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May, be sweet 15 본문
May, be sweet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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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해?”
“...어? 어. 아무 것도.”
저녁을 먹고 난 후, 거실 탁자 앞에 앉아 책을 펴놓고 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송이는 민준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열심히 책에 그어대던 줄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뚝 끊겨있었다. 멍하니 초점을 잃은 눈은 어딘가에 도무지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 같았다. 민준은 무슨 생각하느라 이름 불러도 못 들어- 하며 과일을 담은 접시를 송이의 앞에 내려놓는다.
“딸기는 제철이 살짝 지나서 그런지 맛없어 보이더라.”
“방울 토마토도 좋아. 고마워.”
“공부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누가 무시 못 하게 하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방울 토마토를 하나 집어 먹고는 다시 펜을 똑바로 고쳐 쥐었다. 전에 딸기 먹을 때 꼭지 따기 귀찮다고 칭얼댔더니, 토마토 꼭지를 죄다 깔끔하게 따서는 내왔다. 다정해, 우리 교수님.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도움은 사절! 나 혼자 할거야.”
“다른 학생들도 모른 거 있으면 다 나한테 물으러 오는데?”
“그건 애들이 진짜 물어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도민준 교수님 관심 끌려고 그러는 거거든요?”
꼭 여학생들이 별 어려운 것도 아닌데 괜히 손 들어서 질문 하거나, 수업 끝나고 책을 들고 쪼르르 쫓아가 뭘 물어본다든지 하는 걸 진짜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봤나. 걔들 마음을 내가 더 잘 알아요. 관심 받고 싶고, 얼굴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더 보려고 그런다는 거- 송이는 코를 찡긋하며 토마토 중 가장 큰 걸 집어다가 민준의 입에 쏙 넣어준다.
“어쨌든 당신 말대로라면 선생과 제자 사인데, 배운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게 뭐 어때서.”
“안 돼! 나는 교수님 덕 봤다는 소리 듣기 싫단 말이야.”
송이는 민준의 말에 저도 모르게 욱- 하는 마음에 인상을 팍 썼다. 오늘 자신을 하루 종일 괴롭히고 있는 익명의 이야기들이 떠올라서 였을까. 그냥 투정 같은 말이 아니라 강한 어조로 말했던 걸 민준도 눈치챘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송이를 쳐다보며 묻는다.
“내가 그런 걸로 덕 보게 할 사람도 아니고, 갑자기 왜 그런 소리야.”
“그게 아니어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구.”
“남들 생각이 왜 중요해? 아니면 그만인 거지. 왜, 누가 그런 소리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송이는 살짝 신경질이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가, 이내 자기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어차피 그는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이야기인데 내가 왜 엄한데다 화풀이 중인지. 그의 말대로, 아니면 아닌 거지 남이 뭐라고 하든 화낼 일도 아니고.
“일도 있고, 시험 공부도 해야하다보니 내가 좀 예민해졌나봐. 미안해...”
“......”
“아, 이 나이 먹고 공부하려니 진짜 힘드네.”
“...괜찮은 거지?”
“...그럼.”
풀 죽은 목소리로 애써 웃는 송이를 민준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본다. 송이는 괜히 방울 토마토만 연달아 집어 먹으며 민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민준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밀어 송이의 손을 잡아온다. 항상 깊은 곳에 존재해 왔던 깜깜한 불안감들... 여태까지 그 누구도 몰라줬던 그 무거운 마음을 단 번에 알아차렸던 그였기에,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잘 숨겨지지가 않는다. 나의 연기는 그의 앞에선 잘 통하지 않는다.
민준은 송이의 손등 위를 더 꽉 감쌌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일단은 웃어보여야만 했다. 민준은 토마토 더 갖다 줄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송이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며 다시 책을 본다.
“......”
지금 펼쳐놓은 페이지는 왜 이리도 무거운지,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가 힘들다. 한 문장을 읽고, 주방에 서 있는 민준의 뒷모습을 한 번 보고, 또 그 다음 문장을 읽고, 그를 보고. 그를 보면 괜시리 미안해지고. 송이는 이대로는 공부든, 싱숭생숭한 마음이든, 뭐든 안될 것 같아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집에 갈래.”
“벌써?”
