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May, be sweet 14 본문
May, be sweet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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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앉아서 공부가 돼?”
“그 쪽이 말 안 걸면 잘 되거든?”
소파 끝에 쿠션을 받치고 옆으로 반쯤 누워 있는 송이는 아까부터 손에 든 책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베란다에 빨래를 널러 가기 전엔 바르게 앉아있던 그녀가, 빨래를 다 널고 나오니 그새 불량한 자세로 앉아있다. 민준은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녀는 오른손에 들린 펜 끝을 입에 물고 심각하게 책을 읽으며 얼마 남지 않은 기말 고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 책에 줄 긋지마. 나 책에 줄 긋는 거 싫어해.”
“난 줄 안 그으면 머리에 안 들어오는데?”
“그럼 당신 책으로 해. 왜 남의 책 갖다 그러냐고.”
민준은 송이에게로 다가가 책을 뺏으려 책 윗부분을 잡았지만, 그녀가 먼저 뺏기지 않으려 손에 힘을 준다. 이어 인상을 팍 구기며 민준을 올려다본다.
“으이구... 쪼잔하긴. 제자가 책 좀 봤기로서니 선생이 저런 반응이라니.”
“당신이 가방을 아끼듯, 나는 책을 아낄 뿐이야.”
“에이씨. 내 책은 다 집에 있으니까 그렇지.”
“그럼 집에 가서 하든가.”
“진짜? 나 진짜 집에 간다?”
민준은 소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송이의 맨다리를 옆으로 슬쩍 치워버리며 그 자리에 앉는다. 그녀가 계속 나 집에 가겠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해오고 있었지만 민준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며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책을 찾았다. 민준이 이렇다 할 대꾸가 없자 그녀는 맨날 말 씹어- 한 번 구시렁대고는 다시 책을 본다.
아까 분명 여기에 책을 둔 것 같았는데... 민준은 탁자 위에서 책을 한 번에 찾기 못했다. 어디 갔나 싶더니 잔뜩 쌓여있는 귤 껍질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무슨... 집이 하루 만에...”
책 다음으로 민준의 눈에 들어온 건, 탁자 위도 모자라 바닥에까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귤 껍질들과 이미 다 먹고 없는 딸기의 초록색 꼭지들. 오늘 아침, 민준은 그녀가 한참 자고 있을 때 마트에 다녀왔었다. 잊지 않고 사온, 그녀가 껍질을 깎지 않아도 되는 딸기와 귤. 아마 다음엔 박스 채로 사둬야 할 것 같았다.
“후우...”
민준은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려다가 크게 한숨을 쉬며 그냥 소파에 기대어버렸다. 어차피 치워봤자 다시 천송이가 이래 놓을 것 같아서. 그러고 있으니 그녀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다리를 들어 민준의 허벅지 위로 척, 올려놓는다. 시선 아래 떡하니 자리 잡은 그녀의 맨발을 보고 기가 찬 웃음을 짓는다. 참...어쩜 저렇게 흔한 내숭도 하나 없을까. 예쁜 척 안 해도 예쁘다는 걸 본인이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
민준은 여전히 삐딱하게 기대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송이를 쳐다보았다. 정말 공부를 하고는 있는 건지. 약간 찡그리고 있는 미간, 앞니에 물려 있는 펜의 끝-빼내주고 싶다-, 배 위에 까놓은 귤, 빨간색 패디큐어가 칠해져 있는 그녀의 하얀 맨발, 한 쪽 어깨가 거의 드러날 듯 늘어진 그녀의 티셔츠, 아니 나의 티셔츠... 민준은 그녀의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하나 하나 천천히 눈에 담았다.
이 모습이, 아 주말의 풍경이,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져 있을까봐 두렵다. 그녀를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리지만,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깝다. 모두가 좋아하고 선망하는, 하지만 나에겐 그저, 덜렁대고, 투덜거리고, 평범하기만 한- 그녀가 사라질까봐.
