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後我有 1 본문
後我有
첫 번째 이야기
쾅쾅쾅- 이른 아침부터 낡은 아파트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야! 도민준! 일어났냐?”
하루 일과가 시작되기 전의 조용한 복도식 아파트 단지에, 뻥 뚫린 복도를 타고 쨍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막 감은 머리에 수건을 둘둘 말아 올리고 입에 양치 거품을 가득 문 채, 초인종이 닳도록 누르고 문은 더 부서져라 두들긴다.
“야!! 억, 켁!”
양치 거품이 흘러내리지 않으려 고개를 들고 있다가 알싸한 맛이 목에 탁 하고 걸렸다. 켁- 하고 기침을 내뱉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그녀가 그렇게도 찾던 도민준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
“케켁. 아 매워.”
“야, 천송이.”
아침부터 뭔 날벼락인지, 덕지덕지 얼굴에 붙은 하얀 거품을 화를 꾹 참고 닦아낸 민준은 아직도 잠이 덜 깬 표정이다. 조금 미안했는지 송이는 눈 밑에 닦이지 않은 거품을 닦아주며 헤헤 웃는다. 웃으면 뭐 어쩌자고.
“도민준. 오늘부터 같이 출근하기로 했잖아.”
“헐.”
“이직 첫날이라고 일찍 가봐야 된다고 어제도 말한 것 같은데?”
민준은 아직 잘 떠지지도 않은 눈을 비비며 앞에 서 있는 송이를 발 끝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스캔한다. 실눈 속에서 빠르게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는 눈동자는 남자의 본능인 건지, 어쩔 수가 없다. 둔탱이 천송이는 모르겠다만. 가리라고 만든 건지 의심 되는 짧은 면바지에 언제 빨았는지 의심되는 목 늘어난 회색 티셔츠에는 야식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뭐 하루 이틀 보는 모습도 아니다만 여전히 적응 안 된다, 쯧쯧거리며 스캔을 마친 눈동자가 송이의 얼굴에 멈춘다.
“천송이 니 눈썹 문신 다시 해야겠다.”
“뭐?”
“아침부터 깜짝 놀랬네. 웬 모나리자가.”
“아놔, 이 자식이.”
인상을 팍 쓰며 손을 들어오길래 얼른 현관문을 닫는다. 이 기집애 손이 보통 매운 게 아니라서.
“우이씨. 야, 도민준! 빨리 하고 나와라.”
너나 빨리 하세요. 니가 화장하는 시간만 해도 난 다 끝나는데, 지금 머리도 안 말리고 와선 뭐래. 닫힌 현관문 밖에서 떽떽대는 앙칼진 목소리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 피곤하다.”
안 그래도 발걸음이 천근만근인 출근길, 귀찮은 꼬랑지 하나 더 달고 다닐 생각하니 더 피곤하다. 갑자기 5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몇 달간 놀아달라고 괴롭히더니, 다시 직장을 알아봤다는 소리에 잠시 안심했었다. 이제 그 놈의 백수 소리 그만 듣겠구나. 뭐만 하면, 나 백수니까 밥 사줘, 나 백수니까 술 마시자, 나 백수라고 놀리는 거야? 그런 찡얼거림에서 벗어났다 생각했는데, 별안간 자기도 이제 지하철로 출근하겠다고 같이 가잰다.
'애지중지하시는 붕붕이는 어쩌고?'
'거기는 일개 직원들은 주차 금지랜다. 러시아워 심하기로 소문난 데기도 하고..기름값도 좀 부담이고...'
'천하의 천송이가 웬 기름값 걱정.'
'야, 나도 이제 슬 시집자금 모아야지.'
'..나 같음 가방을 하나 덜 사겠다.'
'넌 여잘 몰라.'
'아, 네- 거진 10년 이상을 알아온 내가, 천송이씨를 참 모릅니다?'
본의 아니게 친구가 된지 11년, 본의 아니게 옆집 사는 이웃이 된지 2년. 이젠 더 이상 꾸미지 않아도 예쁜 앳된 10대가 아니었다. 아니, 10대는커녕, 청춘의 푸르름같이 느껴지던 20대마저도 이제 떠나 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 그저 예뻐 보이기만 하면 됐던 메이크업 제품 대신 기능성 화장품에 관심을 보이고, 직장인다워 보이려 입었던 와이셔츠 대신, 알록달록한 라운드 티셔츠를 집어 드는 나이가 되었다. 서로 떡볶이를 먹으며 성적, 대학, 이성 친구에 대한 고민 상담을 나누었던 시절. 이제는 떡볶이 대신 맥주가, 순수했던 궁금증들은 노후, 결혼, 연봉, 재테크 따위의 현실로 변해있었다. 그 와중에도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성질머리는 둘 다 어디 가지 않았지만, 낯선 서울 생활 속에서 아무 때나 부를 수 있는 편의점 땅콩 안주쯤은 되는 사이라는 걸 어느 정도 인정하긴 했다. 제일 싸고 만만하지만, 달달하고 고소한 땅콩 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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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두 이상하지 않아?”
