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이사 본문
이사
This fiction is dedicated to dear my
"My love from the star"
"그러니까, 지금, 네 드레스룸 때문에."
"어."
"내 서재 반을 비우라고?'
"어!"
깔끔한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민준의 집이 여기저기 어지럽혀져 있다. 커다란 박스들이 집 곳곳에 널브러져 있고, 바닥엔 쓰다 남은 테이프들이 먼지와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소파도 이미 두꺼운 비닐로 씌워져 있어 송이와 민준 두 사람은 어지러운 바닥에 대충 앉아있었다.
"됐어. 이사하지마. 각자 살어. 내가 월세 내줄게."
"아, 그럼 공간이 안 나오는데 어쩌라고오-"
주방에서 그릇들을 모조리 꺼내와 신문지로 하나하나 싸고 있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버럭 성질을 내며 들고 있던 그릇을 테이블 위에 댕그랑 던져놓는 송이를 보고 민준의 눈동자도 커진다. 내가 말했지! 이게 그냥 그릇이 아니라고, 무려... 아 됐네요, 됐어. 영감같이 진짜. 그 놈의 조선시대 이야기 지겹다며 던져 놓은 그릇을 다시 들고 신문지로 싸기 시작했다.
"그 옷들, 그 가방들, 그 신발들 다 쓰는 것도 아니면서. 그걸 줄이면 되잖아."
"도민준씨, 지금 나의 소중한 아가들을 버리라는 거야?"
"뭐? 아가? 참 네. 전엔 잘도 내다 팔더만."
"그 때 내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는지 알아? 이제 다신 안 팔 거야."
이사 3일 전.
그 언젠가 서로 마주 앉아서 얘기했던, 우리 마당 있는 집으로 가서 살자던 약속은 꼭 지키고자 해서 했던 말은 아니었다.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꿈이라도 꾸고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려 보았던 미래. 그 꿈을 잊지 못해 매일 매일 어둠 속에서 혼자 울던 송이에게로, 민준은 약속을 지키러 와주었다.
마당 있는 2층 집에서 일곱 명의 딸과 강아지와 함께 뛰어 놀고, 한 쪽에선 텃밭을 가꾸고. 너무나도 평범하지만 함께 할 수 없어 그리워하기만 했던 꿈을 이루기 위해 민준은 돌아왔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었던 그 길을 가기 위해 죽을 만큼의 노력을 했다. 물론, 그 꿈이 정말 현실로 다가오자 송이는 딸 일곱은 안되겠다고 진지하게 말을 바꾸었지만.
"그러니까 진작에 더 큰 집으로 가자니깐."
"무슨. 그 집 아니면 안 된다고 한 게 천송이 너야."
하지만 이사를 3일 앞두고도 두 사람은 송이의 엄청난 드레스 룸과 그 보다 더 어마무시한 민준의 서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처음엔 방이 5개나 있어 넉넉하겠다 싶었는데, 막상 짐을 정리하다 보니 이거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다. 1층에 방 3개는 각각 안방, 꼬물이 방, 손님방으로 하고, 2층은 방 2개에다가 복도까지 죄다 터서 서재와 드레스 룸으로 하기로 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생각보다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다. 공간이 모자란다는 걸 안 순간, 송이가 먼저 냅다 여기까진 내 구역이야- 라고 선을 그었지만 민준은 무슨 소리냐며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송이에게 져주는 민준인데, 이것만은 예외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땅따먹기 게임이 며칠 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 오래되고 낡은 책하고 물건들 좀 버리면 안 돼?"
"무슨 소리야. 그것들은 네 명품 백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가치를 가진 것들이라고 몇 번을 말해."
"그래. 내가 아무리 무식해도 그건 알겠는데, 아무리 봐도 쓸데없는 것도 많은 건 사실이잖아?"
"....흠."
