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May, be sweet 12 본문

May, be sweet 12
#
“그러니까 그게 왜 진짜처럼 인터넷에 돌아다니냐는 거지.”
“홍보용이라니까? 사람들 관심 끌어 모으려고.”
“무슨 홍보를 그렇게 하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진짜인 줄 알 거 아니야.”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 아무도 없는 조용한 강의실이 아까워 잠시 앉아있다 가기로 했다. 강의실 책상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민준이 근데...라며 제일 처음 꺼낸 이야기는, 바로 문제의 그 커플 화보 사진이었다. 조금 전까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안아주던 사람이 갑자기 따지듯 물어오니, 송이도 살짝 당황을 하긴 했다.
뭔 일인가 싶어 핸드폰으로 검색해보니, 지난 주말 홍콩에서 촬영했던 제품의 회사가 정식으로 광고가 나가기 전에 화제를 끌어 모으려고 사진 한 장을 인터넷에 올렸던 모양이다. 광고 컨셉 자체가 도시의 데이트여서 그렇게 사진이 나온 것뿐인데 왜 그랬냐 묻는 것은, 송이에겐 일을 했을 뿐인데 왜 일을 했냐 묻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송이는 제 앞에서 미간을 구기며 열변을 토하고 있는 민준이 약간 의아했다.
“에이, 그냥 사람들이 호기심에 한 번이라도 더 보게 하려는 것뿐이라니까? 그런 걸 바로 언론 플레이라 그러지.”
“언론 플레이는 무슨... 대중을 속이는 거지, 그건.”
하지만 몇 마디를 주고 받다 보니, 송이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일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오해하는 게 싫었던 거다. 그 오해가 더군다나 ‘다른 남자’라서 더더욱.
“아이고, 그래서 속으셨어요? 도민준 교수님?”
“내가 속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막 오해를 하고 그러니까-”
“뭐라고 오해했는데?”
“아니, 그냥...뭐. 크흠.”
점점 목소리가 커지면서 삿대질에 가까운 손짓을 해대는 그는 지금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거다. 얼마 전, 그의 수업에서 들었던 강의 내용이 생각난다. 질투는 인간의 감정 중 가장 낮은 쪽에 속하는 치졸하고 유치한 것이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겪게 되는, 일종의 퇴행의 현상이라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서 알고 있는 질투라는 경험을, 그렇게도 어려운 말을 섞어가며 열심히 설명하시더니. 이론이 아닌 실습을 해 보신 느낌이 어떠려나, 우리 도민준 교수님.
송이는 처음엔 나름대로 해명을 하려 했지만, 별로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깨닫고는 그냥 그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솔직한 귀가 빨개진 건 뭐 기본이고, 눈동자를 굴리며 헛기침을 해대는 것까지. 이미 몇 번 겪어본 모습임에도 볼 때마다 사랑스럽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질투라니. 송이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조금만 더 그의 이론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하긴, 아무래도 대한민국 탑인 나랑 한준영이 사귄다고 하면 시끌벅적 난리가 나겠지.”
“뭐?”
“촬영 때문에 몇 번 봤는데, 한준영 사람이 좀 괜찮더라고.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지. 성격도 뭐, 나쁘지 않고.”
“......”
“주변에 보면 그렇게 같이 연기하다가 눈 맞는 사람들 많아. 가끔 드라마 보다가 진짜 같은 애들 있잖아? 의심 해봐야 된다니까.”
송이는 인터넷에 돌아다닌다는 그 사진을 핸드폰에 띄워놓고 보면서 괜히 고개를 끄덕여본다. 송이의 말에 발끈-하며 안 그래도 내내 찡그리고 있던 그의 미간이 점점 더 구겨질수록 장난 치고 싶은 마음도 더 커진다.
“천송이.”
“...어? 네? ”
송이가 신나게 얘기를 할수록 민준은 점점 말이 없어지더니, 갑자기 송이의 이름을 불렀다. 둘이 있을 때 부르는 다정한 말투가 아닌, 강의 시간에 출석을 부르는 감정 없는 낮은 목소리와 같아서 송이는 저도 모르게 출석에 대답하듯 네? 라고 말하고는 눈을 껌뻑거렸다. 내가 너무 심했나. 화났나…?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의자 등에 축 늘어져 기대어 앉아있던 송이를, 속눈썹이 길게 덮은 눈이 내려다 본다. 네 술수를 내가 다 꿰차고 있다는 걸 살짝 파인 입꼬리가 말하고 있다. 당황한 송이가 몸을 일으켜 자리에 똑바로 앉으며 얼른 시선을 피해버린다. 에이. 그러니까, 적당히 했어야지.
“아, 아니? 아닌데?”
“아니긴. 방금 전까지 좋아하니 어쩌니 하던 사람이 다른 남자 얘기하면, 내가 믿겠어, 안 믿겠어?”
“...흐. 그치? 내가 너무 오버했지?”
“어. 엄청.”
송이는 결국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잠시나마 꿈꾸었던 계략을 인정했다. 민망함에 괜히 민준의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팔짱을 끼고는 머리를 어깨에 기댄다. 그랬다가 늦은 와중에도 급하게 바르고 온 비비 크림이 생각나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젯밤에도 조금 앞서 걷던 그의 검은색 수트 자켓 어깨 쪽에 묻어 있던 화장품 자국. 그거 잘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내주던 모습이 설레도록 멋있었다.
