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청춘기(靑春記) 13 본문

# 청춘기(靑春記) 13

SCIENCE AND LOVE 2016. 10. 26. 11:29

 

 

 

청춘기(靑春記)

- Youthology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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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준은, 말이 많지 않다. 말도 안 하는데 항상 비슷한 표정이라 그 안에서 감정을 읽어내기 어렵다. 아니, 마음에 안 든다는 건 딱 티가 나는데, 좋을 때를 알기 어렵다는 게 맞을 듯하다. 그래서 지금은, ‘별로다.’ 라는 표정만 아니면 ‘괜찮다.’ 혹은 ‘좋다.’ 라고 알아서 해석해서 받아들인다.

 

그는 대부분의 동기, 선후배들과 다 알고 지내는 편인데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몇 없다. 고로 도민준의 인맥은 거의 그의 선택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모두들 그와 ‘아는 사이’가 되고 싶어하지만, 그는 딱히 그럴 마음이 없어보인다. 흔한 남자 대학생들이 그러하듯이 당구를 치거나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그런 건 좋아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놀러 가는 것도 혼자인 걸 좋아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친구들을 밀어내거나 스스로 고립되지는 않는다. 적당한 선을 지킨다.

 

그는 1학년 1학기 땐 2등, 2학기 땐 1등을 했을 만큼 공부를 잘 한다. 이번 2학년 첫 중간고사에서도 대부분의 과목에서 점수가 최상위권이었다는 얘길 들었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냐는, 수 십 명에게 들어봤을 질문에 그는 늘, 그냥 집중해서 공부한다는 말 밖에 하지 않는다. 그럴 땐 좀 재수가 없는데, 질문 자체가 어리석긴 하다. 도민준은 축구도 잘한다. 근데 잘하는 것의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축구를 잘 몰라서. 같은 축구부원들이 잘한다 길래 그런가보다, 하는 거다. 승부욕도 은근히 강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있었던 단과대 체육대회 축구 결승전에서 우리 과가 아깝게 졌는데, 그것에 대해 엄청 열 받아 하는 것 같았다. 그 때 뒷풀이 자리에서 민준이 처음 소주를 마시는 걸 보았다. 그 날 밤 기숙사로 같이 들어가는데 왠지 말 걸기가 무서워서 한 마디도 못 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이쯤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면,

 

 

중간고사도 끝나고, 축제도 끝나고, 평온하게 주어진 5월동안 그와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뭘 물어보거나 같이 하자고 하면 늘 습관처럼 달고 다니던 왜, 라는 말을 그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자. 민준은 점점 부정적인 말보단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해주었다.

 

몇 번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과제 도움도 많이 받았고, 기숙사 휴게실에서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빨래가 다 되길 기다리기도 했다. 뭘 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기말고사 시험 기간 때에도,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를 했다. 내가 자고 있으면 민준은 날 깨워 같이 기숙사로 돌아갔고, 언제 한 번은 둘 다 시간을 잊고 도서관에 있다가 새벽 2시가 다 되어 민준의 손에 끌려 기숙사까지 뛰어간 적도 있었다. 음,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전부 별 거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뭐.

 

말했듯이, 그는 몇몇 친한 사람과만 잘 지낸다. 나도 이제 그 경계 안으로 들어온 건지, 그의 인간 관계에 있어 선택된 건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내 자신이 그저 그와 친해지고 싶은 많은 사람들과 같은 마음인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와 나는 서로에 대한 카테고리가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다른 이들과는 다른 곳에 서로를 두고 싶어했다.

 

 

 

 

 

 

 

 

 

 

 

 

 

# 명인대학교, 2호관

 

 

“망했다, 망했어.”

“나도. 왜 이렇게 어려워?”

 

 

기말고사는 끝나가고 있었다. 8과목 중 7과목의 시험이 끝나고 내일 하나만 남았다. 7번째 시험을 치르고 나서 지칠대로 지쳤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제 거의 끝났다는 것이 기대가 되기도 했다. 기나긴 방학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에이, 송이 언니, 거짓말 마. 언니 중간고사 때도 잘 봤잖아.”

“잘 보긴.”

“언니는 좋겠다. 도민준 선배가 맨날 공부 가르쳐주고…”

“갑자기 도민준이 왜 튀어나와? 그리고 내가 언제 맨날.”

