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後我有 3 본문

# 後我有 3

SCIENCE AND LOVE 2015. 7. 7. 20:11


後我有 

세 번째 이야기

 

 

 

 여지없이 시작된 월요일 출근길. 민준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나와 집 앞 복도 난간에 기대어 밖을 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구나. 낮엔 얼마나 더우려나 -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고 있으니 송이가 옆 집에서 나온다.

 


“가자.”
“언제쯤 먼저 나와서 기다릴래?”
“꼭 그래야 해?”
“..말을 말자.”

 


 언제나 대화의 시작은 시비, 불만, 짜증. 월요일에 더운 날씨까지 부정적인 기운을 한껏 북돋아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가고, 지하철 역까지 걷는 동안 눈만 마주치면 그렇게 노려보다가도 부탁하거나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빵끗 웃으며 어깨를 터치해 온다.

 


“도민준, 우리 저녁에 집에서 영화 보자. 전에 니가 보고 싶다던 거 DVD 빌려놨는데.”
“나 바빠. 이번 주부터 완전 야근이야.”
“내가 맥주에 안주 세팅까지 다 해놓을게, 응?”
“뻥 아니고 진짜 바빠. 프로젝트 막바지라서.”
“흠.. 어쩔 수 없지.”

 


 얼마 전에 사운드바를 샀다더니, 자랑하고 싶어서 영화든 음악이든 뭐든 틀어보고 난리다. 난 잘 모르겠는데, 음질이 뭐가 다르다는 건지. 영화가 목적이 아니고 사운드바 자랑이 목적이면서, 꼭 지 필요할 때만 나를 찾아요. 딱히 늦은 것도 아닌데, 바쁜 사람들 틈에서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면 큰일 날 것 같은 지하철 입구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다가 문득 지난 금요일이 떠올랐다.

 


“근데 지난 금요일날 만난 니 친구들 중에 뭐 연락 없냐?”
“뭔 연락.”
“나 소개시켜주려고 불러낸 거 아니야? 그 중에 나 괜찮다는 사람 없었냐고.”
“없어.”

 


 냉정하게 말하며 개찰구를 먼저 쏙 빠져나가는 송이의 뒷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 이내 뒤따라간다.

 


“진짜 없어?”
“어, 없어.”
“나한테 호감 표시하는 사람 있었는데..그..”
“없다니깐! 내 친구들 다 너하고 안 어울려.”

 


 바글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늘 줄을 서는 5-4 칸 앞에 줄을 서자마자, 갑자기 큰소리를 내지르는 송이 때문에 주변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없으면 없지, 왜 화를 내냐- 라며 민준은 잠시 뻘쭘해졌다가 이내 살짝 기분 나쁜 내색을 한다.

 


“니 친구들 너랑 달리 눈이 높으시네. 내가 별로라니.”
“얼씨구, 몇 년간 여친도 없으셨던 분이 뭔 자신감. 그리고 내가 눈이 낮아?”
“요즘에 현실 자각하고 눈 좀 낮춘 거 아니야? 니 남친 니가 만났던 사람 중에 얼굴 제일 별로던데.”
“뭐? 그게 뭐가 별로냐. 나 눈 높거든??”
“게다가 직업도 금융권이라길래 메이저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만. 아, 설마 사채 쪽은 아니지?”
“야.”


 

 먼지 바람을 몰며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열차 소리에 송이는 그저 민준을 흘겨보며, 그 입 닫으라며 입에다 지퍼를 닫는 시늉을 한다. 뭐, 뭐. 입 닫으라고 진짜 닫을 리가 없다. 민준은 고개를 들고 턱을 내밀며 송이의 속을 더 뒤집어 놓는다. 어우, 저 재수없는 입. 송이는 먼저 열리는 지하철 문 안으로 들어가는 민준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뒤따라 탔다. 아마 오늘 벌써 서로 노려본 것들을 합치면 뒤통수들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송이는 평소 같으면 민준의 앞에 바싹 붙어 갔을테지만, 왠지 신세(?)지기 싫어 민준의 옆에 나란히 섰다. 벌써부터 사람들의 부대낌이 느껴진다.