민준은 읽기로 한 책은 뒷전으로 한 채, 그녀를 바라보며 허벅지 위에 올려진 그녀의 다리를 쓸어내렸다. 매끈하고 곧게 뻗은 다리, 하지만 그녀의 발은 여기저기 굳은살과 상처가 많다. 높은 굽 위에서 아프지 않은 척 웃어야하는 그녀가, 그 모든 걸 벗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나의 집이라 다행이다.
“간지러워어-”
그녀의 발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녀가 발을 꿈틀대자 괜한 심술에 발을 더 간지럽힌다. 견디지 못한 그녀가 발버둥을 치며 그만하라고 꺄르르 웃는다.
“하지마아, 나 공부해야 된단 말이야-“
“그러길래 평소에 좀 하지.”
“평소에도 열심히 했거든요? 본의 아니게 웬 남자 하나 만나느라 요즘 좀 소홀해서 그렇지.”
“그래서 지금은 그 웬 남자한테 소홀하시겠다?”
“아, 쫌. 시험 문제 가르쳐줄 거 아니면 괴롭히지 마요.”
“지금 누가 누굴 괴롭히는데...”
간지럽다고 웃던 그녀는, 민준이 자꾸 책을 못 보게 방해하자 웃음을 거두고 눈에 힘을 주며 정색한다. 자기는 공부 안 해도 된다고 너무하시네- 투덜대던 그녀를 따라 민준도 투덜거린다. 공부를 할 거면 집에 가서 하던가... 눈 앞에서 꼬리를 흔들면서 정작 잡히지는 않고 도망만 가는 고양이처럼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밑도 끝도 없는 불만을 송이도 눈치 챘는지 다시 책을 보려다 말고 눈을 가늘게 뜨고 민준의 마음을 읽는다.
“아...우리 도민준 교수님, 내가 같이 안 놀아줘서 섭섭했구나?”
“...누가 공부하지 말래? 왜 자꾸 날 소심한 사람으로 봐?”
“알았어요, 그럼 나 공부할거니까 방해하지 마요?”
“안 해, 안 해. 시험 얼마나 잘 볼지 두고 본다, 내가.”
내가 시험 어렵게 낸다는 소문은 들었겠지? 하며 탁자 위의 귤을 하나 집어다가 송이에게 툭 던지고는 자기도 책으로 시선은 옮긴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책 너머 서른 넘은 남자의 투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송이는 이내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아아... 잠깐 흐름 끊겼더니 눈에 잘 안 들어오네? 잠깐 쉬어야겠다아-“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요란스럽게 기지개를 피고는 쭉 뻗었던 팔을 그대로 민준의 어깨에 올려놓는다. 여전히 퉁명스런 표정을 하고 있는 민준이 바로 코 앞 제 시선 아래의 그녀를 내려다본다.
“뭐야...”
“뭐긴 뭐야. 쉬는 거지.”
“......?”
그녀가 목을 끌어안으며 짧게 입을 맞춰온다. 다가오는 입술에 반사적으로 눈을 한 번 감았다 뜬다. 하지만 그녀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내 앞에 있다.
“내 휴식, 내 힐링... 도민준.”
그녀는 늘 내 목소리가 좋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도 그녀의 목소리가 좋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자연스레 입을 맞추고, 그녀와 입을 맞춘 채로 티셔츠 속 살결을 끌어안는다. 간지럽다며 웃는 그녀의 웃음이 전염처럼 퍼진다. 그녀에게서 익숙한 나의 냄새가 난다. 이제 나는 다시 눈을 감아도 그녀가 사라지지 않을 거란 걸 안다.