토마토를 다 씻어 접시에 담아 나오던 민준은, 가방을 챙기며 일어나는 송이를 보고 다시 접시를 내려놓는다. 벌써- 라는 말은 그와 있으면 언제나 떠오르는 말이다. 표현에 서툰 그의 마음 속에서도 툭 튀어나오곤 하는 말, 벌써. 송이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현관 쪽으로 가 신발을 신는다. 급한 걸음으로 쫓아오는 민준의 얼굴에 쓰여진 아쉬움에 자신도 덩달아 그럴까봐 괜히 신발끈을 묶는 척 한다.
“응. 여기서 하니까 공부가 너무 안 돼.”
“내가 너무 방해했나?”
“아니야, 내가 집중이 안 돼서 그래. 그 쪽이랑 있으면 자꾸 눈이 글로 가.”
“...그럼 나 서재에 가 있을까?”
“으이구. 누가 진짜 눈에 보이는 거 말하나. 마음이 딴 데 가 있다고요.”
송이는 신발끈을 다 묶고 일어나 현관 앞에 서 있는 민준의 양 볼을 감쌌다. 어쩌다 시크하신 우리 도교수님이 가지 말란 표현까지 다 하게 됐을까. 아는 것도 많지만 모르는 것도 많은 그에게, 내가 너무 많은 걸 알려줬나 보다. 이럴 땐 그냥 예전처럼 ‘그래, 가.’ 라고 섭섭할 정도로 무뚝뚝하게 말해줘도 되는데.
역시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울컥해 발 끝을 들며 그냥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도 냉랭하기론 유명했는데, 참 많이 약해졌다. 도대체 심리학 말고 또 나한테 뭘 가르쳐준 거야.
“…잘 자요.”
“데려다 줄게.”
“아냐, 데려다 주면 또 세월아 네월아 한다.”
“…알았어. 조심히 가고.”
밑에까지라도 데려다 줄게. 괜찮다니까, 나 애 아니거든? 차 가까이 대놨어? 네, 바로 입구에 있습니다요. 몇 차례 실랑이가 오가고 나서야 민준은 송이를 놓아준다. 매번 힘든 작별의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나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계속 서로를 바라보고, 아쉬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든다.
“......”
그를 향한 웃음은 그가 눈 앞에서 보이지 않자 곧바로 사라졌다. 축 쳐진 입꼬리가 스스로도 너무 무거운 것 같아, 다시 억지로 가볍게 보이려 애쓴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별 거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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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피곤하다.”
스물 아홉의 나이에 9할의 타의로 대학에 입학해, 가장 첫 학기의 마지막 수업들을 보내고 있는 한 주였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다들 수업을 일찍 끝내주거나, 공강 시간도 있었지만 굳이 민준을 보러 가진 않았다. 수업을 모두 마친 후 잠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도서관에 학생들이 너무 많기도 했고, 내일이 심리학의 이해 조별 과제 발표가 있는 날이라, 발표를 맡은 송이는 연습을 하려면 집에서 하는 게 편할 것 같았다. 혼자 가려다가 굉장히 피곤함을 느껴 마침 근처에 있다는 범이를 불렀다.
“웬일이세요, 저보고 데리러 오라 그러시고. 도교수님 바쁘시대요?”
“시험 기간에 학생만 바쁜 건 아니지. 아직 시험 문제 다 못 냈다 그러던데...”
부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리러 온 범이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송이는 조수석에 앉아 머리를 뒤로 기대며 연신 하품을 해댔다.
“그것도 그렇고... 이제 학교에서 좀 조심하려구.”
“혹시 그거...때문에 그러세요?”
“...그냥, 조심해서 나쁠 것 없잖아.”
“하긴. 뭐 어차피 이번 학기 끝나고 그만 두신다면서요. 그럼 더 편하겠네요.”
“응...”
어제 오늘 곰곰이 되돌아보니, 그와 있으면 그저 좋다는 마음에 너무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행동한다고는 했지만, 점점 나도 수많은 학생 중 하나일 뿐이라고 착각했는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캠퍼스를 거닐고, 학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도서관에서 그와 마주 앉아 있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오히려 남들이 알아봐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그를 볼 때마다 저절로 지어지는 표정을 숨겨야만 하는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는 섭섭하게 여길 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이 학교를 그만 두고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와의 만남을 공개하든, 하지 않든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괜찮지만, 그가 오해를 받는다는 건 괜찮지 않으니까.
“살짝 걱정했는데 오늘 수업 들어가서도, 도서관에 가서도 그냥 다른 때랑 같았어.”
“그쵸? 별 거 아니라니까요. 그 글 올라온 데가 이상한 곳이래요.”
“야, 임마. 지가 별 호들갑은 다 떨어놓고.”