 


“야, 천송이.”
“........”

 


 제 옆에 선 천송이를 얼척 없다는 듯 쳐다보던 민준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이름을 불렀다. 송이는 대답도 하지 않고, 쳐다도 보지 않고 입술만 삐죽 내민 채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남자랑 살 맞대면서 갈래, 지금 잠깐 꼴보기 싫은 나랑 갈래?”
“........”

 


 싫음 말고- 저는 손해 볼 게 없다는 말투로 말하자 송이가 더 째진 눈을 하고 홱, 민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민준이 눈동자만 내려 송이를 보더니, 고갯짓으로 제 앞을 가리켰다. 민준이 살짝 공간을 남겨둔 자리.

 


“빨리.”

 


 송이가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뒤에 땀냄새를 풍기고 있는 남자의 기분 나쁜 입김이 느껴졌다. 아, 젠장.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민준을 노려본 채 발만 옆으로 옮겨 민준의 앞으로 쏙 들어갔다.

 


“난 니 남친 아니니까 튕기지 마라.”
“꺼져.”

 


 뭐라고 계속 궁시렁 대며 제 코 바로 밑에 서 있는 정수리를 내려다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피식 내뱉어지는 콧김에 송이의 머리카락에서 늘 나는 샴푸 향이 살짝 퍼졌다. 민준은 옆에 바짝 붙어오는 사람 사이로 몸을 틀어 가로 막고, 반대쪽 팔로는 기둥을 잡아 제 앞의 그녀만의 작은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송이는 말없이 손에 핸드폰을 들고 인터넷 기사를 보더니, 슬슬 몸을 뒤로 기대온다.


 몇 정거장 지나니 아예 민준의 몸이 벽인 마냥 편하게 기대서 수시로 해대는 작물 키우는 게임을 한다. 다 자란 쌀을 빠른 터치로 수확하는 걸 보면서 참 어이가 없다. 이래 놓고 나중엔 인사도 없이 쌩하니 삐졌다는 걸 온 몸으로 티 내면서 내릴 게 뻔하다. 니가 나한테 삐져서 뭐 할래. 그깟 독설쯤에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그렇다고 오고 가는 독설이 다정해질 리도 없고, 그 독설이 진심이 아닌 것도 뻔히 다 알면서.

 


“...참 네.”

 


 민준은 내리깐 시선 아래, 쌀 다음엔 뭘 심을까- 고민하는 송이의 긴 속눈썹과 앙 다문 입술을 본다. 늘 생각보다 더디게 가는 것 같았던 지하철이 오늘따라 빠르게 달린다.

 





 

 

#


 오늘부터 빡세게 야근 할 줄 알았는데, 해야 할 일과 관련된 자료가 내일 오기로 해서 생각보다 일찍 퇴근했다. 민준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담배 한 대 피고 가려 늘 앉던 벤치에 앉았다. 아, 일찍 퇴근해도 할게 없네.  뭐 취미라도 가져볼까. 운동? 악기? 영화? 아, 아침에 천송이가 말했던 DVD 다시 같이 보자고 할까.

 


“아..왜 다 아줌마야.”

 


 괜히 핸드폰 최근 목록에서 천송이를 찾다가 목록 가득 쓰인 '주인집 아줌마' 라는 글자에 짜증을 느끼며 화면을 꺼버렸다. 매일같이 주인집 아줌마 전화는 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확실히 결정하지 못했다. 아니다. 새로 집을 알아보려고 했던 거 아닌가. 그렇게 다짐했던 것 같기도 한데, 바쁘다는 핑계인 건지 어쩐 건지, 우선 순위에서 밀어내버렸다.

 


“...후..”


 

 언제 답답한 한숨을 내쉬지 않을 날이 올런지. 내일은 점심에라도 짬을 내서 부동산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벤치에 축 기대어 고개를 들고, 앞니 끝에 아슬하게 달려있는 담배 끝에 타오르는 불빛을 본다. 그 불빛에 맞춰진 초점이 점점 흐려지다 저 앞에서 나타나는 천송이에게 맞춰진다.