민준의 팔 사이로 집어넣은 손이 천천히 팔을 타고 내려오다 그 끝의 손을 잡는다. 손바닥을 스친 송이의 손가락이 민준의 손가락 사이 사이에 자리잡고 자연스레 서로의 손등을 꽉 붙든다.
“……?”
손을 잡고선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던 중에, 강의실 뒷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다 반사적으로 뒤를 보았다가,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돌아보지 말라는 듯 송이의 머리에 살짝 손을 올린다.
“어? 여기 소비심리 수업 아닌가요?”
“아… 아마 맞을 걸요.”
민준은 얼른 송이의 뒤에 서서는 뒷문으로 들어 온 학생의 질문에 답을 했다. 야야, 여기 맞대- 복도까지 쩌렁 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이어 다른 학생들도 우르르 들어온다.
야, 수업 끝나고 한 잔 하자. 너무 이른 거 아니야? 볼링이나 한 판 치고 하자. 콜! 치맥 어때, 치맥! 다행히 강의실 뒤 쪽에 자리를 잡은 학생들은 민준과 그 뒤에 앉아있는 여자에겐 별 관심이 없는 듯 했고, 민준은 그 틈을 타 송이의 등을 두드려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었다. 송이는 곧바로 몸을 숙이고 앞문으로 나갔고 민준도 그 뒤를 따라갔다.
“못 봤겠죠?”
“어. 못 봤을 거야.”
문 밖에서 벽을 보고 서 있는 송이는 어느새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민준이 그게 더 티나- 라고 했더니 그런가? 하고 다시 선글라스를 벗어버린다. 그러고선 킥킥 웃으며 민준의 등 뒤에 슬쩍 숨는다.
“아, 재밌어.”
“뭐가?”
“그냥, 아슬아슬한 게 재밌잖아.”
“그러다 큰 일 나지.”
“무슨 큰 일? 포털 사이트 메인에라도 뜰까 봐? 한류스타 천송이, 재학 중인 대학의 강사와…”
“……?”
“…음, 뭐. 아무튼 그거.”
별 별 말은 다 하면서 아직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는 않는 단어를 대충 삼켜버리고, 그저 말없이 웃으며 복도를 걷는 그의 뒤에 딱 붙어 졸졸 쫓아간다.
“아까 걔네들 볼링 치러 간다던데, 좋겠다…”
“볼링 좋아해?”
“아니,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닌데, 친구들이랑 같이 가면 뭔들 안 재밌겠어.”
“……”
“볼링 한 판 딱 치고, 진 사람이 맥주 쏘고! 크으.”
송이는 마치 자기 자신이 벌써 볼링 치고 맥주 한 잔 한 것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무언가 놔두고 온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의 강의실로 하나 둘 들어가고 있는 학생들. 그들이 마냥 즐거워만 보이는 건 그저 부러움이 만들어낸 착각이려나. 저들이 몇 살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송이 자신은 치열하게 사느라 잊어버린, 20대의 젊음은 이유를 막론하고 재미있어 보인다.
지금의 나는, 내 곁에 있는 사람으로 인해 함께 거리를 거닐고,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고, 소박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여유 있는 커피를 마시고,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일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일찌감치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버려야 할 건 버려야 하는 삶을 선택한 나에겐, 그런 것들이 충분히 감사하고 더할 나위가 없다는 걸 안다. 그렇게 원래 내게 있었던 것이었지만 있는 지도 모르고 살았던 나의 또 다른 일상을 살고 싶어지고,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는 것이, 너무 큰 욕심이라는 것도 잘 알고.
송이는 수업 시간을 앞두고 복도에 갑자기 많아진 학생들 틈에서 고개를 숙이며 그의 등 뒤에 더 바짝 붙어 자신을 숨겼다.
#
“작품 하는 중도 아닌데 왜 이렇게 스케줄이 많아아!”
“일 없는 것보단 낫죠.”
“적당히 해야 할 거 아냐- 학교 다니기도 바빠 죽겠구만.”
“연애하느라 바쁘신 건 아니구요?”
“야, 나 우리 도교수님 못 본지 5일째 거든?”
갑자기 주중에 몰린 스케줄 탓에 지난 화요일부터 쭉 그를 보지 못했다. 하필 매일 매일 봐도 모자랄 것 같은 한창의 봄날에 말이지. 언제부터 매일 봤다고- 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속상한 걸 어쩌라고. 수, 목, 금, 토요일, 그리고 한 주의 마지막인 오늘까지 못 보면 5일 째다. 바쁘게 일을 하는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그의 얼굴 한 번 볼까 짬을 내보려 했지만, 더 간절해 보라고 장난이라도 치는 듯 서로의 시간은 빗겨가기만 했다.
“얼마 전에 수업에서 보셨잖아요.”
“그 때도 수업만 하고 니가 데리러 와서 한마디도 못 하고 그냥 갔잖아.”