“예뻐, 예뻐.”
지하철을 타러 계단을 내려가면서 묻는 말에 쳐다도 안 보고 영혼 없이 대답한다. 아까 집 앞에서부터 비슷한 질문 10번은 더 들은 것 같다. 안 예쁘면 집에 돌아가서 갈아 신고 올 것도 아니면서.
“서울은 세계적으로 지하철이 아주 잘 되어 있는 도시지.”
“누가 모르냐. 줄 똑바로 서.”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개찰구를 지나는 동안에도 아직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는가 보다. 스크린도어 앞 수도권 지하철 전체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송이는 자기가 내릴 곳까지의 정거장 수를 세고 있었다. 민준은 그런 송이를 한심한 듯 보며 줄이나 서라며 옷깃을 잡아당겼다.
“나도 이제 출근길 교통 체증에서 벗어나 지하에서 신나게 달려야지.”
“너 출근 시간대에 지하철 탄 적 없지?”
“음.. 아마도?”
“어휴..”
출근길 지옥철을 니가 아느냐. 차라리 차를 사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어째 나보다 서울에서 오래 산 사람이 그걸 몰라. 며칠 안돼 너는 곧 다시 차를 타고 출근하겠다고 할 것이야. 지하철이 지옥 같은 건지, 1000원 남짓한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만 하는 인생이 족 같은 건지, 너는 아느냐.
“........”
민준은 한심한 표정으로 송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왠지 파릇파릇한 신입사원처럼 느껴진다. 지친 표정이 아닌 한껏 기대에 찬 표정, 오랜만에 출근 시간대에 깨어있는 활기찬 모습. 그녀는 저보다 사회 생활을 몇 년이나 빨리 시작했는데, 그 찌들었던 몇 년간은 다 잊어버리고, 다시 출근한다는 게 저렇게 좋은가 보다. 나도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첫 출근할 땐 그랬는데. 무언가 새로 시작하는 마음은 누구나, 언제나, 다 그런 것 일까. 나도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용기가 없어 하지 못했던 일들, 젊은 날의 패기는 점점 사라져만 가는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딩딩딩- 잠시 후 열차가 도착합니다.
그러기는 무슨. 고작 직장인 2년차에 아직 학자금 대출도 다 못 갚은 주제에. 아주 잠깐 동안의 상상은 현실로 들어오는 열차의 알람 소리에 와장창 깨어진다.
“헐.”
들어오는 지하철 칸칸마다 가득 들어찬 사람들을 보더니 송이가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한다. 송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게 일상인 듯 아무렇지 않은 듯 했고, 민준도 그 중 하나였다.
“야, 이거 탈 수 있을까?”
“어. 다들 타.”
문이 열리고, 내리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타려는 사람은 그 몇 배다. 더 이상 자리가 없을 것 같은 곳에 신기하게도 하나 둘씩 발이 들여놓아진다. 송이는 아무렇지 않게 지하철에 타려는 민준 뒤에 바싹 붙어 졸졸 쫓아가다가 멈칫한다.
“그러지 말고 다음 꺼 타자. 이걸 어떻게 타.”
“늦었어, 그냥 타.”
민준은 벌써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문 앞에서 아직 망설이는 송이를 뭐하냐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꺼 타자니까- 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송이에게 민준은 눈썹을 찡그린 채 얼른 타라고 손짓을 했다.
“다음 꺼 금방 오잖아.”
“다음 차도 똑같이 사람 많아.”