 


“야, 천송..”


 

 무심결에 입에 물린 담배를 손에 빼들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 송이 옆에 같이 따라오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제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린 송이와 눈이 마주치자, 송이가 아침에 봤던 그 째진 눈을 하고서는 혀를 낼름 내민다.

 


“뭐야, 아직도 삐졌냐.”

 


 어쩐지 일과 중 한 번씩은 쓰잘데기 없이 오는 문자 하나도 오늘은 없더라. 남친에 대해 안 좋은 말 한 번 좀 했다고, 나 보란 듯이 집에까지 남친을 데리고 오셨겠다? 민준은 어이없는 헛웃음을 짓고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팔짱을 끼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니 더 큰 헛웃음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남친하고 사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집에 들여?”

 


 옆집 사는 2년 동안 남자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잠시 후 아파트 6층을 올려다보니 604호에 불이 켜진다. 아, 발랑 까진 년.

 


“.......”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알싸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진다. 짧아진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주머니 속 담배갑을 꺼냈다. 딱 한 개 남은 담배를 망설임 없이 꺼냈다. 요새 시집갈 돈을 모으니 어쩌니 하더니, 설마 진짜 결혼할 생각인가. 남친 얘기할 때 딱히 진지한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그냥 때가 맞으니까 하려는 건가. 천송이가 그럴 애가 아닌데.

 

 

'결혼은 진짜 운명적으로 만나서 불 같은 사랑을 한 사람과 해야지.'
'환상이 크시네, 천송이.'
'뭐 어때. 인생에 딱 한 번 뿐인 건데 환상 같으면 어때.'
'예를 들면?'
'음.. 예를 들면.. 끈적이는 한여름의 동남아 같은 곳에서 혼자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과 짧은 사랑을 불태우는 거지.'
'아, 더워.'
'그러다 한국에 돌아와서 매일같이 그리워하지만 만날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다가.. 사람이 많은 강남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거야!'
'...지인짜 환상이구나.'

 

 

 운명, 우연, 이런 단어가 너무 좋다며 소녀 같은 얼굴을 하던 천송이가. 정말 그냥 나이가 차서, 지나가다 만난, 2살 많은 평범한 직장인 남자와 결혼을 할 거란 말이야? 아님 정말 그 남자를 사..사랑 그런 건 한단 말이야?

 


“에휴..”

 

 

 18살의 우리에겐 영영 없을 줄 알았던 현실. 아직 나는 일말의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현실. 결혼. 나도 이제 이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주말마다 주변 친구들의 결혼식장에서 5만원을 내고 갈비탕을 먹는 현실? 소개팅이 아닌 선을 봐야 하는 현실? 여자를 만나기 전에 결혼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현실?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천송이가 유부녀가 된다는 사실? 한 남자와 행복하게 살다가 애도 낳고 그렇게 늙어갈 거라는 거?

 

 딱 담배 한 대만 더 피고 싶었지만, 방금 핀 게 마지막이라 손에 잡히지 않을 때까지 바싹 태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많은 집 중에 괜히 더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 같은 604호를 애써 외면한 채,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친구 한 명 결혼한다고 친구가 남이 되나, 뭐. 우리 사이에 별 거 있나? 저녁에 가끔 맥주 한 잔 같이 하고, 밥 같이 먹을 사람 없으면 같이 먹고. 출근이야 뭐 어쩌다 보니 같이 하는 거고. 수시로 까똑해대는 거야 뭐, 원래 천송이 지 혼자 재잘 재잘대고 난 대답 잘 안 하니 상관없고. 그거 말고 뭐 있어? 

 

 집에 와서 샤워를 하려 욕실 안에서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거울 앞에 멀뚱히 서 있는 제 모습이 보였다.

 


“........”

