리에선 부족해요. 오래되고 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나도 잘 모르는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근데 감독님은 그런 걸 다 어떻게 아셨어요.”
“난 맨날 카메라 통해서 다 보잖아. 다 알지.”
그런가요. 그럼, 화면 속에서 보이시거든 제게 좀 말해주실래요. 그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 중인지.
#
늦은 저녁.
하루 종일 세트장 촬영이 한창이다. 저녁 식사를 하고도 촬영은 계속 되었다. 오늘만 몇 벌의 옷을 갈아입고, 몇 번의 수정 화장을 했는지. 그래도 이번에 찍을 장면이 오늘의 마지막이었다.
꿈 속에서 행복한 데이트를 하던 주호와 선하는 마침내 현실에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짧은 인연, 그리고 미국에서 우연한 만남 후 함께한 여행, 다시 서울. 가장 간질 간질하고 달콤한 관계의 순간. 물론 전개상 그들에겐 곧 위기가 오겠지만,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극 속으로 들어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면, 그래도 그들은 같은 선택을 했을까- 대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지난 번에 찍은 거 기억하지? 그거랑 거의 똑같이 갈 거야.”
“네.”
선하가 주호의 꿈을 꾸던 것과 같은 장면. 하나는 가짜고 하나는 진짜다. 민준과 송이는 지난 번에 촬영 했던 장면을 다시 한 번 모니터링하고는 세트장으로 들어섰다.
“크흠.”
리허설이 시작되자 송이는 번뜩 지난 촬영이 떠올랐다. 민준의 팔에 맘 놓고 누워 있다가 팔을 확 빼버리는 바람에 바닥에 머리를 대차게 박았던 기억. 민준이 송이의 머리 아래 팔을 뻗어 내밀었고 그 위에 눕기만 하면 되었는데 괜히 한 번 망설였다. 이번에도 그럴거냐고, 그러기만 해보라고, 뾰족한 목소리로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내려간다. 대신 헛기침으로 눈치를 준다. 대충 지도 알겠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고 민준의 팔에 반쯤만 기대 누웠다. 이렇게 어설프게 있으면 민준이 그냥 힘 빼고 누우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 말이 없다. 별 거에도 다 말을 아낀다, 못된 자식.
“아이고, 목이야…”
“……”
“바닥이 차네…”
누운 것도 아니고 안 누운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계속 있다간 어깨에 담 걸리게 생겼다. 송이는 에라이,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그냥 힘을 빼버렸다. 괜히 버티지 못하는 척 하면서 슬쩍, 민준의 팔 위에 천천히 머리를 뉘였다. 민준이 슥 돌아보는게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했다. 어때, 연기인데. 지가 뭐 어쩔 거야. 앞으로 이거보다 더 한 장면들이 훨씬 많을 텐데. 손도 잡을 거고, 팔짱도 낄 거고, 포옹도 할 거고, 키스도… 아. 일단 거기까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천장을 보고 있었다. 민준도 다시 반대로 고개를 돌려 리허설에 집중했다.
“그…”
“……?”
일단 운은 띄우고 나서야 뭐라 말할지 생각했다. 최근 나눈 말이라곤 연기할 때 ‘이러는 게 어때요. 다시 할게요. 죄송합니다.’ 이런 것뿐이라, 다른 말들을 하는 방법을 점점 잊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팔 빼버리고 그러지 좀 마요.”
“……”
“전에 진짜 아팠거든요? 뒤통수에 혹이 한 3일은 있었을 거에요.”
“……”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민준은 유일하게 잘 하던 ‘네.’라는 대답마저 없다. 어휴, 그래라. 니 맘대로 해라. 송이는 리허설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내가 먼저 일어나면 될 일이지, 거 뭐 어렵다고. 뒤따라 일어난 민준과 본 촬영이 시작될 때까지 등을 지고 앉아있었다. 대사도 없는데 대본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온도 조절이 되지 않는 세트장의 바닥은 차가웠다.
“액션!”
본 촬영. 선하의 집 거실, 러그 위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 누워서 별 실 없는 농담들에 웃다가 눈이 마주쳤다가 피하고, 잠깐의 정적. 주호는 선하에게 팔을 내어주고, 선하는 그의 팔을 베고 눕는다. 눈을 감았다 떠도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행복함을 느낀다.