아, 중간에 수업 때 한 번 보긴 봤지. 그래도 그건 봤어도 본 게 아니라고. 내가 말하는 건, 단 둘이서, 가까이 서로의 눈을 바라 보고, 웃어주고, 다정한 말을 귓가에 속삭여 주고, 손을 잡아주고, 그런 거란 말이야. 그 때 수업 시간에도 눈 한 번 제대로 맞춰주지 않는 그가 어찌나 야속하던지. 수업 끝나고 가는 길에라도 보려고 했는데, 웬 여학생 하나가 뭘 물어보겠다며 계속 민준을 붙잡고 있었다. 그 사이에 범이가 와서는 빨리 가야 한다고 인사도 한 번 못 하게 하고 나를 낚아채 가버렸지. 그 짧은 치마를 입고 민준 옆에 딱 붙어 있던 여우 같던 여학생과 하필 그 때 딱 나타난 범이를 한 대만 때리고 싶었다.
“왜 또 제 탓 하세요.”
“아, 몰라. 암튼, 이제 조만간 기말고사니까, 안대표 보고 스케줄 좀 줄이라 그래.”
요새 범이는 나의 뜬구름 같은 상사병과 괜한 짜증을 혼자서 다 감당하고 있다. 가만히 있다가도 뜬금없이 잘 생기지 않았냐 묻고, 좀 무뚝뚝한 게 흠이지만 알고 보면 진짜 다정하다, 목소리는 또 어찌나 멋있는지-라고 자랑 자랑을 하다가도, 갑자기 울상을 지으며 보고 싶다, 연락이 안 된다, 남는 시간 없냐- 징징거리기까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예예, 듣고만 있는 범이에겐 좀 미안하지만, 민준과의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너한테 짜증낼 게 아닌데, 내 말 잊어버려- 범이에게 계속 신경질을 낸 것이 미안해 한숨을 쉬며 사과를 하고는 밴의 넓은 뒷좌석에 기대 누웠다.
= 괜히 딴 짓 하지 말고 빨리 자. 내일 보면 되잖아.
메신저 대화창 속 마지막 그의 메시지를 보면 볼수록 더 속이 상한다. 민준에겐 최대한 섭섭하지 않은 척 했지만, 못 보는 날이 하나 둘 계속 될 수록, 천송이 이름 밑에는 울고 있는 이모티콘만이 늘어나고 있었다. 계속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길 며칠 째. 쉬는 날이 딱 하루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그와 함께 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거고.
“......”
시트에 기대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꿈에선, 나는 학교 도서관에 처음 갔고, 미로 같은 열람실 한가운데에서 그와 마주쳤다. 분명히 나를 알아보고도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척 하던 그 차가운 눈빛. 그와 나란히 서 있었던 그 도서 분류 코드 180, 심리학 코너 속에서 나는 내 위로 수 백 권의 책들이 어지럽게 쏟아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가 언제였더라,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 것처럼 기억을 더듬어 갈 때쯤, 범이가 나를 깨웠다.
“누나!”
“…으음. 다 왔어?”
너무 짧은 사이에 깊게 잠이 들었다 깨어서인지 정신이 없었다. 멍한 기운으로 창 밖을 보니 아파트 단지 입구가 보였다. 평소 같으면 바로 집 앞까지 들어왔을 텐데,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댔길래 왜 차를 여기에 댔냐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범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범이가 턱으로 대충 창 밖 쪽을 가리키고는 빨리 내리라고 손짓을 한다.
“......”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본 창 밖엔, 꿈 속의 그가 있었다. 아파트 안 벤치에 앉아있다 송이의 밴이 들어오는 걸 보고 일어난 그가 이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몸이 뻐근했다는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앞에 놓여져 있던 거울을 든다. 부산스럽게 눈 밑에 번진 아이라인을 대충 닦아내고 머리를 정리한다.
“아, 누나 빨리 내려요.”
“이 자식이, 요즘엔 문도 안 열어주고.”
“문 열어줄 사람이 밖에 있는데 제가 왜 열어줘요!”
“...뭐... 아무튼. 조심히 들어가라.”
들어 가는 길에 민준을 발견하고 그 바로 앞에 차를 세워준 범이에게 고맙긴 했지만, 괜히 민망해서 성질을 한 번 부린다. 요새 내가 너무 징징대긴 했지. 갖고 싶어했던 한정판 운동화 사줄게- 베시시 웃으며 딸깍, 문 손잡이를 당기자 이어 밖에서 문이 가볍게 열린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서서히 보이는 그가 손을 내밀고, 송이는 그 손을 가볍게 잡고 차에서 내린다. 함성 소리와 카메라 플래시 세례는 없었지만 마치 레드카펫에 입장하는 것처럼 괜시리 가슴이 떨린다.
그가 문을 닫기 전에 범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길래 송이도 덩달아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다. 일 잘 하고 눈치까지 빠른 매니저는 뒷문이 닫히자마자 잽싸게 아파트를 빠져나갔고, 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가고 나서야 두 사람의 인사가 이루어진다.
“뭐예요- 말도 없이.”
“그냥, 잠이 안 와서 산책하다가.”
“산책하다가 여기까지 왔다고?”
“뭐. 겸사 겸사...”
내일 보자 길래 오늘도 못 보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찾아와준 덕분에 그를 보지 못한 날은 하루 줄어들었다. 민준은 송이가 차에서 내릴 때 잡아주었던 손을 바꿔 쥐며 깍지를 껴온다. 이제야 마주 본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갑다. 옆 동네라지만 걸어오기엔 꽤 멀텐데, 차도 없이 정말 그냥 걸어온 듯한 그의 모습이 어딘가 새로워 보였다. 송이는 한 발 짝 뒤로 물러나 그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 번 보았다.