 


 아, 정말 천송이랑 나랑 별 사이 아니구나. 맥주도 혼자 마실 수 있고, 밥도 혼자 먹을 수 있는 건데. 그거 말곤 없구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이구나. 없으면 그냥 아주 조금 아쉽겠지만, 아쉽다고 굳이 힘들게 찾지는 않는. 별 거 없는 사이구나.

 


“도민준, 너 요새 왜 이렇게 혼잣말을 많이 하냐.”

 


 9라는 숫자가 점점 차오를 수록, 혼잣말만 늘어난다. 누구에게 하지도 못할, 제 자신도 인정하기 싫어지는, 혼잣말. 젠장.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작은 집이 매우 조용하게 느껴진다. 티비를 틀어놓는 사람 중의 대부분이 혼자이거나 조용한 게 싫어서라던데. 혼잣말 하지 말고 드라마 주인공들이 대화하는 거라도 듣자 싶어 리모콘을 찾는다. 주변을 둘러봐도 안 보이는 리모콘을 찾으러 소파 위 쿠션을 들춰보고 있는데, 벽 너머로 꺄르르-하는 웃음 소리가 들린다.

 


“......?”

 


 방금 잘못 들었나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벽에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다시 한 번 조용한 거실 벽을 타고 들려오는 웃음 소리. 여기 원래 방음이 이래 잘 안 됐냐? 아님 평소 늘 티비나 음악을 틀어놨던 지라 들리지 않았던 게 조용한 틈을 타 들리는 건가. 민준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소파 틈 사이에 끼워져 있는 리모콘을 낚아 채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주 신이 나셨구만. 웃음 소리도 보통이 아니네, 지가 언제 호호호 이렇게 웃었다고. 민준은 가식적인 송이의 웃음 소리를 따라하며 소파에 기대 누워 채널을 돌렸다. 뭐 이렇게 볼 게 없는지, 몇 십개가 되는 케이블 채널들을 다 돌리고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결국 그냥 아무 드라마에 멈추고 리모콘을 던져버렸다. 무슨 내용인가 티비에 집중해보려 해도 자꾸 웃음 소리만 들린다. 티비 볼륨을 올린다. 그럼 따라서 웃는 소리도 같이 커진다. 볼륨의 + 버튼을 더 마구 마구 누른다.

 


“아악!! 진짜 싫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웃음 소리인지, 천송이의 웃음인지 헷갈리는 그 깔깔대는 소리가 귓가에 자꾸 맴돈다. 귀 속을 긁는 듯한 그 소리에 민준은 벌떡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항상 냉장고에 있던 맥주가 마침 없다. 없는 걸 보니 속이 더 탄다. 목이 더 바싹 마른다.

 



 

“젠장. 왜 이렇게 더워, 열대야인가?”


 

 식탁 위에 있던 지갑을 집어 들고 맥주를 사러 밖으로 나갔다. 500ml 짜리 큰 맥주 캔 2개에 담배 몇 갑을 사 들고 편의점을 나오며, 민준은 들어가서 인터넷으로 이사 갈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급하게 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차근 차근 생각해보자. 일단 계속 아파트나 빌라에 살 건지, 원룸에 살 건지 생각해보고. 어디 지역이 괜찮은지 서치 좀 해보고, 가격이랑 교통이나 이런 거 좀 고려해서. 경기도 쪽이 나으려나..? 출퇴근 시간은 좀 길어지겠지만, 아마 이 아파트라고 부르기도 뭐한 낡은 곳 보다 훨씬 좋은 데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천송이도 술 취해서 아무 때나 불러대는 짓거리는 쉽게 못 하겠지.

 


“...뭐야.”

 


 까만 봉다리를 흔들 흔들 하며 다시 입구 쪽으로 들어서다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보니 604호 불이 꺼져있다. 찍찍 끌던 쓰레빠 소리가 멈칫하였다. 바스락거리던 까만 봉다리 소리도 멈추었다. 설마, 벌써. 에이.


 

“저게..”