팔베개를 한 채로 누워 서로 마주보며 웃는다. 밤 시간이라 그런지 그의 수염이 거뭇하게 자라나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하루도 안 지나서 저렇게 자라는 구나. 신기하다. 우리 윤재는 안 그러는데. 아, 걘 아직 애기지. 방금 전 목 캔디를 먹었나 보다. 숨 어디에선가 싸한 향이 난다. 살짝 내리깐 눈 아래,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흔들림 없는 저 눈은 그저 선하를 보는 눈일 뿐. 내가 그러하듯이.
“컷. 오케이. 좋았어요.”
흐름도, 두서도 없는 생각들로 대사 없는 감정 연기 씬을 금방 지나갔다. 감독님의 오케이 소리에 송이는 얼른 가시방석같은 팔베개에서 벗어나려 했다.
“잠깐만. 반대편에서도 좀 따려고. 그대로 있어봐요.”
“아아, 네.”
어쩔 수 없이 다시 가시방석 위에 누웠다. 다른 각도에서 찍으려면 방금 전 자세 그대로 있어야 한다. 민준도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눕는다. 하얀 세트장 천장을 본 채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세트장 고개를 약간 들어 바깥 쪽에 있던 카메라와 조명 등 장비들이 안 쪽으로 들어오는 상황을 지켜보다 목 뒤가 뻐근해 그냥 도로 누웠다. 이미 머리 밑에 민준의 팔이 있다는 건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
곧 촬영이 시작되겠지, 하며 천장에 희미하게 있는 이상한 무늬를 보기 시작했다. 그냥 구도 바꾸는 건데 뭐가 이리 오래 걸려. 바닥도 차가워 죽겠구만. 소란스러운 스태프들 사이에서 감독님의 ‘액션’이라는 단어만 기다리고 있었다. 저 무늬는 꽃인가, 그냥 의미 없는 건가… 벽지가 예쁘네… 눈으로 쫓아 그리다 천장 가운데의 거실등의 빛에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감았다.
“……”
그냥 빛 때문에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이었는데,
“천송이씨!”
“……!”
크게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아, 뭐지. 눈 앞에는 하얀 천장 대신 누군가의 가슴팍이 보였다. 민준이다. 도민준의 옆에 누워 있었으니까 도민준이 맞다. 번쩍 뜬 눈이 두 배로 더 커진다.
“천송이씨, 피곤했나봐. 그 사이에 잠들고.”
“어머.”
송이는 화들짝 놀라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어어, 이제 슛 들어갈 거야. 정신만 좀 차리라구- 하는 감독님의 말에 주위를 보니 스태프들이 다 송이를 보며 작게 웃고 있었다. 내가 잠들었었다니, 말도 안 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민준을 돌아보았다. 옆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팔을 벌리고 누워 있던 민준은, 약간 짜증이 난 건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옅게 한숨을 쉬었다.
“잠깐 장비 때문에 지체 됐는데, 천송이씨 그 사이에 꿀잠 자던데?”
“아아…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피곤한 거 다 아니까 괜찮아요.”
송이는 스태프들에게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 다시 자세를 잡으려 했다. 민준의 팔을 또 베고 누우려니 괜히 눈치가 보인다. 하지만 민준은 그저 가만히 천장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껏 비워져 있는 공간에 몸을 기대었다. 방금 전처럼 몸에 힘을 빼고 편하게 눕긴 했지만 묘하게 어깨 위의 근육들이 긴장되어 있는 느낌이다. 오늘 조금 피곤하긴 했는데, 그렇게 눈 깜짝 사이에 잠들어버릴 만큼은 아니었는데. 아, 왜 그랬지. 프로답지 못하게. 도민준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예전 같으면 촬영 중에 잠이 오냐고 비아냥거렸을 텐데.
“후우…”
비아냥은 없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 왜 이래, 정말. 이 자리가 편하지를 못하다. 불편해, 불편해. 송이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그리고 문득, 긴장된 자신의 어깨가 더 이상 차갑지 않다는 걸 느꼈다.