“저는 다- 누나 걱정하는 마음에 그랬죠.”
오늘 학교에 오기 전에도 살짝 걱정은 했었다. 그 소문이 퍼져서 학생들이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설마 말도 안 되는 그 글에 쓰인, 내가 성적을 잘 받으려 로비를 한다는 교수가 민준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너무 신경이 쓰였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민준에게는 더더군다나 물어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학교에 와보니 그냥 평소와 같았다. 처음, 불량한 대학 생활로 논란이 되어 학교에 왔을 때 다들 나를 보고 수군거리고, 비웃는 듯했던 모습은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도 다들 시험 공부하느라 바쁜지 오히려 자신에게 아는 척 하는 학생도 적었다.
“그냥 못 들었던 셈 쳐야겠어.”
“맞아요. 제가 너무 오버했어요. 잊으세요.”
“아아. 나 또 들어가서 내일 발표 연습해야 되니까 잠깐 눈이나 붙여야겠다.”
그래, 그냥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일부 미친놈들이 만들어낸 말인데 뭐 그리 신경을 써. 이거보다 더 말도 안 되는 말들도 많았잖아. 일일이 대꾸할 필요도 없는 더러운 말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게 잊혀진다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되고, 내가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고, 그러면 되는 거니까. 송이는 어차피 다음 학기부터는 이 학교 내에서 오해 만들 일도 이제 없을 거니, 며칠만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잠깐이나마 눈을 감고 쉬기로 했다.
Rrrr
“아...뭐야아.”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이의 전화 벨이 울렸다. 안대표. 송이는 이름을 확인하고선 짜증을 내며 시트에 기대 누운 그대로 전화를 받았다.
“왜 또!”
= 천송이 너, 교수한테 돈 줬어?
“갑자기 전화 걸어서 뭔 소리야.”
= 잘 봐달라고 만나서 뇌물 주고 그랬냐고!
“아아, 그거? 그거 그냥 찌라시야.”
다 잊기로 하자마자 기분 나쁘게시리 다시 그걸 끄집어내냐. 하여간 대표라는 게 미리 처리를 해주지는 못할 망정 맨날 뒷북이에요. 송이는 다급한 안대표의 물음에도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 찌라시는 무슨.. 지금 포털 메인에 기사 쫙 깔렸거든??
“...뭐?”
어제 오늘, 진짜 다들 나한테 왜 이래- 송이는 안대표의 말을 듣자마자 범이에게 차를 세우라고 시켰고, 길가에 차가 멈춰 서자 몸을 일으켜 재차 묻는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 그 사진에 있는 남자, 진짜 너 수업 듣는 교수야?
“...사진?”
송이는 당장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내 인터넷 어플을 켰다.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포털 사이트 주소를 써넣고 나타나는 화면. 스크롤을 조금 내리자 바로 자신의 이름이 보인다. ‘천송이, 늦깎이 대학생은 역시 무리였나. 교수에게 뇌물?’. 이름 빼고는 어느 하나 맞는 이야기가 없는 자극적인 문장을 떨리는 손으로 클릭한다.
“누나, 왜 그러세요?”
“......”
어제 인터넷에서 읽었던 그 루머와 똑같은 내용, 하지만 A는 ‘천송이’가 되어 있었고, 좀 더 고상한 척 단어와 표현만 바꿔 쓴 말들이 쓰여있었다. 그리고 몇 장의 사진들.
‘그 전에도 드리려고 그랬었는데, 그냥 가셔가지고.’
‘난 이런 거 안 받습니다.’
‘아니,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이런 거 준다고 해서 잘 봐주고 그런 거, 내 수업엔 없습니다.’
맞다. 나는 불과 한 달 전쯤, 그에게 말 그대로 ‘뇌물’을 바쳤었다. 기사에 써 있는 대로, 다 늦게 대학에 입학해 제대로 출석도 못 하고 있는 불량 학생이, 학교 좀 잘 다녀보겠다고 했던 생각은 참으로 얄팍했었다. 그가 한사코 거절하자 매니저에게 줘버렸던 홍삼. 그 박스가 들어 있던 종이 가방을 그에게 내미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기사 중간 중간에 있었다. 아주 멀리서 줌을 당겨 찍은 것처럼 화질은 흐렸고, 그의 얼굴엔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멀끔한 수트 스타일, 그가 늘 하고 다니는 얇은 타이, 깨끗한 운동화... 민준을 아는 사람이라면 전체적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법했다. 그 때, 그가 파파라치를 발견하고 나를 데리고 도망갔었지만, 이제 와서 소용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헐, 지금 이거 기사로 난 거예요??”