그의 말대로, 그의 서재에는 가치를 환산하지 못 할 고서, 골동품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송이도 어디선가 한 번쯤 이름은 들어본 듯한 조상님(?)이 이걸 쓰고 만들었다고 하니, 그걸 버리라고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외에도 이제는 갖다 버려도 별 상관없을 것 같은 물건들도 꽤 많았다. 민준은 그 중 일부를 종종 들여다보긴 하지만 꺼내보지도 않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또 책을 사들이니, 서재가 감당이 되냐- 이 말이다.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아무 것도 못 버리게 하고 다 쟁여놓으셨어. 그럼 뭐해, 어차피 가실 때 아무 것도 못 들고 가셨는데."
"야."
"아, 내 말은 그러니까 가지고 있더라도 적당히 하자고 적당히."
"네 옷하고 가방들은 왜 적당히 못하는데."
"다른 여배우들에 비하면 난 아무 것도 아니라니깐?"
"어휴, 말을 말자."
민준이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성껏 포장한 그릇들을 포개서 박스 안에 넣었다. 박스 안에 그릇 반, 에어캡 반. 아주 소중하게 다루는 민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송이는 기가 찬다. 누가 몇 백 년 산 거 안 믿어주기라도 할까 봐, 아주 그냥 다 끌어안고 살아요. 400년 산 조선인인지 외계인인지. 도깨비 쓰레빠 같은 자식.
"몰라. 아무튼 난 내 아가들 포기 못 해."
"어디가!"
"어디 가긴! 내 아가들 모시러 간다."
송이는 거실에 쌓여있는 신문지를 확 구겨 던져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지식한 도민준씨랑 무슨 대화가 되겠어. 뒤도 안 돌아보고 현관문을 나섰다. 붙잡을 새도 없이 쌩 사라져버린 송이가 일으키고 간 바람에 신문지가 풀썩 날렸다. 그제서야 허리를 편 민준이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어휴..."
쉴새 없이 떠들던 그녀가 떠난 적막 속에서, 민준은 가만히 2층 서재 입구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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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민준은 서재의 문을 가만히 열었다. 이미 대부분은 박스 안에 차곡 차곡 들어가 있었고, 제일 안쪽 책장 몇 개에만 아직 책들이 남아있었다.
그는 늘 이 곳에서 안정을 찾고, 자신이 왔던 곳을 그리워하고, 혼자서 속내를 터놓기도 했다.
'뭐해.'
'어흐 깜짝이야! 뭐예요, 소리도 없이. 언제 들어왔어요.'
'내가 묻고 싶은데. 여긴 언제 왜 들어왔어.'
자신의 마음 속 공간과도 같았던 이 서재에, 그 언젠가 그녀는 허락도 없이 들어왔었다. 그 다음엔 그가 직접 그녀를 데리고 들어왔고, 이질적이었던 그녀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이 곳을 드나들었다. 이 곳에서 그녀를 모질게 내치기도 했지만, 그녀는 또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마음 속에서 울었고, 그를 보내주었다. 3년을 헤매다 돌아왔을 때에도, 서재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먼지 한 톨도 없이, 변함없이 그대로. 다시 돌아온 이후로는 더 이상 이 곳에서 쉬지도, 왔던 곳을 그리워하지도, 혼자 있지도 않았다. 천송이,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휴식을 찾고, 그녀의 옆을 그리워하고, 그녀와 함께 있었다.
"..참 오래됐네."
낯설었던 이 곳, 지구에서 400년 간 살아왔던 세월,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큰 박스 안에 가득 찬 커다란 지구본. 그의 고향 별은 없는 우주 모형들. 천체 물리학자 한서진. 색이 바랜 가운. 그의 가졌던 직업 중 가장 많고 두꺼운 서적들. 의사 현우진. 낡은 주판. 숫자들이 빼곡히 쓰여있는 수많은 서류들. 은행원 허윤. 그림과 크기들이 조금씩 다른 마작 세트들. 알이 깨진 안경. 김무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한자로 가득 쓰여진 책. 이름도 없던 때에 그와 함께 해주었던 자그마한 물건들. 오래 되어 쓸 수도 없는 만년필 같은 것들. 그냥 차마 버리지 못했던 그런 것들.