 

 

시험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와 동기와 대화를 나누다 뜬금없이 등판된 민준의 얘기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몇 번 그런 거 가지고 오버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동기가 더 의심스러운 눈으로 흘겨본다.

 

 

“도서관에서 맨날 같이 있드만. 다른 애들도 다 알아.”

“야, 공부는 내가 하는 거지, 도민준이 도와줘 봤자 뭘 얼마나 가르쳐준다고… 걔 잘 알려주지도 않아!”

“뭐야, 언니 수상해.”

“뭐가 수상해. 나 도민준이랑 그렇게 안 친해.”

“저기 그렇게 안 친하신 분, 언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변명을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해보지만, 그 변명이 무색하게도, 동기가 턱 끝으로 가리킨 곳을 따라 뒤를 돌아본 곳에 민준이 있었다. 송이가 나 기다리는 거 아니야, 라고 또 제가 할 필요 없는 해명을 하자마자, 복도 끝 사물함 앞에 서 있던 민준이 송이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기다린 거 맞구만, 뭘. 동기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시험 잘 봤어?”

“어? 어어…”

 

 

민준은 그냥 평범하게 말을 걸어왔는데, 왠지 동기가 옆에 있어 혼자 어색해졌다. 괜히 수상하니, 기다렸느니, 어쩌니 그런 신경 쓰이는 말을 해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민준과 송이를 번갈아 눈치 보듯 보던 동기는, 언니 나 먼저 갈게, 하고 붙잡을 새도 없이 먼저 가버린다.

 

 

“너 왜 애를 쫓아내고 그래.”

“내가? 내가 뭘.”

“몰라. 너 때문이야.”

“무슨 이상한 소리야.”

“모르겠다, 공부하다 정신이 이상해졌나봐.”

 

 

동기 친구가 가버리자 송이는 괜히 그 탓을 민준에게로 돌리며 구시렁댔다. 민준을 보면 아까 시험에서 네가 알려줬던 문제가 그대로 나왔다는 걸 말해주려 했었는데, 별로 하고 싶지 않아졌다. 송이는 이유 없는 이상한 기분이 잠이 부족해서인지, 시험이 곧 끝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걸 괜스레 퉁명스럽게 표현하며 먼저 계단을 내려가자, 민준이 금세 옆으로 다가와 걸음을 맞춘다.

 

 

“……”

“……”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을 나서고, 언덕을 내려가 이제는 푸른 잎이 가득한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캠퍼스의 길을 따라 가는 동안에도 송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통은 송이가 주절 주절 말하는 편인데, 송이가 한 마디도 없으니 두 사람 사이는 조용하기만 했다.

 

이 상황에서도 도민준은 진짜 먼저 말 거는 법이 없어요. 그렇게 혼자 속으로 불평을 하고 있으니, 방금 전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시험 잘 봤냐고 ‘먼저’ 물어보았던 민준. 그러게, 웬일이래. 학생회관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 해 기숙사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누가 봐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좀 그래서 겨우 말 한마디를 꺼냈다. 먼저 말 걸어줬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건 아니고, 그냥 어색한 침묵이 싫어서.

 

 

“짐은 다 쌌어?”

“아니. 시험 끝나면 하려고.”

“나도. 넌 짐 싸고 풀고 한 게 3번째겠네.”

“어, 매번 귀찮은 일이지.”

“그렇겠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기숙사를 비워야 하는데, 보통은 짐을 큰 박스에 싸서 단체로 택배를 보낸다. 기숙사 처음 들어올 때보다 훨씬 늘어난 짐들을 언제 다시 정리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그러니 아직 마지막 시험이 남았는데도 다 끝난 기분이 들었다.

 

 

“아… 벌써 한 학기가 끝나네.”

“그러게.”

“서울 올라와서 좋다고 했는데, 결국 어디 가보지도 못하고 학교에만 있다가 다시 내려가게 생겼네.”

“어디 가보고 싶은데.”

“음… 남산?”

“기껏 남산?”

“가봤어?”

“아니.”

“뭐야, 되게 서울 사람인 것처럼 말하더니.”