“......”
송이가 심각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자 옆에서 훔쳐보던 범이가 기사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다. 마치 내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있는 것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그 때의 사진 외에도, 며칠 전 스튜디오 앞에서 찍힌 사진도 있었다. 그를 촬영장으로 불러낸 후, 촬영 중이라 정신이 없어 매니저를 대신 내보냈었을 때, 그와 매니저가 서로 악수하는 모습이었다. ‘이전에도 천송이와 교내에서 만남을 가졌던 모 교수가, 이번엔 바깥에서 천송이의 매니저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라고 쓰인 문구를 보고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미 어떤 뉘앙스인지 실컷 얘기해놓고, 도대체 누구에게 뭘 묻는 건지.
= 천송이! 야, 천송이!
“......”
기사를 하나 하나 자세히 다 읽은 송이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안대표의 목소리에 다시 전화를 받았다. 범이는 아무런 표정 없는 송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 기사 봤으면 당장 여기로 와서 얘기 좀 하자.
“안 돼. 나 내일 수업 발표 준비 해야 돼.”
= 지금 그게 중요해?
“어! 나한텐 중요해. 혼자 하는 거면 모르겠는데, 다른 애들 점수도 달려 있는 거라고.”
= 니 점수는. 너 배우 인생으로서의 점수는 어쩔 건데?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지, 뭘 그래? 어디 한 두 번이야? 설마 사실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그건 당연히 아니지. 니가 나한테 말도 없이 그럴 애도 아니고. 어쨌든 사진이 있으니 하는 말이잖아, 지금.
“...내일 얘기 할게. 알아서 잘 대처해줘.”
= 야, 천송이!
송이는 통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떻게 그 사진들이 그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이 되어서, 누구의 동의도 얻지 않고 세상에 퍼질 수가 있는지.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머리 속이 깜깜해졌다.
“누나...”
“......”
아마 종종 연락하는 몇몇 기자들에게서도 곧 전화가 쏟아지겠지-라는 생각에 송이는 핸드폰 전원을 끄려 했다. 그러자 화면에 보이는 사진. 두 사람의 사진. 웃고 있는 내 옆자리의 그. 민준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안함을 느꼈다. 나는 괜찮은데, 그는 어떡하지. 나는, 괜찮은데...
“일단 집에 가자.”
“...네.”
핸드폰을 꼭 쥐고 있는 손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은데, 나는 괜찮은데... 이제 그가 괜찮지 않으면, 내가 괜찮지 않다.
“......”
핸드폰 버튼을 길게 누르자, 웃고 있는 우리의 사진이 사라졌다. 아무런 빛도 없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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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회사 들어가서 알아볼게요. 누나는 집에서 쉬세요.”
“어...그래. 고마워.”
송이는 집에 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새로 한 네일 끝이 다 벗겨져 있었다.
“누나, 저기 교수님...”
“......?”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와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끄자, 곧 헤드라이트 불빛도 꺼지면서 그 앞에 서 있던 민준의 모습이 보였다. 이마를 짚은 채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송이는 몸을 일으키며 티 나지 않게 얼굴을 바꿔 반가운 척을 해야만 했다.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하는 그는, 그냥 평소와 같아보였다.
송이는 범이에게 고맙다고 먼저 가라고 인사를 한 뒤 차에서 내렸다. 민준이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왔어?”
그의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 내가 원래 어떻게 웃었더라, 그가 와줘서 반가울 때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기분이 좋을 때 어떤 행동을 했더라… 갑자기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자메뷰 현상. 그의 수업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이미 경험한 일인데, 처음 경험하는 것 같은…
“왜 또 말도 없이 왔어요.”
“그냥, 산책하다가?”
“치...그 놈의 산책.”
마주 선 채 잡은 그의 손이 차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지. 방해하지 말라고, 공부하는 동안은 연락하지 말랬더니 진짜 하루 종일 문자 한 통도 보내지 않은 사람. 괜히 집 앞에서 기다린다고 하면 내가 공부하다 말고 올 것 같아서 마냥 나를 기다렸을 게 뻔하다.
“오늘 한 번도 못 봤잖아.”
“응... 나도 보고 싶었어.”
얼굴을 감싸오며 가만히 송이를 가까이서 응시하던 그는 어제와 같았지만, 송이는 같을 수 없었다. 12년을 하고 살아온 연기도, 지금만은 할 수가 없어 그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표정을 숨기기만 한다. 서늘한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온기를 나누어준다.