“아니 그..으어어-”
안 그래도 아침에는 더더욱 짧아지는 인내심의 끈. 눈을 감고 한숨을 한 번 내쉰 민준은 이내 팔을 뻗어 문 앞에서 쭈뼛대고 있는 송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얼떨결에 끌려 들어온 송이가 민준의 가슴팍에 세게 부딪혀 눈을 질끈 감았다. 출입문 닫는다는 기관사의 안내 방송에, 민준이 문턱에 반쯤 걸친 송이의 구두를 발견하고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
곧이어 어찌할 새도 없이 송이의 등 뒤로 아슬하게 문이 닫힌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 무슨 일이 있든 냉정하게 출발해버리는 지하철. 얼굴을 마주 볼 수도 없을 만큼 민준에게 안겨버린 모양새가 되어버린 송이는, 민준의 어깨에 얼굴이 묻힌 채 커다래진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민준도 송이의 허리에 두른 손을 어찌할 수가 없어 그 상태로 어색하게 살짝 떼어내기만 해 허공에 그대로 멈추었다. 괜히 가까워진 얼굴에 한 여름의 열기가 확 느껴져 서로 고개만 반대로 돌린다. 이렇게 사람 많을 땐 냉방 좀 잘 해 달라고 내가 그렇게 문자를 보냈었는데.
“야, 천송이.”
“..뭐..왜.”
굳이 고개를 돌려 말하지 않아도 민준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로 직접 전해진다. 송이는 괜히 움찔하며 눈동자를 반대쪽으로 돌린다.
“느끼지 마라.”
“디질래.”
잠깐이라 생각했는데 하필 다음 정거장부터 반대편 문이 열린다. 공간이 생기기는커녕 점점 문 쪽으로 더 밀리기만 한다. 도대체 이 작은 칸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신기한 표정으로 감탄 아닌 감탄을 하던 송이가 문득 눈을 들어보니, 민준이 밀려드는 사람을 감당하지 못하고 팔을 문에 대고 버티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표정은 뭘 보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제 쪽으로 최대한 붙지 않으려 공간을 만들고 온 몸에 힘을 줘 버티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짜식- 또 꼴에 신경 써주기는. 혼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니 민준이 눈동자만 내려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왜 웃어.”
“아니? 안 웃었는데.”
“..크흠..”
어색한 공기의 흐름에 괜히 시비를 걸어보지만 말하는 것도 너무 가까워 이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그러고 꽉 들어찬 사람들 속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말도 없이 그 상태 그대로 멈춰있었다.
“........”
“........”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니 송이가 먼저 내릴 때가 되었다.
“나 내려야 되는데, 내릴 수 있을까.”
“여기서 사람들 엄청 많이 내리니까 걱정 마.”
역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인사도 할 새도 없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송이는 반대편 문으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여유가 생겨 몸을 돌린 민준은, 다시 출발하는 지하철 창문 너머에서 급히 출구 쪽으로 뛰어올라가는 낯익은 뒷모습을 찾았다. 인사도 안 하고 가냐, 첫 출근 잘하라는 말도 못했는데. 쩝- 민준은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며 창 밖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아까 문에 기대고 있던 팔이 뻐근해오는 것을 느꼈다. 팔을 주무르며 또 한 번 인상을 쓴다.
아, 내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데, 은혜도 모르는 저 꼬랑지. 진짜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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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똑. 평소보다 더 힘든 출근 전쟁을 치르고 와서는, 자리에 앉자마자 메시지가 날아든다. 천송이.
- 잘 들어감? 나는 잘 옴
아니. 니 땜에 아침부터 온 기운을 다 쓴 것 같다- 라고 중얼거리지만 딱히 내색하긴 싫다.
= 어. 출근길 지옥철을 맛보니 어떠한가
- 괜찮던데?
= 뭐? 그게 괜찮다고?
- ㅇㅇ
누군 내내 신경 쓰여서 용을 썼구만. 성의 없는 동그라미 두 개에 어이가 없다. 까똑. 연이어 울리는 알람 소리. 민준은 진동으로 바꾸는 버튼을 누르고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 도민준 니가 있잖아
이건 토끼가 아니고 토끼 탈을 쓴 단무지라고 송이가 알려줬던 이모티콘이 번쩍였다. 그 노오란 단무지 녀석이 맨날 데리고 다니는 초록색 도롱뇽인지 악어인지 뭔지를 꼭 끌어안고 있는 이모티콘에 풉,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래서, 내가 지금, 니가 데리고 다니는 쪼꼬만 이 악어라는 거냐??
“참 네..”
민준은 이모티콘 버튼을 눌러 방금 송이가 보내 온 단무지 캐릭터를 찾았다. 그 노란 녀석 옆에 항상 붙어 다니는 초록색 작은 악어. 단무지가 울면 눈물을 닦아주고, 우울해하면 위로해주고, 아프면 약도 주고 밥도 먹여주고, 맥주도 같이 마셔주고.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익숙해서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민준씨. 뭘 보길래 그렇게 웃고 있어.”