 


 발랑 까진 년, 존심도 없는 년, 쉬운 년, 월요일부터 남친 집에 불러들여서 그러면 좋으냐? 어? 민준은 괜히 밀려오는 짜증에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정말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데 이 꼴로 딱히 갈 데도 없다. 그게 더 짜증이 난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며 죄 없는 옆집 문을 뚫어지게 노려보지만, 불 꺼진 604호는 대답이 없다.

 


“그래, 좋겠다. 즐겨라 즐겨.”

 


 냉장고에 맥주 한 캔을 넣고 나머지 한 캔은 바로 따서 한 모금 벌컥 들이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느껴지는 씁쓸하고 싸한 맛. 이거 때문에 담배랑 술을 둘 다 못 끊는다. 내가 기필코 이사를 가고 만다. 갈 거다, 가야만 한다. 내가 괴롭지 않으려면 천송이 곁을 벗어나야 한다.

 

 

“부천..서울하고 가깝고 교통도 나쁘지 않음. 아, 근데 너무 서쪽인데.”
“분당? 아 여긴 졸라 비싸.”

 


 민준은 인터넷 창에 지도를 켜놓고 뚫어지게 쳐다봤다. 서울을 둘러싼 수도권 도시들을 하나 둘씩 짚어보는데, 꼭 뭔가 하나 둘씩 아쉽다. 포털과 자주 가는 사이트, 카페 같은 데에서 이리 저리 검색을 해봐도 완벽한 정답이 안 나온다. 하긴 완벽한 정답이 되려면 돈이 많아야겠지.. 하며 기운 빠진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린다.

 


“........”


 

 거실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자니 괜히 또 반대편 벽이 신경 쓰인다. 보이지 않는 저 벽 너머로 천송이와 그녀의 남친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른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웃던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진다. 두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입술이 닿고, 남자의 손은 천송이의 허리를 맴돌다 블라우스 속으로 들어간다. 천송이의 몸이 점점 기울어져 소파에 눕고, 그 위로 남자의 몸이 밀착해 온다. 블라우스로 들어갔던 손이 이번엔 치마 속을 향한다. 말려 올라간 치마 속에 보이는 허벅지에 천송이가 발그래진 볼을 하고선 부끄러운 듯 살며시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러자 남자가 웃으며 천송이의 몸을 번쩍 안아 든다. 남자가 방으로 향하며 거실의 스위치를 끈다. 탁.

 


“어우, 시발. 돌았냐.”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미쳤구나, 뭘 상상하는 거냐, 도민준. 민준은 노트북 옆에 있던 맥주 캔을 입에 갖다 대고 고개를 젖혔다. 하지만 몇 방울 떨어지고 없는 맥주. 하. 복잡한 머리 속만큼 맥주 캔을 구겨버리고는 옆으로 집어 던졌다. 나란히 놓여있는 구겨진 맥주 캔 2개.
 맥주 2캔에 흐려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인터넷 창을 쳐다보았다. 땅 값이 어쩌고, 월세가 전세가 어쩌고 하는 뉴스 기사들 보다 그 옆에 빨갛게 야한 광고 배너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거의 헐벗은 여자들의 아슬한 사진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그런 광고들이 왜 이렇게 많은 것 같은지. 빨갛고 노랗고 살색인 그 작은 사진 속의 여자의 얼굴에 자꾸 천송이가 겹친다.  



“아.”

 


 민준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노트북 화면을 탁 덮었다. 그 위로 머리를 박고는 눈을 감았다. 보통 맥주 2캔이면 취하진 않는데, 급하게 마셨더니 취기가 확 올라온다.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아 다시 몸을 일으켰다. 트름을 짧게 하고는 가슴을 두드리며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덥다. 답답하다. 바람이 하나도 불지 않는다. 현관문을 열어야 바람이 들어올 것 같아 이사 갈 집에서는 반드시 에어컨을 사고 말리, 다짐하며 현관 쪽으로 가 문을 벌컥 열었다.

 


“엄마야, 깜짝이야.”