“공부 많이 했어?”
“아니. 큰 일 났어. 공부하는 거 왜 이렇게 어렵지?”
“그래도 열심히 하면 후회는 안 할거야.”
“응. 나 발표 연습도 거의 못 했어. 내일 나 못 하더라도 비웃지마?”
“뭘 비웃어- 그럴 일 없어.”
항상 크게 웃지 않는 그의 작은 웃음 소리는, 이렇게 가슴에 귀를 대고 있으면 아주 잘 들린다. 눈을 감으면, 작고 어두운 동굴에 그의 심장 소리와 목소리만이 남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도서관에 사람이 많더라, 습한 게 비가 올 것 같지 않냐, 전공 과목이 너무 어렵다... 송이는 지금 온통 난리가 났을 그 기사에 대해 그에게 말해줘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오늘 있었던 일을 억지로 떠들어대야 했다. 아무리 아니라는 반박 기사를 내고 수습하고 있다 해도, 내일이면 다들 그 이야기를 할 텐데. 민준을 아는 동료나 학생이라면, 분명 그 사진 속 교수가 민준이라는 걸 눈치챌 거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로 학교에 간 민준은 그런 사람들의 평상시와 다른 눈빛에 당황할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그에게 알려야만 할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으며 조심하지 못한 내 탓이니 미안하다고. 조금만 이해해달라고...
“있잖아, 교수님...”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그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려 했다.
“...천송이.”
“......?”
하지만 그는 그런 송이를 더 세게 껴안아왔다. 숨을 쉴 수가 없을 만큼 저를 꽉 끌어안은 민준은 더 가까워진 귓가에 송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는, 출석부 속 50여 명의 학생들 중 41번째로 부르는 이름이 아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감싸 안아주었던, 그런 목소리였다.
“걱정하지마.”
“......”
“나는 괜찮으니까, 당신도 괜찮았으면 좋겠어.”
“......”
“그러니까 그냥 다... 걱정하지마.”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는 그의 손이 유난히 더 크게 느껴졌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항상 같은 그 모습 그대로, 나에게로 산책을 와 주었다. 마치 조용히 반창고를 건넸던 것처럼, 단잠을 깨우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어깨를 빌려주었던 것처럼...
“...알았지?”
“...응.”
송이는 그가 껴안은 만큼, 그의 단단한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옷깃을 꽈악 붙잡았다.
내가 언제나 잘난 척 하듯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 살다가 가끔, 내가 당신에게 많이 모자라게 느껴지고, 나 때문에 원치 않은 일을 겪게 되더라도... 나를 놓지 말아줘.
“오늘은 진짜 빨리 들여보내줄게.”
“...알았어. 들어가서 발표 준비 해야지.”
“그래, 너무 늦게까진 하지 말고. 몇 번 실수해도 봐줄게.”
“큰 일 날 소리!”
“그런가?”
잠시 서로를 끌어안고 아쉬움을 달래다 굳게 마음을 먹고 오늘의 작별 인사를 하기로 한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면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참았다. 농담 섞인 평범한 얘기를 하며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그는 내가 괜찮길 바란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래야만 했다.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괜찮은 거니까, 나는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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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송이는 보통 때처럼 혼자서 학교에 가겠다고 했지만, 회사 사람들 모두의 만류로 매니저와 함께 와야 했다. 심리학의 이해 마지막 강의가 있는 232 강의실로 오는 길에도 그동안 받았던 시선이란 시선은 죄다 몰아서 받은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어제와 같은 오늘일 뿐인데, 다른 모든 학생들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야, 봤어? 천송이 성적 잘 받으려고 교수한테 뇌물 줬대. 그렇게 해서 성적 잘 나오면 좋나? 다 이미지 때문이지. 무식한 이미지 벗고 싶어서 대학도 늦게 들어 온 거래잖아. 그런데 성적 안 나오면 뇌텅텅 인증이니까
모세의 기적도 아니고. 복도를 지나갈 때 양 옆으로 늘어선 학생들의 술렁거림이 하나씩 다 들렸다. 작게나 말하든가.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라. 너네가 언제 마음대로 생각 안 한 적 있었냐. 나중에 아닌 게 밝혀져도, 자신이 했던 말은 새까맣게 까먹고 ‘아, 그랬구나. 아님 말고.’라고만 할 뿐, 나한테 사과 같은 걸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난 너무도 잘 아니까.