송이의 말대로 민준은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사실 의미를 찾자면야 아주 많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과거를 쌓아두고 살지는 않는다는 걸 감안했을 때, 그의 과거는 집착에 가깝기도 했다. 언젠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면 이 모든 걸 가지고 가서 푸른 별 지구는 이렇다- 자랑이라도 하려고 했을까. 자신의 신분을 하나씩 바꿀 때마다 잊혀지는 과거의 모습이 내심 서러워할까 봐 혼자서 간직하고 있었을까. 민준 제 자신도 언제 물건들이 이렇게 많아졌나, 짐을 싸면서 느꼈다.
"........"
계단을 다 내려와 아직 서재 안 쪽 걸려있는 그림 앞에 섰다. 하얀 종이는 빛이 많이 바랬고, 살아있는 것 같았던 나무와 하늘 위의 둥그런 물체의 선은 흐려져 있었다.
'선물입니다. 제가 직접 그린 거예요. 그날 타고 오셨던 거. 저 하늘에 떠 있었잖아요. 달처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은 그 감정은 어느새 고마움이 되어있었다. 다시는 그 때처럼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아졌으니까. 그래서 그녀를 지켜줄 수 있었으니까. 민준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그 소녀의 얼굴을 눈 앞에 그려보았다. 이화.
'나으리는 진정 저승사자이십니까?'
제 아무리 뛰어난 기억력이라지만 떠오르는 그 얼굴이 확실하지가 않다. 눈을 감고 뿌옇게 흐려진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애썼다. 점점 뚜렷해지는 모습이 드러난다.
".....!"
그 곳엔 어딘가 모르게 낯선 소녀의 모습이 있었다. 분명 제가 알고 있는 이화의 얼굴이긴 했는데,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민준은 그 옆에 송이의 어릴 적 모습을 그려 넣었다. 거의 같은 얼굴. 하지만 다르다. 똑같지만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모습은 자라서 그녀가 되었다. 그녀가 되어서 민준을 보고 웃고 있었다.
그래, 그녀는 그냥 그녀야.
민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만히 서 있는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 내리락 했다. 어깨를 누르고 있던 400년이라는 시간이 갑자기 사라지고 가벼워졌다. 이름 조차도 없이 살아왔던 시간들. 내가 나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랐던 혼란. 돌아갈 날만을 바라보며, 이 곳에서 그저 살아가기 위해 그냥 태어나고 그냥 죽어야 했던 수많은 이름들.
"...도.. 민... 준."
민준은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불러보았다. 도민준은 이제 죽지 않고 살아있잖아.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나의 이름. 그녀가 불러주어서 진짜가 된 나의 마지막 이름.
그녀는 그냥 천송이야.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천송이야. 그리고 나는, 2017년을 사는, 도민준이야.
민준은 손을 뻗어 걸려있던 그림을 조심스레 떼어내었다. 그렇게 손에 들고 아주 잠시 바라본 후, 처음 그것을 받았던 모습 그대로 다시 돌돌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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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준씨. 생각해보니까 우리 이삿짐 센터 부를 필요 없는 거 아냐?"
"왜?"
"아니, 도민준씨가 초능력으로 딱- 옮겨놓으면 되잖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어제 뾰루퉁하게 집을 나가버렸던 건 생각도 안 나는지, 송이는 민준이 출근 준비할 때부터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와서는 민준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녔다. 이미 예전부터 민준의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짐을 모두 옮겨둘 수 없어 송이의 집은 어찌 하지도 못하고 있던 참에 민준이 제안해 온 이사 계획은 내내 송이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집을 보러 다니면서 몇 번 살짝 싸우긴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 모두 마음에 쏙 드는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아, 지금 방 문제로 의견의 차이가 아주 조금(?) 있긴 하지만.
"하긴, 그건 좀 무린가?"
"그냥 평범하게 살자."
"제일 안 평범하신 분이 왜 이래."