“어? 나 그 쪽 정장 말고 다른 거 입은 거 처음 본 것 같애.”
“그런가?”
“보기 좋다.”
늘 보던 검은색 같은 무채색의 딱딱한 수트가 아닌, 편안한 베이지 색 면바지에 흰 티, 라이트진 셔츠를 가볍게 걸치고 있는 모습에, 왠지 자신을 향한 미소와 말투가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이렇게 일상 속의 도민준도 하나씩 알아가게 되겠지. 평범한 오늘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고, 내일의 이야기를 꿈꾸고. 송이는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한 발짝 그에게 가까이 다가 섰다. 바쁜 와중에도 메신저나 전화로 안부를 묻곤 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한 이야기들을 채워간다.
주말에 뭐 했어요? 그냥 집에서 책 보고 청소도 하고. 완전 집돌이네. 아, 오늘 아침엔 자전거 타고 한강 근처 한바퀴 돌고. 자전거 타는 거 좋아하는 구나? 나도 나중에 같이 타요, 나도 집에 썩어가는 자전거 있어요. 그래, 같이 가자. 바쁜 건 다 끝났어? 뭐 일단은. 근데 또 언제 부려먹을 지 모르지. 오늘은 무슨 촬영이었는데? 화장품 광고! 맞다, 나 오늘 완전 예뻤는데 볼래요? 이거 그 쪽한테 처음 보여주는 건데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알았어, 내가 어딜 가서 얘기한다고. 이거 봐요. 드레스 완전 예쁘죠. 어. 오늘 화장도 엄청 괜찮았는데 다 지우고 와서 아깝네. 대신 이거 봐요, 내 셀카. 뭐야, 무슨 사진을 이렇게 못 찍어? 못 찍는다고? 내가? 어. 얼굴 믿고 너무 막 찍은 거 아냐? 아니이...난 이쁘다고 생각하고 찍은 건데. 앞으로 셀카 찍지마, 그냥 남이 찍어주는 것만 찍어. 진짜 너무하시네- 좀 이상해도 예쁘다 한마디 해주면 어디 덧나나? 이렇게 여자의 마음을 몰라요. 사실이 그런 걸 어쩌라고. 뭐요? 그냥 내 눈으로 보는 게 제일 예쁘다고, 으이구.
설레는 대화 중에도 핀트를 빗겨나가곤 하는 그 때문에 대화의 끝은 늘 이런 식이다. 안 해도 될 말은 돌직구로 하고, 듣고 싶은 말은 빙빙 돌려 말하는. 민준은 이제는 내 마음도 알 때가 되지 않았나? – 라고 말하며 손을 들어 송이의 머리를 헝클어트려 놓는다. 송이는 그것도 좋다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로 흐흐- 웃기만 한다.
“그럼 우리 그 쪽이 하던 산책이나 마저 할래요?”
“...음...”
“콜?”
“...아냐. 이만 들어가서 쉬어.”
“벌써?”
늦은 시간임에도 찾아와 준 반가움에 들떠있던 송이의 표정이 금세 울상이 된다. 꽉 잡고 있던 손에도 힘이 쭉 빠진다. 민준은 흐트러진 송이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자신도 자기가 한 말이 아쉬운 듯 긴 숨을 내쉰다.
“피곤해 보여서 그래.”
“괜찮은데...”
“괜찮긴. 눈이 빨갛잖아.”
“이건 오늘 눈 화장을 좀 심하게 해서 그래! 피곤하고 그런 거 아닌데...”
“하루 종일 구두 신고 서 있었을 텐데, 무슨 산책이야. 들어가서 쉬어.”
머리를 쓰다듬던 양 손으로 송이의 작은 얼굴을 감싼 민준이, 송이의 지친 눈을 깊게 들여다본다. 송이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곤한 거 아니라는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 힘든 하루인 건 사실이지만, 아마 당신을 보지 못했더라면 더 힘들었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아, 그럼 산책 말고 다른 거!”
“...다른 거 뭐?”
“음...어...뭐하지? 뭐 해야 하지?”
또 그가 들어가라고 할까봐 송이는 얼른 다른 핑계거리를 찾았다. 선물같이 주어진 오늘의 마지막 시간을 그냥 흘려 보내기 싫어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송이는 큰 손에 얼굴이 붙들린 채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고, 민준은 그 모습을 귀엽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괜히 무리 하지 말고...”
“맞다! 영화! 우리 집에 가서 영화 볼래요?”
“...어?”
그러다 번뜩 든 생각에 쌍꺼풀이 짙게 져 있던 눈이 반짝인다. 이 정도는 봐주겠지? 라고 생각하며 활짝 올라간 입꼬리. 하지만 곧, 아주 잠깐의 정적 위에 겹쳐지는 그의 표정을 따라 천천히 다시 내려온다.
“...아...”
아. 탄식, 그리고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 줄임. 송이의 눈동자는 금방 민준에게서 도망가버렸고, 당황함에 민준의 양 손에서 빠져나오며 뒤로 물러섰다. 당황한 건 민준도 마찬가지인 듯, 두 사람 모두 찰나였지만 엄청 길게 느껴지는 정적 속에서 사고가 정지된 것처럼 아무 말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거기서 우리 집이 왜 튀어나와.