그 사실이 왜 이리도 행복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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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ㅠㅠ 오늘 늦게 끝날 것 같아. 의상 하나가 잘못 돼서 그거 때문에 계속 촬영 지연됐거든 ㅠㅠ
늦은 저녁, 조용한 민준의 집 서재. 민준은 기말고사 시험 문제를 내고 있었다. 기말고사가 당장 다음주부터 시작이었지만 송이는 미리 정해진 촬영 스케줄을 소화해야만 했다. 그래도 얼굴이라도 봐야겠다고 그녀가 하도 고집스럽게 우겨대서, 촬영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잠깐이나마 만나기로 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온 문자에, 아쉽지만 그녀를 위해서 오늘의 만남은 내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 그래. 끝나면 집에 들어가서 쉬어. 괜히 공부한답시고 더 피곤하게 하지 말고.
그럼 이따 집 앞으로 잠깐 보러 갈게- 라는 말까지 썼다가 지워버렸다. 말로는 잠깐만, 10분만, 이라고 하지만 막상 한 번 보게 되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아마 ‘잘 가’라는 인사만 30분은 할 거다. 그래서 끝나고 집에 가라고 아예 못 박아서 말해버린다. 그러면 울면서 통곡하는 캐릭터 이모티콘이 연달아 도착한다. 마치 그녀가 울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일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답장을 하지 않고 다시 억지로 책상 위로 생각을 옮긴다. 교재를 넘기며 어떤 문제를 내야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잠시 후 메시지가 하나 더 온다.
= 그럼 나 촬영하는 거 구경하러 올래요? 한 번도 본 적 없잖아. 나는 일도 하고 우리 도민준씨도 보고.
하긴. 그녀는 일주일에 3시간, 내가 일하는 걸 본다. 어쨌든 가르치는 게 나의 일이니까. 요즘 들어 그녀가 나오는 광고는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영화나 드라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일의 결과물일 뿐이고, 그녀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민준은 그녀가 그녀의 일을 하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아, 아무래도 그녀를 보고 싶다는 쪽이 더 가깝겠지만.
...
“H 스튜디오...”
민준은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동네에 도착했다. 대충 근처에 차를 대고 송이가 알려준 주소의 스튜디오를 찾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라 조용한 골목을 찾다 보니 저기 앞에 그녀가 타고 다니는 검은색 밴이 눈에 띄었다. 저기인가 싶어 발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
“......?”
스튜디오 이름이 커다랗게 쓰인 건물은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 맞나,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입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쿵쿵대는 음악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오셨죠?”
커다란 문 앞으로 다가가자 옆에서 경호원인 듯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민준을 보자마자 날 선 눈으로 앞을 막아 선다.
“아...그게.”
“무슨 일로 오셨죠?”
“누구를 좀 만나러 왔는데...”
“누구 말씀이시죠?”
남자는 한껏 인상을 쓰고는 민준이 답할 새도 없이 의심하는 말투로 캐묻는다. 민준은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뒷목을 긁적였다.
“...천..송이씨를...”
“천송이씨랑 무슨 관계이시죠?”
“그러니까...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무슨 관계? 그러니까… 그러고 보니 항상 천송이는 천송이고, 도민준은 도민준이었다. 그 외의 호칭이라곤 그 쪽, 당신…그나마 다정한 말은 우리 도민준씨, 우리 도교수님 정도? 누가 그녀가 나에게 무엇이냐 물은 적이 없어, 아니 누가 그녀와 나의 사이를 짐작조차 할 일이 없었기에 내가 할 말이라곤, 내게 그녀는 그저 천송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관계면,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그녀에게 먼저 물어봐야 하나? 말해도 믿어주려나? 민준은 갑작스런 취조 아닌 취조에 당황해 머리 속이 하얘졌다.
“여긴 관계자 아니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게 천송이씨랑은…”
“교수님!”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남자 때문에 뒷걸음치려 하려던 찰나, 무거운 철문이 삐걱 열리며 구세주가 나타났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그녀의 매니저. 인사 밖에 안 해 본 그 매니저가 왜 그리 반갑던지. 민준은 경호원을 피해 슬쩍 매니저의 쪽으로 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평소 먼저 잘 건네지도 않는 악수를 건네며 제가 잡상인이나 이상한 스토커가 아니라는 걸 어필했다.