그렇게 뭔 미친놈처럼 혼자 웃고 있자니, 지나가던 노대리가 민준을 불러, 죄지은 마냥 얼른 핸드폰을 뒤엎고 돌아본다.
“아침부터 여친 만났어?”
“네?”
“옷에 립스틱 묻었어.”
고개를 돌려보니 얼마 전에 산 비싼 브랜드 하얀 티셔츠 어깨에 샛분홍색 입술이 진하게 박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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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어으..”
그 날 저녁 식사 시간이 막 지난 때. 집에 들어와 의미 없이 티비 채널을 돌리다 보니 재미없는 드라마만 주구장창 해대길래 쓰레빠를 찍찍 끌고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꺼내 물며 놀이터 앞 벤치에 앉으려니 뚜둑- 소리를 내는 무릎에 허리에,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직 이럴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올해 들어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역시나 뭘 해도 막바지라는 이름이 가져다 주는 느낌은 남다르다. 모든 게 나이 탓 같다니깐. 아홉수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지.
“흠...”
치익, 라이터 소리에 이글거리는 작은 불꽃을 보고 있자니 잠시 망설여진다. 담배도 슬 끊어야 하는데... 하지만 오늘 3대 밖에 안 피웠다는 생각에 하나 더 쯤은 괜찮다고 결론 짓곤 담배 끝에 불을 붙인다.
“담배 좀 끊으시지.”
그런 결론은 지은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힌다. 안 그래도 끊을 생각에 조금씩 줄이고 있는데, 누가 한마디 거들면 괜히 오기가 생겨 더 욱한다. 홱- 뒤를 돌아보니 키 큰 단무지 녀석이 오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진짜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웬일이냐. 한창 환영 회식에 떡실신 해 있을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럴 줄 알았지.”
“근데?”
회식하면 으레 고기 냄새를 풍기며 온갖 술을 섞은 폭탄주에 비틀거리며 귀가하기 마련이건만, 멀쩡해 보이는 걸음으로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와 옆 벤치에 따라 앉는다. 민준처럼 아이고, 으어- 하는 곡소리를 내며.
“패밀리 레스토랑 가서 고기 썰고 파스타 포크에 말아먹고, 환영합니다 짝짝짝 하고 끝이더라고.”
“건전한 회사네.”
“어. 게다가 드릅게 떫은 와인을 막 풍미가 어쩌고 하면서 홀짝 홀짝 마시는 거 있지. 감질 맛 나게.”
“술꾼 천송이 실망했겠네.”
“그래서 내가 요렇게 또 준비를 했지.”
높은 하이힐을 대충 벗어 바닥에 던져놓고는 벤치 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더니, 가방에서 맥주캔 2개를 꺼내 양 손에 들고 웃는다.
“그럼 그렇지.”
민준은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반대쪽 손에 멀찌감치 들고 있다가 이내 바닥에 떨구고 발로 비벼 껐다. 송이의 손에 든 맥주 캔 중 하나를 가져와 똑- 하고 딴 후, 다시 송이한테 건네고 나머지 캔을 받아 들었다.
“너야 말로 웬일이냐, 만사가 귀찮으신 분이 여기까지 나와서 담배를 피시고.”
“니가 나가서 피라매.”
“어이구, 그렇게 내 말 잘 들으셨쪄염?”
못된 손이 볼을 꼬집으려 다가오길래 얼른 몸을 기울여 피하며 그 손을 내쳤다. 다 큰 남자한테 불쾌하게 왜 이러셔. 민준도 집에 담배 냄새 베이는 게 싫어 아파트 복도에서 담배를 피다가, 송이가 하도 자기 집으로 연기 들어온다고 잔소리 잔소리를 해대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밖에까지 나와서 핀 지 꽤 됐다. 천송이가 자기한테 하는 잔소리는 의미도 없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습관이다. 내 얼굴 보기만 하면 뭐 트집잡을 거 없나, 반사적으로 나오는 습관. 그러니 지가 나가서 피라고 했던 말도 기억 못하고, 이제 와서 왜 이러고 있냐고 묻지.
“그럼 아쉬운 대로 남친이나 만나지 왜 이렇게 일찍 집에 기어 들어왔냐.”
“남친은 바쁘지. 평일엔 거의 야근이니까.”
“자주 만나냐.”
“음..그냥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그렇게 애절한 사이는 아닌가 보네.”