 

 

송이는 한 것도 없이 지나가버린 1학년 1학기를 아쉬워하며 말했다. 역시 사람은 서울로 가야한다며 서울 상경의 부푼 꿈을 꾼 것도 처음 때 뿐이었지, 막상 캠퍼스 안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몇 달 동안 기억에 남는 서울이라곤, 강의실, 도서관, 축구장, 기숙사, 지저분한 술집 골목 정도? 상상 속의 대학 생활은 정말 이렇지 않았다. 송이의 한탄을 가만히 듣던 민준이 약간의 공백 후에 입을 열었다.

 

 

“가.”

“……?”

“토요일에. 괜찮지?”

 

 

 

그 상상 속에는, 도민준도 없었다.

 

 

 

 

 

 

 

#

 

 

망할 놈은 하필 시험 하나를 두고 그런 얘길 해서 하나도 집중을 못하게 만들었다.

 

시험이 끝난 다음날 토요일, 민준과 송이는 남산에 들른 후 저녁에 함께 기차를 타고 각각의 본가로 내려가기로 했다. 송이는 토요일에 시간이 없을까봐 그 얘길 나눈 후 기숙사로 들어와 바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음은 급했는데 저녁에 기숙사 룸메이트들이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서 소란스럽게 짐을 쌀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송이도 책상 앞에 앉아 내일 시험이 남은 과목의 공부를 하기 시작했지만, 머리 속엔 딴 생각이 가득했다. 난 이런데, 정작 도민준은 잘도 공부 하고 잘도 시험 봐도 또 1등 하겠지. 재수 없는 자식.

 

 

“…하아.”

 

 

조용한 기숙사 방 한 구석에 앉아 의자만 뱅글 뱅글… 노트엔 저도 모르는 사이 남산이라는 글자가 가득 쓰여져 있었다. 그걸 보니 제 자신이 한심해 안되겠다 싶어 화장실로 가 찬물에 세수를 하고 왔다. 어제 네가 말해준 문제가 오늘 시험에 그대로 나왔다고 민준에게 못했던 말을 문자로 보내놓고, 다시 책에 집중했다. 민준은 역시나 답장이 없었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

 

 

타이밍. 너의 그 때와 나의 그 때.

 

그것이 자꾸만 어긋나는 거라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만큼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라. 그 때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 그 때가 그냥 흘러가버린 걸 후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그 때가 그 때인 걸… 몰랐기 때문이라. 아니, 매번 모르는 척 했기 때문이라.

 

 

 

 

“이게 마지막이지?”

“응.”

“그냥 가만히 좀 앉아있으라니까.”

 

 

기말고사가 모두 끝난 주의 토요일, 기숙사는 방을 빼는 학생들로 부산스러웠다. 이사를 하는 날엔 남녀 구역 구분 없이 기숙사가 오픈 되는데, 민준이 짐을 옮기는 걸 도와주러 송이의 방에 와주었다. 택배 보낼 박스가 크고 무겁기도 했지만, 일단 송이는 지금 그걸 옮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미안.”

“네가 안 다쳤어도 어차피 도와주려고 했어.”

 

 

금요일 오전 시험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던 송이는, 그 날 저녁 2층 침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졌고 발목을 다쳤다.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었는데 통증이 좀 있어 병원에 가보니 인대가 늘어났다고 해 반깁스를 하고 와야 했다.

 

당연히 그 다리로는 남산에 갈 수도, 민준과 같이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없었다. 송이의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께서 직접 기숙사로 데리러 온다고 하셨다. 송이는 조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을 속으로 꾹 삼키고 민준의 옆에 서 있기만 했다.

 

 

“아아, 별로 안 아픈데. 이거 봐, 제대로 걷잖아.”

“제대로 걷긴. 나 너 업고 남산 오르기 싫다.”

“아니, 내 말은…”

“집에 가서 푹 쉬고 빨리 나을 생각이나 해.”

 

 

핸드 카트에 박스를 실어 기숙사 로비로 내려 가는 동안, 민준이 그냥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해도 송이는 절뚝거리는 다리로 민준의 뒤를 쫓아다녔다. 깁스를 하고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민준에게 미안해서 괜스레 자긴 괜찮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댔다. 사실은 정말로 괜찮길 바라는 속상함이 제일 큰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민준의 앞에서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도민준은 그냥, 내가 가고 싶은 곳에 함께 가주기로 한 것뿐이니까. 이건 데이트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일도 아니니까. 이 날을 기다리는 하루가 너무 길었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죽어도 말하지 못하니까.