#
“수고 하셨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모든 촬영을 마치고 스태프들에게 하나하나 마무리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세트 촬영이 밤 늦게서야 끝이 났다. 내일이 휴식일인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으며 퇴근의 기분을 누렸다. 세트장을 가로 질러 대기실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천송이씨, 이리 와봐.”
“왜요? 감독님.”
장비를 정리하고 있던 촬영 감독님이 송이를 불러 세웠다. 속으로 살짝 어서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끝까지 밝은 표정으로 촬영 감독님에게로 다가갔다. 카메라 앞에 있던 촬영 감독님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흐흐, 하며 웃고 있었다.
“이거 봐. 아까 천송이씨 자던 거.”
“허얼. 감독님 이거 찍으신 거에요?”
“어. 잠깐 사이에 잠든 게 너무 귀여워서 찍어뒀지.”
모니터 속엔 조금 전 촬영을 기다리다 잠든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당황스러워서 질색을 하며 손으로 모니터를 가렸다. 에이, 왜 이래. 귀여운데, 하고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스태프가 거든다. 약간의 소란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천송이씨 자는 거 찍어두셨네요? 하하.”
“이거 나중에 메이킹 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리면 되겠네요!”
“아아, 안돼요! 다들 왜 그러세요-”
처음엔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다가 눈을 깜박이더니 천천히 눈꺼풀을 닫는다. 그러다 다시 떴다가, 감았다가. 그렇게 두 세 번 그러더니 계속 쭈욱 감고 있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다 웃는다.
가만 눈만 감고 있는가 싶더니 살짝 입이 벌어진다. 그리고는 고개가 옆으로 툭, 힘 없이 돌아간다. 또 한 번 하하하, 웃음이 퍼진다. 송이는 약간 창피하긴 했지만 뭐 이런 게 촬영장의 소소한 재미라면야- 하는 생각으로 같이 웃었다. 아, 정말 다음부턴 정신 제대로 차리고 해야지. 웬만하면 안 그러는데…다른 데도 아니고 촬영장에서, 남들 다 있는데, 그것도 도민준 팔을 베고…
“……”
화면 가득, 고개를 반대편으로 떨구고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는 걸 지켜보았다. 민준은 옆모습 일부가 조금 보일 뿐, 어떤 표정인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짜증이 많이 났을 것이다. 저라도 그랬을테니, 뭐.
‘갑자기 팔 빼버리고 그러지 좀 마요. 전에 진짜 아팠거든요?’
혹시, 그 말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건가. 아이고, 설마 그럴 리가. 내가 지금 뭔 생각하는지. 도민준이 퍽이나.
“……”
사람들이 송이가 자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보고 있었지만, 정작 송이는 잘 보이지 않는 다른 것을 보려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축 늘어져 있어 제법 무거울 머리를 받치고 있는 그의 팔엔 점점 굵은 힘줄이 선다. 몇 번 쥐었다 폈다 한 손이 무언가를 망설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망설임을 끝낸 손이 천천히 송이의 어깨를 감싼다.
“……”
한동안 가만히 어색하게 어깨에 올려져 있는 민준의 손. 모니터를 보고 있던 송이의 웃음이 서서히 멈춰졌다. 그의 엄지 손가락이 천천히, 조심스레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는 그 언젠가에도 그랬다. 그에게 말해야겠다고 느끼게 만든, 손등을 쓸어내리던 그 손길.
“송이씨 진짜 피곤했나봐.”
“천송이씨는 어쩜 조는 것도 예뻐?”
그런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는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저린 팔을. 포커스 바깥에서 작게 움직이는 엄지 손가락을. 바닥이 차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손길을.
“……”
송이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트장 안에서 뒷정리 중인 스태프들, 하나 둘 꺼지는 조명들. 그 틈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굵은 목소리가 들린다. 나쁜 손버릇을 가지고 있는 놈.
인사를 다 했는지 대기실 쪽으로 가는 민준을 눈으로 쫓았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쪽 팔을 계속 주무르며 가고 있었다. 아주 잠깐의 단잠을 자게 한, 그 팔.
꿈을 꿀 새도 없이 짧았던… 그 꿈.
Hello, my stranger 2부. 서로가 낯익고도 낯선 두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
먼지들 새해 복 많이 받아!!! 2016년에도 천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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