박스들이 집 안 곳곳에 무질서하게 놓여있는 그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잘도 쫓아다니는 송이가 정신이 없었는지 민준은 그만 좀 따라다녀- 라고 한 마디 하고선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
"도민준!"
하지만 곧 얼마 되지 않아 송이의 외침에 다시 얼른 나왔다. 소리가 난 2층 서재로 급히 뛰어올라갔다. 무슨 일이야? 라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송이가 계단 중간쯤에서 서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도민준씨, 짐 다 어디 갔어?"
박스가 꽉꽉 들어차있던 어제의 서재와는 달리 절반은 없어지고 휑하게 박스 몇 개만 남겨져 있었다. 송이는 밖에도 안 내놨잖아, 미리 보냈어? 아님 진짜 초능력으로 옮겨놨나? 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리둥절한 송이의 표정을 보고 민준이 픽- 웃었다.
"어디 가긴. 다 버렸지."
"뭐? 버려??"
"응. 어제 정리해서 다 버렸어."
팔짱을 끼고 말하는 민준의 표정이 너무 덤덤해 송이는 몇 계단 위에 있는 그를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절대 안 된다고 해놓고선, 갑자기 무슨 변덕이지 싶다.
"그걸 버리면 어떻게 해!"
"네가 버리라며!"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번엔 송이가 변덕이다. 어제까지 서재 좀 비우라고 그렇게 닥달을 하더니 이젠 되려 왜 버렸냔다. 소리를 꽥 지르더니 이내 풀 죽은 표정이 되어서는 텅 비어버린 서재를 둘러본다. 그리고선 남은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며 아무 것도 없는 책장을 쓸어 내린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서재에 가득 울린다.
"이거 다 도민준씨가 살아온 세월이잖아."
"........"
"내가 이 물건들 쓸데없다고 한 거… 생각해보니까 아닌 것 같더라고."
"........"
"난 도민준씨가 살아온 과거들은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도 당신이니까."
"...천송이."
어느새 뒤를 따라 내려온 민준이 뒤에서 송이의 허리를 감싸 안아온다.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입술을 목에 묻었다. 허리를 감싸온 그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민준은 ‘내가 모르는 시간들의 당신도 사랑한다고 한 내 프로포즈 잊었어?’ 라는 송이의 말에 슬쩍 미소를 짓고는 그럴 리가. 라고 대답하며 그녀를 더욱 더 꼭 껴안았다. 따뜻한 그녀의 손. 향기로운 그녀의 체취. 내가 죽을 힘을 다해 곁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그녀 그 자체. 이제는 여기가 내가 살아갈 곳이야. 그녀와 함께하는 그 곳이 바로 내 집이야.
"당신이 뭐라고 해서 버린 게 아니라, 내가 버리고 싶어서 버린 거야."
"...도민준.."
"그러니 이젠 지금 눈 앞에 살아있는 나를 더 사랑해 줘."
"........"
"앞으로 너와 살아갈 날들만 바라봐 줘."
귓가에 속삭이던 민준의 목소리에 송이는 마음이 울컥한다. 이제 더 이상은 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행복해서 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송이는 그의 팔 안에서 몸을 돌려 민준과 마주 보았다. 그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서로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 비친 서로의 아름다운 모습.
"이따 저녁에 데이트 할래?"
"정말? 나야 당연히 좋지!"
"오랜만에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그러자."
"그래 그래! 나 이따 오후에 잠깐 잡지 인터뷰만 있는데, 그거 하고 바로 학교로 갈게."
"그럴래?"
"응! 우리 도민준씨 늦겠다, 얼른 준비해."
완벽이라는 것에 끝은 있을 까. 우린 얼마나 더 완벽하게 행복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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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도민준 교수님 아니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여전히 이 비녀를 좋아하시는군요."
민준은 종종 그랬던 것처럼, 학교 박물관에 그가 익명으로 기증한 비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에 반짝이지만 끝이 부러진 연옥색 비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볼 때도, 그녀가 그 소녀와 닮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녀에게 자신을 정체를 밝힐 때도, 민준은 이 곳에 있었다. 한동안 그 앞에 서서 비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민준에게로 자주 보던 학예사가 와서 말을 걸었다.