근데 그거 받은 교수는 누구래? 너, 몰라? 심리학과 도민준 교수. 아니다, 교수도 아니고 강사라던데? 어머, 그 잘 생겼다고 학교 게시판에서도 유명한 사람? 그 사람이 그랬단 말이야? 와, 진짜 깬다. 강사라서 돈이 좀 궁했나?
“야, 너...”
“누나! 이러지 마세요...”
송이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그냥 개가 짖어라, 하고 흘려 들었지만, 민준의 이야기는 그럴 수가 없었다. 순간 생각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사고 회로가 정지 되어, 그 말이 들린 쪽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누나, 이러시면 교수님한테 더 안 좋아요. 범이가 재빨리 막아서서 겨우 그만둘 수 있었다. 막상 마주치니 아무 말도 못한 두 사람은 책임 지지도 못할 말만 뱉어놓고 뒤돌아 급한 걸음으로 가버린다.
강의실 앞에 도착하자 매니저가 같이 들어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송이는 오버 좀 하지 말라고, 초등학생도 부모님이 수업에 같이 들어오진 않는다고 겨우 말렸다. 수업 마칠 때 맞춰서 데리러 오겠다는 범이를 보내고 난 후에야 약간의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강의실로 들어섰다.
“어? 언니이...”
“누나...오셨네요.”
“어. 그럼 오지, 안 오냐?”
과제 발표날이라 오늘은 학생들이 조별로 앉아있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같은 조원들 자리 사이에 앉으며 손 부채질을 해댔다. 날도 더럽게 덥네. 조원들은 송이가 온 것에 대해 당황해 하면서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 나 오늘 안 올 줄 알았어?”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발표 나 아님 누가 할 건데. 너네, 나보다 말 잘해?”
“아니죠! 당연히... 누나가 하셔야죠.”
나 먹튀하고 그러는 사람 아니야, 왜 이래- 송이는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더 크게 웃으면서 옆에 앉은 남학생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오늘 발표할 자료를 가방에서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조용히 스크립트를 읽어가며 마지막 연습을 하는 송이를, 주변의 조원들뿐만 아니라 강의실의 모든 학생들이 힐끔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누나.. 그 교수님 진짜 도민준 교...”
“영진 오빠!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얘기했잖아요!”
“야, 송연주. 너도 뭘 안다고 그러냐?.”
“아, 암튼. 모르면 조용히 좀 있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두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연주가 알아서 먼저 나서서 쓸데없는 궁금증들을 미리 잘라버린다. 그러고선 연주가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괜찮냐고 물어주어서 참 고마웠다.
“괜찮아요, 언니?”
“그럼.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사람들이 다 오해해서...”
“오해니까, 언젠가는 풀리겠지.”
송이는 연주에게 별 문제 없다는 얼굴로 웃어주고는, 귀를 닫고 자료를 보려 애썼다. 하지만 곧 그럴 수 없을 만큼 그 소음들은 더 커졌고, 고개를 들어 본 곳엔 민준이 강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웅성댐. 그러나 민준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교탁 앞에 서 출석부를 펼쳤다. 조용히 하라는 말이나,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것도 없이 바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소란스러움이 조금 잦아졌지만, 그래서 그런지 다른 학생들의 말들이 더 잘 들리는 것만 같았다.
뻔뻔하다. 어떻게 그래 놓고 오늘 수업을 들어올 수가 있지? 오늘 안 오면 같은 조 애들 엿 먹이는 건데, 양심은 좀 남았나보지. 교수한테 로비한 학생이 무슨 양심은. 야, 교수는 또 무슨 교수냐. 그냥 돈 벌려고 하는 시간 강사지. 천송이 돈 엄청 많이 벌었을 텐데, 좀 많이 받았으려나? 아...진짜 얼굴 하나만 보고 이거 수강신청 했는데, 저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안 했지... 그러게. 이게 다 우리 학교 망신 아니야. 어차피 그게 사실이면 학교에서 짤릴텐데. 어차피 우리는 성적만 잘 받으면 돼. 성적도 엄청 짜게 준다던데. 진짜 괜히 들었네.
“......”
발표 스트립트 종이를 쥐고 있는 손이 점점 떨려와 책상 아래로 손을 숨겼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로 불리는 제 이름은 뚜렷하게 들렸는지, 겨우 침을 한 번 삼키고 대답을 한다. 천송이, 라고 민준이 출석을 부를 때 정말 강의실의 모든 학생들이,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선 단 하루 만에 변해버린 날카로운 시선들은 일제히 다시 민준에게로 향한다.