“...그, 그러니까 내 말은...진짜 영화만 보자는...”
“......”
“아이씨, 이게 아닌데.”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얼굴이 빨개진 채로 더듬거리던 송이의 변명은 오히려 그 말을 ‘그런 의도’로 만들어버렸다. 영화 보자고 꺼낸 말을 후회하는 건지, 안 해도 될 변명을 한 걸 후회하는 건지, 송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제 입을 찰싹 몇 대 때렸다. 입이 방정이지. 뇌를 다 거치고 말을 하란 말이야. 살짝 놀란 표정으로 있던 민준의 눈을 차마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로 있다가 천천히 한 쪽 눈을 먼저 떴다. 눈 앞의 민준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송이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민준이 웃고 있는 걸 확인한 송이도 눈을 마저 다 뜨고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하하하.”
“......”
“아니...진짜 나는 같이 있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
민망함에 마지막까지 있는 그대로를 설명해보아도, 이미 두 사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을 되돌리진 못할 것이다.
“천송이.”
민준은 복숭아 같이 붉은 얼굴로 횡설수설 하고 있는 송이의 이름을 불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불러주는 이름은, 언제나 반사적으로 그의 눈을 쳐다보게 만든다. 눈이 다시 마주치자, 그는 손을 잡고는 가까이 오도록 가볍게 끌어당긴다. 손을 잡았던 민준의 오른손은 자연스레 허리를 감아오고, 반대편 손은 조심스레 머리를 감싸왔다. 그 순간, 송이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며 숨을 참았다. 민준은 긴장하고 있던 송이의 몸을 더 가까이, 완전히 품에 끌어 안았다.
“알아.”
“......”
“나도 같이 있고 싶어.”
“......”
“먼저 같이 있고 싶다고 얘기 못해서 미안해.”
송이는 그냥 축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그의 허리에 두를까 말까 고민했다. 차갑게 내려 앉은 고요한 밤의 기운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더 진하게 들린다. 송이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을 더 세게 꽉 안아오는, 그의 숨소리 속에 담긴 의미를 읽어갔다. 그의 손가락은 머리카락 사이를 헤맸고, 그의 숨결은 목덜미에 뜨겁게 닿아있었다. 또다시 찾아온 한동안의 침묵. 이번은 변명처럼 웃으며 넘길 수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의 심장 박동을 몇 번이나 느꼈을까. 어깨 너머의 그의 얼굴은 무슨 표정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송이를 한참 동안 가만히 안고만 있던 민준이 아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집에는 다음에 갈게.”
“.......”
“오늘 같이 있으면... 내가, 안 될 것 같아.”
“......”
언제나 강단 있고 뚜렷했던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을 소중하게 쓰다듬고 있는 것도 느꼈다. 그의 온갖 감정이, 모조리 다 느껴졌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마.”
“...응. 알았어. 다음에.”
송이는 언제 그를 안을까- 고민하고 있던 팔을 들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좀 더 편안히 얼굴을 기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애틋하게 안길 수도 있고, 다음을 약속할 수도 있게 되었고- 조금은 얼굴을 붉혔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아까 나 차에서 잠깐 잠들었는데, 그 때의 꿈 꿨어.”
“그 때?”
“응. 우리 도서관에서 처음 마주쳤던 때.”
송이는 지금 이 순간, 민준에게 온전히 안겨있다는 걸 온 몸으로 느끼며 좀 전의 짧은 꿈에 대해 이야기 했다. 다정함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던, 하지만 이상하게 아찔했던 기억.
“우리 도민준 교수님 아주 그냥 나를 엄청 쌀쌀맞게 대하셨지.”
“...그랬었나?”
“괜찮아. 나도 그 쪽을 재수탱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뭐어?”
픽, 웃는 민준의 웃음을 따라 그 때로 한 번 더 돌아가 본다.
“아무튼, 그 때가 언제쯤이었는지 알아?”
“토요일이었지, 아마. 5월 초쯤...”
“어, 맞아.”
“근데 그건 왜?”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이 다 갔더라고.”
“...그러네. 벌써..”
5월의 시작 즈음, 삐딱하게 선 채로 느릿하게 마주했던 과거의 시선이, 5월의 마지막 날, 지금처럼 깊고 따뜻하게 변해오기까지. 그것이 짧은 시간이었는지, 긴 시간이었는지… 내겐 다른 경험이 없어 잘 모르겠다. 그와 함께 하는, 또 함께 할, 수많은 처음의 경험들. 그 속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설렘에 대해, 기다림에 대해, 그리움에 대해, 사랑에 대해, 나를 안고 있는 이 사람에 대해.
“응. 그런데, 그 꿈을 꾸고 나니까... 우리가 만난 5월이 더 꿈같이 느껴지더라.”
“......”
“이거 꿈 아니지?”
“...어.”
민준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으며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 물었다. 봄, 꿈. 이 봄에,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을 꿈꾸겠노라고.
“...6월에도 같이 있어줄 거지?”
“이미 같이 있어. 6월에.”