 

 현관문을 열고 도어스토퍼를 발로 고정 시키고 있는데 옆집에서 천송이가 튀어나온다. 민준이 나와 있는 걸 보고 흠칫 놀란 송이가 문을 닫고선 슬리퍼를 찍찍 끌고 다가온다. 늘 입던 그 짧은 반바지에 더러운 티셔츠, 뺑글거리는 안경을 쓰고 있는 걸 보니, 남친은 집에 갔나 보다. 그러니 저러고 있지.


 

“뭐야, 어디 가?”
“아니, 그냥 더워서 문 열려고.”
“아..”

 


 오늘 아침부터 민준에게 쭉 삐졌다는 티를 좀 냈던터라, 송이가 눈치를 보며 머쓱하게 말을 걸어온다. 아까 집에 들어갈 때 송이가 민준을 노려봤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반대로 민준이 송이를 노려본다. 아마 송이는 민준이 저를 보는 눈에 무언의 반항이 섞여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민준은 즐거웠냐, 좋냐, 이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유치한 것 같아서 그만 두기로 한다.

 


“너는 어디 가는데.”

“어, 택배 찾으러 경비실에.”


 

 송이는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고선 민준의 앞을 스쳐 지나간다. 민준은 현관 손잡이를 잡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너 술 마셨구나.”

 


 중앙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며 뒤도 안 돌아보고 말한다. 팔을 휘저으며 어그적 어그적 아저씨처럼 걷는 천송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평소엔 높은 하이힐을 신고도 똑바로 예쁘게 잘 걷던 걸음이, 저 복장에 저 쓰레빠를 신으면 귀신같이 팔자 걸음으로 변한다.

 


“....어.”


 

 이미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진 천송이의 뒷모습에 대고 대답한다.

 

 나 요즘에 너한테 할 말을 다 못 하는 것 같아. 있는 말 없는 말 시시콜콜한 말 하나하나, 습관처럼 너에게 하곤 했었는데. 요샌 너에게 할 말이 뇌를 거치다가 버퍼링에 걸려 나오질 않는다. 그 말들이 무엇을 그렇게 망설이고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어. 머리 속에서 그렇게 복잡하게 엉키고 얽힌 그 말들과 그 생각들 때문에, 다른 생각도 잘 안 나. 뒤에 길게 줄 서 있는 일들이 많은데, 빨리 가라고 재촉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꽉 막혀 앞으로 나아가질 않아. 나이를 하나씩 먹을 수록 하루 하루의 시간들은 쏜살같이 더 빠르게 지나가버리고, 천천히 생각할 시간도 없이 모든 것을 빠르게 결정해야만 해야 하더라. 나에겐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은데, 그 복잡한 머리 속을 정리해야만 할 것 같은데, 현실은 이런 나 같은 건 기다려주지도 않더라.

 그렇게 조급하고 부족한 시간 속에서 난 완벽한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

 


 민준은 복도 난간에 팔을 올리고 몸을 앞으로 기대 밖을 내려다 보았다. 찍찍 - 경비실에서 큼지막한 박스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난 천송이의 쓰레빠 끄는 소리가 아파트에 울려 퍼진다. 느릿 느릿 팔자 걸음을 걷던 송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집 쪽을 올려다본다. 복도에 보이는 민준을 보고 손을 흔든다.

 


“...뭐가 좋다고 웃냐..”

 

 

먼 곳까지 찾아 헤매였는데, 그 정답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면 어떡하지. 기껏 어렵게 찾았는데, 내가 너무 늦은 거면 나는 또, 어떡하지.

 

 

 

 

 

 

 

 

 




 



 세 번째 에필로그


 


2005년 6월 25일 토요일 오후.

 

 

“안녕하세요, 송이 친구 도민준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카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한쪽엔 민준이, 반대편엔 송이 옆에 선 송이의 남자친구가 어색하게 서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었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남자친구 한 번 제대로 사귀어보지 못했던 천송이가 처음으로 사귄 남자. 남자는 남자가 봐야 한다는 말을 또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송이는 민준에게 자기 남친 한 번 봐 달라고 자리를 마련했다.