근데 오늘 아침에 뇌물 그런 거 아니라고 하긴 하던데. 야, 그럼 아니라고 그러지 맞다고 하겠냐? 그럼 그 사진들은 뭔데. 딱 봐도 뭔가 있는 것 같잖아. 아니, 도민준 교수님이 천송이랑 천송이 매니저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 하긴...그것도 그러네. 둘이 왜 만났는지는 제대로 설명 안 해놨더라.
쉴 새 없이 들려오는 그에 관한 이야기들. 오늘 아침 소속사에서 어제의 기사를 전면 부인하는 반박 기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이와 사진 속 만남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었기에 다들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차라리 내가 먼저 밝혔어야 하는 건가. 아주 조금 망설인 사이, 검은 소문들은 걷잡을 수도 없이 커져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수 백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하는 데에는 단 몇 시간, 아니 몇 분조차 걸리지 않는다.
“팀 당 발표 10분, 질문 3분입니다. 1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발표가 시작되자 그제서야 강의실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민준은 발표를 지켜보기 위해 강의실의 가장 뒤 쪽으로 이동했다. 강의실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송이의 옆을 지나쳤지만, 차마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발표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송이네 조는 조금 앞 쪽인 편이라 금방 차례가 돌아왔다. 송이는 크게 한 번 숨을 고르고, 조원들의 응원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단 앞으로 가 스크린 옆에 자리를 잡고 포인터를 손에 꽉 쥐고는 학생들을 마주 보고 섰다.
“......”
백 여 개의 눈이 나를 다 쳐다보고 있다. 이것보다 더 큰 곳, 더 많은 눈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당당했다. 그만큼 익숙하고도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 그것이 지금은 몹시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또 한 번의 자메뷰.
그리 호의가 느껴지지 않는 눈빛들. 그 속에서 연주가 주먹을 불끈 쥐며 힘내라는 응원을 보내온다. 연주에게 한 번 웃어주고, 시선을 약간 옮기자 강의실 가장 뒤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그가 보인다. 강의실에서 언제나 표정이 없는 것처럼 그는 지금도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한 채 서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무런 말이 없어도,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아도 안다. 그는, 내게 말을 했던 시간보다 말을 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더 길었으니까.
지금 내가 너의 손을 잡아줄 수는 없다고. 그러니 넌 괜찮아야만 한다고. 그가 그러길 바라니까 나는 또다시 그래야만 했다.
“…안녕하세요. 15학번 천송이입니다. 일상의 심리학, 3조 발표하겠습니다.””
송이는 학생들 앞에,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젯밤 새벽 2시까지 연습했던, 그의 마지막 수업을 위해.
#
발표가 모두 끝나고, 민준이 다음주 기말고사에 대한 공지를 한 번 더 한 후 수업은 일찍 끝났다. 학생들이 강의실을 나서는 동안, 범이가 뛰쳐들어와 가방을 챙기고 있는 송이에게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팔을 잡아당기는 범이에게 끌려가며 교탁 앞에서 수업 정리를 하고 있는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은 열린 강의실 앞 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준이 보고 있는 강의실 바로 바깥은, 가득 몰려 있는 사람들로 인해 아주 시끄러웠다.
“천송이씨! 한마디만 해주시죠!”
“기사 내용이 사실입니까?”
문 앞으로 나오자마자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범이는 그 틈을 헤집고 밖으로 나가려 했고, 송이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지만, 사람들의 벽에 가로막혀 그는 보이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아무 것도 할 수도 없었다.
“왜 교수를 외부에서 개인적으로 만나신 겁니까?”
“금품을 전달한 사실이 맞습니까?”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말도 안 되는 질문들에 대답할 생각도 없었지만, 온갖 소리들이 뒤섞여 뭐라고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범이가 앞에서 기자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고, 송이는 고개를 숙인 채 뒤를 따라만 가고 있었다. 점점 숨을 쉬기 어려운 답답함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를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혹시 사진 속 천송이씨와 함께 있었던 교수님 아니신가요?”
“......!”
귀를 틀어막고 싶은 소음들 속에서도 유난히 뚜렷하게 들린 그 말에, 송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 막 강의실에서 나오고 있는 민준이 사진 속 남자임을 알아챈 기자들은 순식간에 그에게로 몰려갔다. 기자들이 반쯤 자리를 옮기자 범이가 이때다 싶어 팔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누나, 빨리 가요.”