 

 

“……”

 

 

마지막으로 방에 두고 온 게 없나 확인하고, 열쇠를 반납하고, 송이의 아버지께서 오시길 기다리며 민준과 로비에 앉아있었다. 무슨 말을 하면 더 속이 상할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다. 머리 속엔 온통 왜 하필, 왜 하필, 이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매일 오르던 2층 침대 계단이 왜 하필, 왜 하필 어제, 왜 하필.

 

 

“천송이.”

“…응.”

 

 

로비 안 쪽 소파에 앉아 붕대로 칭칭 감긴 오른쪽 발 끝만 쳐다보고 있던 송이의 이름을, 민준이 불렀다.

 

 

“다음에 가자.”

“……”

“다음 학기에. 가을에.”

“……응.”

 

 

옆에 앉은 민준을 돌아보니 그는 옅게 웃으며 다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 미소 위의 깨끗한 눈동자에서도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그저 그렇게 같길 바라는 마음 탓이려나. 거의 본 기억이 없는 그의 평온한 표정을 보며, 가라앉은 기분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다. 송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웃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운 공간 한 켠에 나란히 앉아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오래 바라보고 있는 시간은, 마치 모든 게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한 건,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손이었다.

 

 

“……”

“……”

 

 

그의 손가락 끝이 볼을 스치는 소름 돋는 느낌에도, 송이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아직 저의 시간은 멈춰 있는 것만 같아서. 시선 아래에서 머뭇거리던 그의 큰 손은, 결국 목적지를 바꾸어 송이의 머리를 헝클인다.

 

 

“내 덕분에 성적 잘 나오면 밥 사라.”

“…뭐야아.”

 

 

송이는 민준이 갑자기 흐트러놓는 바람에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소리를 꽥 질렀다. 그게 왜 네 덕분이야. 내가 가르쳐준 거 시험에 나왔다며, 내 덕분이지. 그거 고작 한 문제였거든- 말 없이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은 짧은 시간은 또 모른 척, 흘려 보내버린다.

 

저도 모르는 사이 이미 두근거리고 있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동안, 송이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고, 송이와 민준은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민준이 팔을 잡아주려고 했지만 송이는 괜찮다고 했다. 송이는 아버지께 민준을 과 선배라고, 오늘 짐 나르는 거 도와줬다고 소개를 했다. 송이의 아버지는 송이가 원래 덤벙거려서 자주 이런다고, 고맙다고 말씀하셨고, 송이는 무슨 그런 소릴 하냐며 짜증을 냈다. 민준은 옆에서 웃기만 했다.

 

민준이 나서서 짐을 차에 실었고, 송이의 아버지는 고맙다며 민준과 악수를 하셨다. 그리고 먼 곳에서 도착하시자마자 다시 차에 올라타셨다. 송이도 작게 민준에게 고마워, 방학 잘 보내- 라고 작별 인사를 했지만, 차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 머뭇거렸다. 마치 그의 손 끝이 그랬던 것처럼.

 

 

“너도 방학 잘 지내.”

“응.”

“……”

“……”

 

 

연락할게, 받아줘야 해.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을 하지 못하고 차에 올라탔다. 창문을 열고 그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고 싶은 것도 하지 못했다. 사이드 미러에 비치는 모습조차도 보지 못했다. 그러면 기분이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아빠에게 그 기분을 고스란히 들킬 것 같았다.

 

 

“남자친구야?”

“응?”

“남자친구 같은데.”

“아니야, 남자친구는 무슨. 그냥 과 선배야.”

“정말?”

“…응. 그냥… 친구.”

 

 

아빠의 물음에 짜증을 섞어 대답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가는 길, 한강 다리를 건너며 저 멀리 보이는 남산 타워를 보았다. 뒤늦게 창문을 내렸다. 하필,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불어오는 바람은 깨끗했다. 왜 하필. 왜 하필…

 

 

 

 

 

 

 

 

 

 

 

 

 

 

 

 

 

 

 

 

 

 

 

 

# 7월, 여름 방학

 

 

먹고, 자고, 티비 보고, 컴퓨터 하고, 또 자고, 먹고. 다리를 다쳤다는 핑계로 방학이 시작한 이후로 내내 말 그대로 ‘잉여’같은 생활을 했다. 그 생활은 한 달 뒤, 반깁스를 풀고도 계속 되었다. 엄마가 친구도 좀 만나고, 대학생다운 생활을 좀 하라고 매일 같이 구박을 하셨지만, 대학생다운 게 뭐냐며, 그 어떤 것도 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 누군가에게 문자라도 하나 올까 기대하며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깜짝 놀라던 것도 보름도 채 가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면서.