 


“나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뭐 시키고 있어. 난 아무거나-”
“어, 알았어.”

 


 화장실 가는 척 하면서 자리를 비울 테니, 그동안 이것 저것 좀 물어보고 사람이 어떤지 좀 판단해보란다. 아니 이 짧은 시간에 내가 누굴 판단하라는 건지. 그렇게 못 믿을 거면 왜 만난대.

 


“...크흠.”
“........”

 


 대학 입학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드는 온갖 남자들 사이에서, 대단하신 천송이가 선택한 남자. 3살 많은 복학생. 그래, 곧 군대 갈 애송이보단 복학생이 낫긴 하지만, 그냥 여자에 굶주리기만 한 아저씨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수 십 번도 더 했더랬지. 카페 실내를 구경하는 척, 눈을 돌리며 은근 슬쩍 쳐다보니 뭐- 나름 스타일 깔끔하고 멀쩡한 게, 아직 병장병 못 고친 아저씨는 아닌 듯 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어색함이 한계점에 다다를 때쯤 다행히도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온다.

 


“뭐 드시겠어요?”
“저는 모카라떼요.”
“모카라떼 1잔이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 주세요.”
“어- 송이 아메리카노 안 먹는데. 모카라떼 2잔이랑 아메리카노 1잔이요.”

 


 민준은 송이의 남친 대신 주문을 하고서는, 아리송한 표정을 한 건너편의 낯선 남자를 보고 무슨 일이냐는 듯 슬쩍 미소를 보였다.

 


“송이랑 만난지 얼마나 되셨죠?”
“곧 100일이예요. 도민준씨는.. 송이랑 언제부터 친구셨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요. 같은 반이었죠.”
“아..얼마 안 된 거네요. 저는 송이가 하도 얘기하길래 엄청 오래된 친구인 줄 알았는데..”
“뭐 언제 만난 게 중요 한가요.”
“학교도 서울이신가 봐요? 혹시 우리 학교 다니시는지?”
“아, 학교는 다른 데예요. 뭐 어쩌다 보니 같이 서울에 올라왔지만.”
“자취하시나요?”
“아니요. 학교 기숙사에 있어요.”

 


 뻣뻣하게 카페 의자에 앉은 채 송이의 남친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자니, 민준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는 건지..? 왜 내가 취조 당하고 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민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송이 남친의 질문에 계속 대답을 하고 있었다.

 



 

#

 

 그 날 저녁, 민준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격양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 야, 도민준. 남자도 생리하냐?
“뭔 소리야.”
- 아이씨. 오빠가 오늘 내내 멀쩡하다가, 저녁에 집에 데려다 주는데 갑자기 막 틱틱대고 승질내고 그러는 거야.
“아..그래?”
- 아까 내가 뭐 잘못 했나? 너 만났을 때 내가 뭐 잘못하디?
“아니? 그냥 별 거 없던데.”
- 그치? 아,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네. 남자가 말이야, 뭐에 삐졌는지 말도 안 해주고.
“그러게. 쪼잔한 남자네.”
- 확 헤어져버릴까.
“뭐?”
- 으으 곧 100일인데...

 


 민준은 갑자기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에,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눈치를 살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야, 그래도 100일 선물은 받아야지- 크큭.”

 


 민준은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수화기 건너 들리는 쫑알 쫑알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두워진 길에 서늘한 초여름의 기운을 느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걸음을 천천히 늦추었다. 그렇게 많은 말을 매일 하면서도, 또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민준은 천송이의 한풀이가 길어질 것 같아 가던 길을 멈추고 눈에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이제 같은 학교도 아닌데, 같은 동네 사는 것도 아닌데, 이제는 20살인데, 너에겐 첫 남친이 생겼는데. 그래도 이렇게 변함없이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참...


 어, 그래, 맞아, 그렇겠네, 별로, 응, 그랬어? 아니, 어, 어.. 민준은 하는 말도 없이 뜨거워진 수화기 너머로 '내가 네 말 잘 듣고 있다'는 증거로 짧은 대답만 전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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