송이는 민준의 말에, 그의 허리에 두르고 있는 자신의 손을 들어 어깨 너머로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12시가 넘어 새로운 달 속에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네. 흐흐. 송이는 웃으며 그대로 고개를 더 들어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꼭대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는 커다랗고 완전히 둥그런 보름달. 어쩐지 시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밤이 밝은 것 같았다. 달을 바라보고 눈이 부시다는 걸 처음 느껴보는 것 같다. 이것도, 그로 인해 알게 된 처음의 경험이네.
송이가 하늘을 보고 있자 민준도 따라서 하늘을 보다 눈동자 속의 보름달로 시선을 옮긴다. 송이는 그의 허리에 두른 손을 조금씩 풀어 그리 허리춤쯤의 옷깃을 붙들었다. 이제 조금 아쉬움을 덜 수 있을 것 같다.
“나 빨리 들어가봐야 하는 거지?”
“어.”
“알았어요, 맘 변하기 전에.”
“그래, 마음 변하기 전에.”
송이는 먼저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민준은 아직 송이를 놓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감싸온다. 싱그럽게 웃는 송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준다.
“안녕-“
안녕, 5월. 아마 너는 앞으로의 나의 반짝이는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설레는 기억으로 남게 될 거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나는 너의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을 것이고, 그 때마다 지금 나를 바라 보고 있는 저 사람이 내 곁에 있겠지. 물론, 그러지 않을 지도 몰라. 언젠가 먼 훗날 나는 네가 있었던 지도 모르고 살고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너는, 너만은 기억해야 해. 그 무엇보다 달콤했던 너의 모든 순간들에, 나와 그가 있었음을...
#
명인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 건물 2층 232 강의실. 강의 시작 15분 전이라 아직 학생들은 거의 없다. 냉큼 잡은 자리는 중앙에서 약간 오른 편. 마음은 제일 앞 줄에 앉아 턱을 괴고 강의 하는 민준을 내내 쳐다보고 싶지만, 그러기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너무 티가 날 것 같았고 민준도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 그래서 대충 4-5번째 줄 즈음, 그가 강의 도중 습관처럼 자주 서 있는 위치가 잘 보이는 자리를 택한다. 앞에 머리 큰 애만 안 앉으면 돼.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강의 시간이 다가오자 오르르 학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이제는 옆에 앉은 학생들도 송이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송이의 주변에 학생들이 앉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긴 했다. 몇 번 봤다고 익숙한 얼굴에 송이도 반갑게 인사를 하지만, 뒷자리 친구와 이야기를 하려 등을 돌려버리는 바람에 한마디라도 더 건네보려던 건 다음으로 미룬다. 머쓱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송이는 강의실 앞문만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민준은 늘, 사무실에서 여기까지 오는 걸음의 수를 세고 있는 듯이 정확히 정각에 맞춰 강의실로 들어온다.
과목만 보자면 별 큰 관심 없는 필수 교양 중 하나일 뿐인 이 수업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출석을 부르는 그 짧은 시간이다. 그는 이 공간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같은 목소리, 같은 톤으로 불러주며 출석부만 쳐다볼 뿐, 고개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다.
어젯밤 편안한 모습과 그에 맞는 표정으로 내 앞에 있던 남자는, 오늘 다시 시크한 도민준 교수님이 되어있었다. 자기 전에 나눴던 메신저 대화 속에서 이제 더운데 타이를 안 매는 게 어떻겠냐 했더니, 오늘 정말 답답해 보였던 타이를 매지 않고 왔다. 어머, 오늘 교수님 넥타이 안 하고 오신 거봐. 멋있어! 라고 오두방정 떠는 옆 자리의 여학생은 알까나. 내 말 때문에 저 사람이 오늘 저러고 나타난 거라고- 송이는 쓸데없는 우월감을 느끼며 혼자 웃었다. 이러다 SNS에 천송이 강의 도중 혼자 웃는 미친년이라고 소문날까봐 얼른 다시 표정을 고친다.
…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웬일이지? 원래의 종료 시간을 3-40분 앞두고 민준이 뜬금없이 수업을 마치겠다고 했다. 민준의 의외의 말에 학생들도 냉큼 받아들이질 못하고 잠시 웅성거린다. 전혀 마다할 이유가 없는 소식이기에 환호를 하려던 순간, 민준은 더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한다.
“남은 시간엔 과제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으으으...”
아, 기분 좋았는데 저 분 또 시작이시네. 뭔 교양 과목이 이렇게 빡센지. 송이는 다른 학생들의 탄식 속에 자신의 목소리도 보탠다.
“이번 과제가 기말고사 전 마지막 과제이며, 조별 과제로 진행됩니다.”
“아...교수니임-“
“주제는 일상 속의 심리학입니다. 제가 임의로 조를 나누었으니 지금부터 마칠 때까지 과제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조별 과제- 라는 말에 학생들의 한숨은 탄식을 넘어 야유에 가까워졌다. 민준은 항상 그렇듯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이어 민준이 미리 4-5명씩 짜온 조를 나누어 불러주고, 조별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이런 거 할 거라고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하여간 수업에 관련된 일이라면 뭐 일급 비밀이라고 하나도 얘길 안 해줘요- 송이는 민준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민준은 눈도 맞춰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리에 서서 우왕좌왕 하고 있으니 다행히 송이와 함께 조가 된 학생들이 알아서 송이의 자리로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아아,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책상을 모아 대충 모여 앉아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민준이 과제 내용에 대해 칠판에 정리를 해주고 과제 자료 제출 기한과 발표 일을 말해주었다. 그러고선 이제 자기가 할 일은 다 끝났다며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살짝 털고는 학생들을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아…그럼 우리 자기 소개를 먼저 할까요?”