 

 

“으으, 더워.”

 

 

7월도 거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고, 장마도 끝나고 태풍도 한 차례 지나갔다. 송이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자다가 참을 수 없는 더위에 잠을 깼다. 부모님께서는 일 나가시고, 고딩 동생은 학원에 가고. 눈을 떠도 집에는 아무도 없다. 땀에 젖은 티셔츠를 펄럭이며 일어난 송이는 에어컨을 켜려다가 엄마의 잔소리가 떠올라 그만 두었다. 온 집안의 문을 다 열고 거실 한가운데에 대자로 누웠다.

 

여름의 소리가 다 들린다. 해가 쨍 한 소리, 매미가 우는 소리, 아스팔트가 타는 소리, 날이 더워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누군가가 혼자 그네를 타는 소리. 바람이 한 점 없었다. 그 조용한 여름의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누워있다가, 엄마의 말대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벌떡 일어났다. 뭐라도 하자,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이라도 읽자. 거긴 에어컨이라도 빵빵 하겠지. 웬일로 큰 맘을 먹고 아침부터 흘린 땀을 씻으려 샤워를 했다. 더우니 망정이지 겨울이었으면 아마 씻지도 않았을 거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며 나와 오늘 구립 도서관이 쉬는 날인지 확인하려 핸드폰을 켰다. 재수를 할 때 자주 가던 도서관이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쉬었던 것 같아서였다.

 

 

“……?”

 

 

거의 12시간이 넘게 관심을 못 받았던 핸드폰의 잠금 화면엔 가장 최근의 문자 메시지가 떠 있었다.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또 본다. 도민준.

 

 

‘나 여기 여행 와 있어. 오늘 시간 되면 보자.’

 

 

한창 자고 있었던 2시간 전, 아침에 온 문자. 여기가 어디? 정말 여기? 송이는 발신인 이름에 이어 짧은 메시지도 읽고 또 읽었다. 연락 하나도 없이 다짜고짜 이 지역에 와 있으니 보자는 말. 미리 언질을 한 것도 아니고, 오늘 시간 되냐 물어본 것도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 ‘보자’ 라니. 송이는 일단 어이가 없었다. 누군 나오라 하면 아무 때나 나갈 수 있는 줄 아나. 혼자 투덜대며 답장을 보냈다. 어딘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답장이 왔다. 민준이 답한 곳도 송이의 집과는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이 도시가 얼마나 큰데 무작정 여길 왔다는 말이면 다 되는 줄 아나. 송이는 한 번에 Okay 라는 대답을 하기 싫어 거기는 너무 멀다고 했다. 그러자 민준이 송이가 사는 동네로 오겠다고 했다. 이 동네는 여행으로 오기엔 좀 아무 것도 볼 게 없는데, 싶어 그냥 중간 지점에서 보기로 했다. 민준에게 지하철 어디서 내리면 된다고 알려주고 1시간 반 후에 보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준비를 마치고 약속 장소로 달려갔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갔지만 괜히 빨리 온 티를 내기 싫어 지하철 역에서 10분 동안 앉아있다가 나갔다. 바다가 있는 도시에 살면서도 잘 가본 적 없는 바닷가. 한창 휴가 성수기이라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다른 유명한 해수욕장들보단 한가한 편인 곳이었다.

 

민준은 해변가의 어느 인테리어가 잘 된 카페에 있었고, 차가운 커피를 반쯤 마신 상태였다.

 

 

“많이 기다렸어? 지하철이 안 와서.”

“아니, 조금.”

“갑자기 불러내니까 그렇지.”

 

 

송이는 ‘내가 너를 위해 굳이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와주었다.’는 티를 내며 민준의 맞은 편에 앉았다. 민준이 슬쩍 웃으며 빤히 얼굴을 쳐다보길래 오늘 입술 색이 잘 안 어울리나, 생각했다. 그래, 이거 말고 다른 컬러를 발랐어야 했는데.