“대딩 시절 첫사랑도 아니고, 애절할 거 까지야.”
백수 시절 헌팅으로 만났다던 남친이랑 아직도 잘 만나나 보다. 키도 크고 훤칠하고 금융계에 종사한다던데. 송이의 휴대폰 잠금 화면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얼핏 본 것 같기도 한데, 자세히 본 적은 없다. 어렸을 땐 서로 누굴 좋아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외모며 성격이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 분석해가며 평가를 하곤 했었는데. 어디 조금이라도 기준에 모자란 상대를 만나면 마치 인생 다 망칠 것처럼 호들갑이었지. 지금 돌아보면 그냥 우리가 더 모자랐었던 건 아닌가 싶다. 뭐가 아쉬워서 누가 누굴 평가했던 건지. 지금은 누굴 어디서 어떻게 만나든, 니 알아서 해라-라며 서로 딱 한 가지 질문만 한다. '유부남 유부녀 아니지?'
Rrrr- 나란히 벤치에 가만히 앉아 맥주를 반쯤 비울 때 쯤 민준의 전화벨이 울렸다. 집주인 아줌마. 이 밤 중에 무슨 일이지, 눈을 굴리다 전화를 받는다.
“네, 아줌마.”
- 총각. 잘 지냈어?
“네, 잘 지내셨어요?”
- 어어, 나야 잘 지내지. 다름이 아니고.
“네.”
- 계약 기간 다 끝났잖여.
“아, 벌써 그렇게 됐나요?”
- 더 있을 거여, 말거여?
심드렁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송이의 표정에, 벤치에서 일어나 슬쩍 자리를 옮겨 조금 떨어진 곳에서 통화를 이어나갔다.
“뭐..저야 별 거 없음 여기 계속 있고 싶죠.”
- 그럼 전셋값 좀 올려줘야 쓰것는디.
“..얼마나요?”
- 삼천.
“네?? 삼천..이나요?”
놀란 목소리가 잠시 커졌다가, 핸드폰을 손으로 가리며 '삼천'이라는 단어를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낡고 오래 된 작은 아파트이지만, 한강의 이남 중심이라는 이유로 꽤나 비싼 이 아파트에, 안 그래도 무리해서 들어왔는데 거기서 더 올려달라니. 2년 전 부모님께 사정 사정해서 전셋값의 일부를 빌려 돈을 마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2년이 지나면 다시 돌려드리고 제 돈으로 살아보겠다고 약속 드렸었는데. 제 돈으로 살기는 개뿔. 학자금 대출에, 비싼 서울 물값에, 꼴에 직장인이라고 막 질러댔던 것들이 머리 속에 둥둥 떠다녔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월급 차곡 차곡 모아, 2년이면 돈이 잔뜩 불어난 통장을 만기 해지하며 기뻐할 줄 알았지. 현실은 물가 상승률 보다 적은 이율, 내가 사기만 하면 폭락하는 주식. 들어오자마자 카드 값으로 빠져나가기 바쁜 월급. 아, 끝을 향해 달려가는 20대의 현실은 이러하다. 아홉수라 그런가. 원래 다 그런 건가. 서른이 되면 뭔가 달라질까.
“아줌마, 삼천은 좀..”
- 그럼 딴 사람 알아봐야지. 요즘 재개발된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런가 집 값이 많이 올랐어.
“아....”
무슨 일만 있으면 '아홉수라 그래' 를 연발하게 되는 20대의 끝. 19살 땐 그런 말이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아닌 건 아니라고 세상아 나랑 싸우자고 멋도 모르고 반항했었는데. 29살이 된 지금은, 모든 것을 아홉수라는 것에 떠넘기고 나 몰라라 모르는 척 한다. 이미 한참 전에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고, 어른임을 과시했었다.
“..생각해보고 전화 드릴게요.”
- 그려, 얼마 안 남았어. 얼른 연락주게.
하지만 앞자리 3이라는 현실이 주는 무게는 잠시 그것을 의심케 만든다. 그것을 피해가려는 몸부림 속에 우리는 정녕 어른인 걸까. 정말 다 커버린 걸까.
“...캬- 맥주 죽인다.”
뭣도 모르고 맥주만 홀짝대고 있는 친구, 그저 여자인 친구, 옆집 사는, 천송이를 바라본다.
노란 단무지야, 너는 아니? 그 쪼꼬만 악어가 너를 키웠다더라. 걔가 없으면 넌 어떨 것 같아? 항상 너의 뒤에 있던 그 녀석, 말이야.