“......”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민준의 얼굴이 겨우 보였다. 무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문 채 발걸음을 옮기려 하지만, 좀처럼 앞으로 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고개를 숙이거나 피하지도 않았다.
“범아, 저 사람 데리고 가면 안 돼?”
“네?”
“저 사람 저렇게 혼자 가야 된단 말이야...”
“제 정신이에요? 지금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최선이에요.”
가까스로 그 곳을 빠져나가 빠른 걸음으로 반대편 복도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돌아보았다. 범이는 그런 송이를 억지로 끌고 밖으로 나왔다.
천송이씨, 저 분이 사진 속 그 남자가 맞습니까? 천송이씨, 맞습니까? 사실입니까? 천송이씨, 천송이씨! - 나를 구석으로 몰아 윽박지르는 것만 같은 물음들에 대답을 하고 싶어졌다.
맞아요. 그가 맞아요. 인과 관계가 어떻게 되든, 결론은 나에게 그는 뭐든지, 맞아요.
“......”
그러나 나는 섣불리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그럴 자격이 내게 있는지, 나 스스로가 먼저 대답해야만 했으니까.
“일단 집으로 갈게요. 잠잠해지면 대표님이 부르실 거예요.”
“......”
“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
“......”
기자들을 피해 간신히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밴은 송이가 올라타자마자 곧바로 출발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무기력해졌다.
#
엘리베이터에 타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길래 아무 생각 없이 내리려 하니, 다른 사람이 먼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직 1층이었다. 버튼을 누르지 않아 한참을 움직이지도 않는 엘리베이터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23층 버튼을 누르고 올라갔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려니 끝자리가 6이었는지 8이었는지 갑자기 기억이 안 났다. 한 번을 틀리고 나서야 문을 열 수 있었다. 6이 아니라 8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서니 주방 쪽에서부터 햇살이 길게 드리워져 있는 게 보였다. 오후가 되면 뒤 쪽으로 해가 많이 들어온다. 운동화를 벗고 들어가려는데 끈을 너무 세게 묶어 잘 벗겨지지가 않았다. 허리를 숙이니 이번엔 긴 머리가 흘러내리는 게 거슬린다. 그대로 몸을 돌려 털썩, 현관 앞에 주저 앉았다. 신발 끈을 하나씩 푸는 동안 뭘 먹을 지 고민했다. 점심도 못 먹는데. 집에 먹을 게 뭐가 있더라. 안 그래도 요즘 너무 잘 먹어서 살이 좀 찐 것 같은데, 이 참에 다이어트라도 해야 하나- 라고 생각했다.
끈을 다 풀고, 신발을 벗고 나니 막상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가 귀찮다.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그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 하루 종일 꺼놓은 핸드폰. 누가 얼마나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나- 약간은 해탈한 마음으로 전원을 켰다. 부재 중 통화 35통. 문자 21통. 뭐야, 나한테 이 정도 밖에 관심이 없어? 한 50통은 와 있을 줄 알았는데. 메시지함에 들어가 대충 목록을 훑어보았다.
이 기집애는 왜 연락이 안 되니? 자꾸 전화 안 받으면 집에 쳐 들어 간다. 엄마. 뭔 일이야. 윤재가 뭔 일로 문자를 다. 천송이씨, 인터뷰 한 번 하시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기자. 언니, 힘내세요. 그 말 밖엔ㅠㅠ. 연주.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다니. 솔직하게 밝히는 게 어때? 우리 사진을 찍어줬던 작가 언니...
그리고 제일 위에, 불과 3분 전에 온 메시지. 도민준.
잘 들어 갔어?
“......”
단 5글자의 그 말들이, 그의 목소리가 되어 귓가를 맴돌았다. 안 그래도 불안하게 버티고 있던 마음이 더 거세게 흔들리고, 갑자기 북받쳐 오르는 서러움에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졌다. 핸드폰 액정 위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으흐흑... 흑..”
이 곳엔, 한 순간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뒤에서 수군거릴 사람도 없고, 왜 우냐고 캐물을 기자들도 없다. 내가 괜찮길 바라는 그에겐 아무렇지 않게 답장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마음 놓고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다리를 끌어 모아 안으며 무릎에 얼굴을 묻고 놀이터에 혼자 남겨진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그 넓은 집을 다 놔두고 굳이 지저분한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들어가지도 못 하고, 나가지도 못 한 채로... 그렇게 한참을 괜찮지 않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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