“송이 누나 지인이세요.”
“아…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매니저가 경호원에게 알려주고 나서야 드디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가는 것부터 힘드네. 민준은 혀를 내두르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문을 열자마자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커 보이는 공간이 나타났다.
“와우…”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2층 높이까지 뻥 뚫린 천장, 제법 큰 음악 소리, 그 사이 사이 들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 어두운 조명, 그 속에서 유일하게 밝은 곳,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아직 촬영 조금 남았는데…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시겠어요?”
“아…여기서 촬영 구경해도 되나요?”
“그럼요. 그럼 이 쪽에서 보세요.”
매니저가 안내해주는 대로 약간 사이드로 가 스텝들 틈에 섞여 자리를 잡았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눈을 뗄 수 없었던 그녀를 이제야 마음 놓고 볼 수가 있다. 온통 검은 배경의 한 가운데 홀로 서 있는 그녀는 의상 또한 슬림한 블랙 원피스라 하얀 얼굴이 더 돋보이는 것 같았다. 사진작가의 주문에 따라 표정과 포즈를 바꿔가며, 쉴 새 없이 번쩍이는 플래시에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더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어내는 그녀는, 배우 천송이였다.
“……”
민준은 스텝들 무리의 가장 뒤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녀를 보고 있다. 사람들 어깨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팔짱을 끼고 편안한 자세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짙게 화장을 하고 평소 입지 않는 옷을 입고 거의 볼 수 없던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금방 익숙해졌고 이제는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녀가 내게 웃어줄 때마다 느끼는 설렘과는 또 다른 설렘.
“……?”
잠깐 사진작가가 프리뷰를 확인하는 동안, 그녀가 민준 쪽을 돌아보며 반갑게 손을 흔든다. 안녀엉- 입모양으로만 인사하며. 조금 전까지의 진지함은 사라지고 금세 내가 알고 있는 그녀로 돌아온다. 분명 들어올 때 그녀는 촬영에 몰두하고 있어 나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와중에도 다 보고 있었나 보다. 알고도 내색하지 않았다니, 그녀에게 존경심을 느낀다. 민준은 송이에게 말없이 웃어주고는 이어 바로 다시 진행되는 촬영을 지켜보았다.
그녀만을 위한 조명, 그녀만을 향한 카메라 렌즈,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한 올마저 지켜보는 이들…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 속의 사람이고, 내가 알 필요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이제는 나의 세상을 밝혀주고, 나의 진짜 모습을 담아내고, 나를 천천히 지켜봐 준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녀와 상관없는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지금 눈 앞에 그 수많은 사람들은 보이질 않고 오로지 그녀만이 있는 것처럼, 천송이 외에는 아무 것도 상관이 없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송이씨.”
큰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으려나. 촬영의 종료를 알리는 박수가 스튜디오에 퍼졌고, 음악도 곧 멈추었다. 다른 세상인 것 같았던 공간이 여느 곳과 다를 것 없이 바쁜 일터가 되었다.
모든 스텝들과 하나 하나 인사를 한 송이는 마지막으로 사진 작가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포옹을 하며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은 꽤나 친분이 깊어 보였다. 민준은 그녀를 기다리며 분주한 사람들 틈에서 어정쩡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한참 동안 이야길 나누던 송이가 귓속말로 작가에게 무슨 말을 하더니 갑자기 민준 쪽을 가리킨다. 두 사람이 동시에 쳐다보는 바람에 민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작가가 당연하지! 라며 큰 소리로 말하며 웃었고, 그 때서야 송이가 민준에게로 다가왔다.
"끝났어?"
"이리 와봐요."
"응?"