어색한 침묵 끝에, 한 남학생이 자기 소개를 먼저 하자 제안했고, 돌아가며 이름과 학번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말을 꺼낸 남학생은 12학번 복학생. 송이와 같은 신입생 2명, 2학년 1명. 송이는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 마지막으로 자기 소개를 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17살에 데뷔하자마자 단 번에 유명해졌었기에, 굳이 구구절절 설명해가며 자신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 12년동안 그래왔다.
“저는 천송이라고 하구요, 그렇게 안 보이시겠지만 15학번이에요. 하하하.”
“사실, 엄청 팬입니다.”
“저두요.”
“어머, 감사해요.”
뻔한 농담을 한마디 끼워 넣고 멋쩍게 웃으니 그 틈을 타 옆에 있던 남학생이 팬이라며 악수를 청해왔다. 다른 학생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어 온다. 이따가 싸인 해주세요. 그럼요, 아님 같이 사진 찍을까요? 어머, 그래도 돼요? 그럼요. 어떡해, 대박.
같이 사진을 찍으려다 시간이 얼마 없어 나중에 찍기로 하고 일단 각자의 역할을 정하기로 했다. 자료 조사는 같이 하기로 하고 조장은 이번 학기 복학했다는 남학생이 하기로 했다. 발표 자료 작성은 지원자가 없어 가위바위보로 뽑았다. 마지막으로는 자료 발표자를 정해야 했는데 으레 그렇듯, 남은 셋은 다들 그리 원하지 않는 표정을 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가위바위보로 해야하나라고 생각할 찰나, 송이가 먼저 손을 들었다.
"발표는 제가 할게요! 아무래도 제가 남들 앞에 서는 거는 익숙한 편이니까."
"오오, 맞아요. 인터뷰 같은 거 보니까 말씀 되게 잘 하시더라구요."
"그랬어요? 그렇게 보였다니 다행이다. 아무튼 발표는 제가 하는 걸로 할게요."
"그럼 우리 역할 다 정해진 거죠? 엄청 일사천리다. 팀웍이 좋네요."
굳어있던 분위기가 금방 화기애애해져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송이는 편해진 마음으로 조원들과 칠판에 쓰인 과제를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았다. 그러다 보니 옆에 앉은 두 여학생의 대화가 자연스레 그 앞에 서 있는 민준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도민준 교수님 요새 좀 부드러워지신 것 같지 않아요?"
"맞아요. 표정도 좀 많이 좋아지신 것 같고, 오늘 옷 차림도 평소랑 좀 달라 보이고..."
"갈 수록 더 멋있어지시네. 부럽다, 교수님 여자친구."
“교수님 여자친구 있어요?"
"당연히 있지 않을까요? 저렇게 잘 생기고 멋있는데."
옆의 두 여학생이 강단 앞에 서서 골똘히 책을 보고 있는 민준을 보며 하는 대화에, 송이는 마치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아... 하고 몇 번 고개만 끄덕이고는 괜히 노트에 몇몇 단어들을 끄적인다. 일상의 심리학, PPT 발표, 조별 과제, 도민준, 여자친구... 그러다 마지막 두 단어는 누가 볼 새라 까맣게 칠해버린다.
"아무튼 요새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수업도 일찍 끝내주시고, 안 하던 조별 과제도 내주시고."
"그러게요. 저도 선배님들한테 도민준 교수님 수업엔 조별 과제 없다고 들어서 이 수업 선택했는데."
"아... 그래요?"
"네, 조별 과제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 그래도 조별 과제 덕분에 이렇게 송이 언니도 만나고. 아, 참!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당연하죠! 편하게 불러요. 같은 학번 동기인데. 그리고 선배님들도 잘 부탁 드려요. 제가 모르는 게 많아서..."
"아이고, 그럼요. 별 말씀을."
송이는 수줍게 웃는 같은 학번 여학생을 보며, 이들 속에 섞이는 일이 걱정만큼 그리 큰 일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송이는 조원들의 대화의 주제가 민준에게서 벗어나자 그제서야 뒤늦게 고개를 들어 민준을 쳐다보았다. 교탁 옆에 기대 서서 책을 보고 있는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다. 뭘 저렇게 골똘히 보고 계시나. 송이는 아주 잠깐의 틈에서도 그의 세세한 행동을 눈에 담았다.
"......"
송이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자신이 종종 칭얼대곤 했던 말들. 보통의 학생들의, 보통의 웃음들과, 보통의 20대, 보통의 젊음, 보통의 캠퍼스... 그와 만나는 곳이 대부분 학교 안인지라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들을 자주 했을 것이다. 부러워하고 바라기는 했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처럼 묻어두려 했었고,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나의 생각을 읽어주고, 나의 바람을 대신 이끌어주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램프의 요정처럼 갑자기 뿅하고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건 아니지만, 자신을 바꾸어 가면서도 나를 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코 끝이 시큰해진다. 그의 말투가 부드러워지고, 얼어있던 표정을 풀고 웃기도 하고, 답답한 타이를 풀게 되고, 아주 오래된 틀을 깨보기도 하는, 그만의 방식. 나를 사랑해주는 방식.