 

 

“커피 마실래?”

“그래.”

 

 

민준이 커피를 사겠다며 카운터로 간 사이 송이는 얼른 거울을 보았다. 이것도 괜찮은데, 이상한가. 주문을 하고 돌아온 민준은 제일 먼저 다친 발은 괜찮냐고 물었다. 송이는 괜찮다며 높은 굽의 샌들을 신은 발을 내밀어 보여주었다. 민준은 그렇다고 그렇게 높은 신발을 신고 다니냐고 했다. 송이는 무슨 상관이래, 중얼거리고는 궁금한 걸 물었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야?”

“보고 싶어서.”

“……?”

“바다가.”

“……”

 

 

뻔뻔하리만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민준에, 송이는 말문이 턱 막혔다. 도민준, 네가 그런 말장난도 할 줄 아니. 분명 목적어는 눈 앞의 푸른 바다였지만, 왜 심장이 뛰는 거냐. 민준의 표정만큼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 음료가 나왔다는 진동벨이 울렸고, 민준이 다시 일어나 픽업 데스크로 갔다. 송이는 그 때서야 긴 숨을 내쉬었다.

 

민준은 송이의 앞에 아이스 모카라떼를 내려놓았고, 송이는 자신이 민준에게 뭘 마시겠다고 말 한 적도 없다는 걸 그 때 깨달았다.

 

 

“…대한민국에 바다가 여기 뿐이야?”

“여기 저기 다니다가, 그냥 생각나서 온 거야.”

 

 

그 생각에 어떤 이유가 있길 바랐다.

 

 

 

송이는 민준이 방학 동안 어딜 다녀왔는지, 어디가 어땠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커피를 다 마시고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이야기를 들었다. 혼자 부지런히도 다녔더라. 그러고 보니 살도 제법 탄 것 같았다. 국내 여행의 마지막은 이 곳이고, 집으로 돌아가면 남은 방학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쉴 거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민준이 송이 저처럼 폐인마냥 방에 누워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민준은 자기도 그런다고 했다. 늦잠 자고, 씻지도 않고 누워 있고, 아무 생각 없이 티비를 보고, 새벽까지 수사물 미드를 보고. 믿기지 않지만 민준도 그렇다고 하니 송이는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한참을 카페에 앉아있다가 민준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고, 송이는 미리 알아봐 둔 식당으로 갔다. 여긴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현지인 맛집이라 나 아니면 네가 올 수도 없었을 거라는 걸 강조하며. 두 사람은 송이가 이끈 곳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고, 민준이 정말 맛있다고 해줘서 뿌듯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타들어가도록 뜨거운 햇살이 거의 잦아들어 해변가를 걸었다. 높은 샌들을 벗고 맨발로 밟은 모래는 그 때까지도 조금 뜨거웠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는 모래 사장 한 켠에서 대충 신문지를 깔고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마셨다. 민준과 단 둘이 술을 마신 건 처음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바다 대신, 파도의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많은 말을 나눈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만 가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시간을 잊고 싶었지만, 민준이 먼저 막차 시간이 언제냐 물었다. 이런 건 또 왜 먼저 물어보는지. 송이는 막차 시간을 알고 있었고 그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음에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시계를 보던 민준은 송이에게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고, 마지막 지하철을 딱 맞춰 탈 수 있었다. 참 이럴 땐 타이밍이 맞아도 너무 잘 맞게 말이다. 민준은 송이를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고, 근처 찜질방에 가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본가로 올라간다고 했다.

 

 

“늦었다. 빨리 들어가. “

“…그래.”

 

 

갑자기 불러냈는데도 군말 없이 나와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도, 오늘 즐거웠다는 감상조차도 없이, 조용한 아파트 단지 안 가로등 아래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어쩌면 자정이 넘은 지금의 시간 자체가 그 모든 말을 대신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들어가라고 손짓을 몇 번을 하고도 그 앞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약간의 술 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민준을, 약간의 술 기운을 빌어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한 순간은 분명, 멈춰있었다. .

 

 

“……”

“……”

 

 

 

도민준은, 말이 많지 않다. 말도 안 하는데 항상 비슷한 표정이라 그 안에서 감정을 읽어내기 어렵다.

 

 

그런데 이젠 왠지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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