첫 번째 에필로그
2012년 7월 7일 새벽 2시 25분.
앞머리를 바싹 올려 머리띠를 하고 뺑글 뺑글 도수가 꽤나 높아 보이는 안경을 낀 채, 거실 낮은 탁자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모양새가 딱 흔히 말하는 건어물녀다. 송이는 한 손에는 맥주 캔, 한 손은 노트북 방향키 쪽에 놓고선 한 철 지난 인기 미드를 몰아 보고 있었다. 와, 나 진짜 대박. 나 이걸 왜 지금 봤지-라며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봤던 장면 또 돌려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이런 일상은 익숙했다. 특히나 남자 친구가 없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가끔 만나자는 친구들의 연락도 은근히 귀찮아하며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이렇게 집에만 쳐박혀서 보내곤 했다. 약속만 있다하면 서로 경쟁적으로 화려하게 입고 진한 화장을 하고, 은근히 명품 가방을 자랑하며, 평소 듣지도 않는 재즈 음악이 흐르는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꼴은 이제 꽤나 지겨워졌다. 안주 3개에 만원 하는 어두운 호프집에서 물 탄 맥주나 마시던 애들이 돈 좀 번다고 유난 떨긴- 그냥 집에서 이렇게 편한 차림으로 맥주나 까는 게 최고지. 암, 그렇고 말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혼잣말 하는 건 좀 우습지만.
평소와 마찬가지도 그 날도 그냥 그랬다. 별 거 없는 날이었다.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날들 중에 하나였다. 드르륵. 탁자 위에 올려둔 전화가 울렸던 것도 바로 그 때였다. 이 시간에 웬 전화, 하고 보니 엄청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떠 있었다.
도민준.
“......?”
뭐야 이시키. 죽은 거 아니었어? 알 수 없는 의심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며 노트북의 스페이스바를 눌러 영상을 잠시 정지시키고 계속 받아달라고 재촉하는 진동에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쯤, 통화 버튼을 누른다.
“뭐냐.”
- 야아- 천송이. 오랜만이다아.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 이게 2년만이라는 걸, 이 자식은 아는 걸까?
“연락도 없던 놈이. 죽었나 했더니 갑자기 웬 전화질?
- 야.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했는데 쌀쌀맞게 그러기냐.
송이도 수화기 너머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마치 어제도 본 것처럼. 항상 불현듯 생각하곤 했다. 오랜만에 연락하게 되면, 뭐라고 해야할지, 예전처럼 만날 수 있을는지, 여러 차례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봐도 실전은 늘 그렇듯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언제는 다정한 말 주고 받는 사이였니?”
- 나 취직했다.
“아직도 안 하고 있던 거였어?”
- 야.
“그래서 술 한 잔 하셨구만? 목소리가 한껏 업 된 걸 보니.”
- 어. 맞아, 한 잔 했어.
“근데 왜 하필 나한테 전화질이야. 너 친구 많잖아.”
- 그냥. 연락처 켜서 끝에서부터 아무나한테 전화했는데 아무도 안 받네.
“........”
- ...늦은 거 아니지?
“어. 안 자고 있었어, 나도. 그래도 이 천송이님이 받았으니 선방했다, 인간 도민준.
- 받아줘서 고호맙다.
“취직은 어디로 했는데.”
- 서울.
“올. 서울 상경하겠네, 촌놈.”
- 그래- 그래서 말인데, 천송이.”
“뭐.”
- 너 어디 살아? 나도 집 알아봐야 하는데.
그 때는, 연락처 끝에서부터 아무나에게 연락하다 우연히 내가 전화를 받았다는 말을 믿었다. 이 자식은 시험 볼 때도 무조건 뒤에서부터 푸는 습관이 있었으니까. 오름차순보다 내림차순을 더 좋아하던 자식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날, 이 자식이 ㄱ부터 전화했더라면 어떻게 됐었을까. 이렇게 내 옆집에 살았을까, 이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자식 말고 다른 훈훈한 이웃과 얼굴 맞대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저 이 자식의 바보 같은 습관이 무서운 거고, 내 이름이 ㅎ과 가까운 ㅊ으로 시작하는 게 문제였을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스물 아홉의 어느 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늦은 시간. 도민준이 굳이 연락처 속 내 이름을 선택한 이유를, 아무렇지 않게 연락해와 늦지 않았냐 물었던 이유를. 그리고, 2년 동안 연락을 하지도 받지도 않던 괘씸한 도민준이라는 이름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받아들인 나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