“……”
한참을 책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늘 일 대 다수로 모두의 시선을 받는 그와 내가, 이렇게 제각각의 시선들 속에서 단 둘만 눈을 맞추게 되는 순간이 왠지 모르게 행복하다. 항상 그렇듯 먼저 시선을 피한 그가 교탁 위의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드륵- 이어 책상 위에 올려둔 송이의 핸드폰이 울렸고, 송이는 화면 위에 떠오른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민준을 본다. 아무렇지 않게 교탁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책을 보는 민준.
= 과제에나 집중해
송이는 몰래 문자를 확인하고 역시 그답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짧은 답장을 보낸 후 다시 조원들의 대화 속으로 들어간다. 다들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언니 바쁘지 않아요? 아, 저 괜찮아요! 별로 안 바빠요. 그럼 언제로 할까요? - 그냥 명인대학교 15학번 천송이로, 심리학의 이해 수강생으로, 보통의 학생으로, 20살의 천송이로.
- 고마워
살짝 고개만 돌려 책 옆의 핸드폰을 확인하는 그의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몇 십 명의 학생들 중, 그 누가 보았을까. 그 미소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서 고마워.
#
“누가 보면 어쩌려고.”
“에이, 애들 다 나갔어. 자기도 나 보려고 기다리는 거면서.”
“무슨 소리야, 내가 수업 마치고 늦게 나가는 건 그냥 내 습관이야.”
수업이 끝나고 송이는 가방을 정리하는 척, 거울을 보는 척하면서 학생들이 다 나가길 기다렸다가, 강의실을 나가려는 민준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민준은 괜히 문 쪽을 살피며 다그쳤지만, 싫지는 않았다. 확실히 학생들이 다 나가고 떠들썩했던 강의실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간을 다시 확인한다. 이 수업이 우리 두 사람에게 오늘의 마지막 수업이었고, 어젯밤에 아주 잠깐 봤던 걸 빼고 나면 드디어 며칠 만에 생긴 여유로운 시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수업 끝나고 어디, 갈까? 괜찮은 데서 저녁 먹거나 아님…”
“오늘? 나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넌지시 이후의 시간에 대한 계획을 물었더니, 그녀는 잠깐 놀라고선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민준은 자신만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생각에 살짝 실망하며 되물었다.
“왜? 오늘은 스케줄 없다며.”
“방금 그 쪽이 스케줄 만들어줬잖아요. 조별 과제.”
“...그래서?”
“그래서 이따 오후에 조별 과제 모임 하기로 했지.”
“그거 내가 기한 넉넉하게 줬는데, 뭘 벌써 해?”
“곧 기말고사 기간이니까 부담 없이 빨리 해버리기로 했지!”
아니, 지금 내가 학생들이랑도 좀 만나고 친해지라고 별로 내키지 않는 조별 과제까지 일부러 만들어서 내줬는데, 그것 때문에 거꾸로 내가 바람을 맞을 줄이야.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 때마다 민준의 침착한 목소리는 한 톤 높아진다. 자기가 내 준 과제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저번 주에도 내내 못 봤다고 징징거린 사람이 누군데...”
“그럼 과제를 없애시던가-“
“뭐?”
“재밌겠다. 같은 조 애들, 착하고 좋은 것 같애.”
“하...참 네.”
“아, 그리고 나 모임 끝나고 같이 치맥하기로 했다? 설렌다, 설레.”
그녀는 민준의 당황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과제를 함께 하기로 한 학생들과의 시간을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려고 며칠 동안 생각하고 생각해서 만들어준 기회이긴 한데. 어이없이 한 번 웃고는 별 대꾸가 없는 민준의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아님 처음부터 일부러 그랬는지- 송이가 선심 쓰듯 민준의 팔 사이로 제 팔을 끼워 넣는다.
“몇 명이 남은 수업 있다고 이따 저녁에 보기로 했으니까, 그 때까지 놀아줄게요.”
“아, 됐어. 뭘 놀아줘.”
“1시간은 같이 있어줄 수 있어요.”
“됐다니까.”
민준은 토라진 말을 하며 팔을 감싸오는 그녀의 손을 뿌리쳐보지만, 그녀의 그리 세지도 않은 힘을 이길 수는 없다. 그녀의 달콤한 말들과 행동은 나에게 서서히, 그리고 깊숙하게 스며들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삐졌어요?”
“삐지긴 누가 삐져? 내가 뭐, 이런 걸로 삐지고 그럴 사람으로 보여?”
“에이…삐졌는데 뭘.”
“아니라니까?”
그래서, 나에게 깊게 베어있는 그녀와의 6월은 더 달콤할 것이다. 아마도 그 다음 달도, 그 다음 계절도.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May, be sweet 14 (0) | 2015.07.07 |
---|---|
# May, be sweet 13 (0) | 2015.07.07 |
# May, be sweet 11 (0) | 2015.07.07 |
# May, be sweet 10 (0) | 2015.07.07 |
# May, be sweet 9 (0) | 2015.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