"좋아한다기보단, 추억하는 거지요."
"..네?"
"아, 아닙니다. 마침 드릴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민준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학예사에게 건넸다. 그가 서재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말아두었던 그림. 그 소녀가 준 선물. 민준의 400년 세월.
"이게 무엇입니까?"
"저의 먼 친척이 집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몇 백 년 이상 된 것일 겁니다."
"아니! 이런 걸 지금 저희 박물관에 기증해주신다는 겁니까?"
"네. 친척분의 뜻 입니다."
그림을 받아 든 학예사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히 그림을 펴보았다. 흔할 수도 있는 풍경의 그림 가운데에 떡하니 있는 정체 모를 둥근 물체에 이게 뭔가 싶은 표정이다. 의심쩍긴 하지만 민준의 앞이라 그런지 내색은 못하고 안경을 들어 더 자세히 들어다 본다.
"조선 왕조 실록. 광해 1년."
"네?"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린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학예사는 어차피 고증은 나중에 할테니, 라는 생각으로 다시 그림을 접었다. 감사합니다라고 연신 말하는 학예사와 악수를 나누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송이가 와 있을 시간.
"아무튼, 도 교수님 덕분에 요즘 박물관이 아주 인기가 좋습니다."
"제 덕분에요?"
"도 교수님이 여기 자주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여학생들이 많이 찾아오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하하.."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민준이 비녀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런데..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네?"
"저는 이제... 여기 안 올 겁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기나긴 과거를 이제는 묻어두려고 합니다. 이제 저에게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이름들은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지고 잊혀져 이 세상에 없었을, 도민준이라는 이름을 누군가가 구해주었고, 저는 이제 그 이름으로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돌아본 부러진 비녀는, 그 속에서 아주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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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여기 여기!"
박물관을 나오니 송이가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도 선글라스도 쓰지 않고 있고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 있는 모습에 오히려 민준이 놀라 얼른 송이의 옆으로 갔다.
"차에 있지 왜 나와 있어."
"왜긴 왜야, 우리 도 교수님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려구 왔지."
싱긋 웃으며 팔짱을 끼어와 민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눈치를 본다.
"우리 뭐 먹을까. 어디 근사한데 갈까?"
"이미 예약해놨어."
"진짜? 역시 우리 도 교수님이 짱이라니깐."
팔에 더 가까이 매달려오며 어깨에 기대는 송이의 모습을 보니 긴장했던 것도 조금 풀어지고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의 말대로,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고, 모든 남자들이 좋아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
지잉.
"잠시만."
민준이 수트 안 주머니에서 울린 핸드폰을 꺼내 든다. 액정에 떠 있는 문자를 보고 눈썹이 확 찡그려졌다.
"뭐야. 천송이 악어백, 에눌 가능?"
"헐, 맞다! 어제 잔뜩 글 올려놨는데 깜빡 했다!"
"너 또 중고장터에 내 번호로 올렸어??"
"헤헤, 미안."
"... 뭐.. 팔려고 내놨어?"
"그으래. 내가 도민준씨 때문에 내 아가들 팔려고 내놨다 왜!"
잠깐 확 화가 올라왔다가 그녀가 아끼는 이것저것들을 중고장터에 내놨었다는 말에 이내 마음이 풀어진다. 그래서 아침에 그런 얘기들을 했었구나. 그녀의 따뜻한 손과 따뜻한 목소리가 생각난다.
"근데, 안 판다고 답장해 빨리."
"왜?"
"뭐가 왜야. 도민준씨 짐이 반으로 줄었으니, 내 아가들 안 버려도 되잖아! 아싸."
"참 네..."
그녀의 아가들 중 하나인 가방을 품에 꼭 끌어안고 신난다는 듯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니 어이없는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곧 다시 그 웃음은 행복의 웃음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천송이야. 그리고 나는, 2017년을 사는, 도민준이야.
나를 알아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