송이는 민준에게로 오자마자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뭣도 모르고 끌려가는 민준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녀가 이끈 곳은 방금 전까지 그녀가 사진을 찍던 세트 한 가운데였다.
"...뭐야?"
"우리 사진 찍어요!"
"뭐?"
당황한 민준의 눈이 커지며 송이가 잡은 손목을 떼어낸다. 송이는 굴하지 않고 민준의 팔에 팔짱을 껴온다.
"우리 같이 찍은 사진 하나도 없잖아. 이번 기회에 찍어요."
"나 사진 찍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건 안 찍어버릇해서 그래요. 어차피 사람들 다 정리하고 갔으니까 보는 사람도 없어!"
"...그래도 좀..."
민준이 계속 난처한 입장을 내비치자 송이가 흘긴 눈으로 자꾸 이러면 섭섭하다는 눈치를 내비친다. 그러면서 괜히 사진 작가를 걸고 넘어진다.
"아니, 지금 우리나라 최고 포토그래퍼님이 돈도 안 받고 찍어준다는데, 어디 이런 기회가 있을 줄 알아요? 그쵸 작가님??"
"그럼요. 저 되게 비싸요."
카메라를 손에 들고 당장이라도 사진을 찍을 준비가 된 작가는 송이의 계획에 흔쾌히 응해준다. 약간 주저하면서 고민하는 듯한 민준은 벌써 부끄러움에 귀가 빨개져 있었다. 송이는 민준의 팔을 더 꽉 껴안으며 민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다.
"같이 사진 찍고 싶기도 하고, 그 쪽한테도 남겨주고 싶어서 그래. 천송이를 만난 도민준의 서른 두 살."
"......"
민준은 제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미소 지어보이는 그녀를 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며 그녀를 따라 웃어본다. 해줄 거죠? 라고 재차 묻는 그녀에게 따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민준의 긍정의 눈빛을 읽고선 작가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천송이씨 어디서 이런 잘난 남친을 만들어 왔어? 난 무슨 배우인 줄 알았잖아."
"그쵸? 완전 잘 생겼죠?"
잘 생긴데다가 엄청 똑똑해요, 목소리는 또 얼마나 좋은데요- 계속 자랑을 해대다가 이쯤 하라고 민준이 눈치를 주고 서야 멈추고는 내가 너무 팔불출 같았나- 혀를 낼름 내민다. 작가가 눈에 뷰파인더를 가져가며 촬영할 준비를 하자 기대에 찬 송이는 활짝 웃었고, 민준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에 얼굴이 굳어졌다. 예쁜 여자친구 놔두고 표정이 왜 그러냐는 작가의 말에 민준이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송이가 처음이니 봐달라고 대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냥 나하고만 있다고 생각해요.”
“너하고만 있질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해.”
“으이구, 또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 그런 것처럼 마인드 컨트롤을 하라구요.”
노력해 볼게- 민준은 다시 한 번 숨을 가다듬었고, 송이는 민준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시선을 제게로 가둔다. 조명 탓인지 그녀의 눈동자에 더 뚜렷하게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마 나의 눈동자에도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겠지.
“……”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만남, 하루 하루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 그녀의 말과 행동들, 그녀의 솔직한 기쁨, 숨길 수 밖에 없던 아픔,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던 만큼 나를 잡아주길 바랐던 모든 순간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사진처럼 기억해내며 지금 이 순간도 그 중 하나라 여겼다.
갑자기 긴장해서 빨리 뛰었던 가슴도 점차 진정 되어가고, 오로지 그녀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곳에, 이제는 두 사람만이 함께 있다. 이따금씩 들리는 그녀의 작은 웃음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쉴새 없이 찰칵대는 셔터음도 귓가에서 지워야만 했다.
출석부 속 결석 표시만 늘어가던 그녀의 이름, 본의 아니게 만나자마자 모진 말들만 해야 했던 첫 만남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와 나도 모르게 후회했던 것, 신기루 같았던 도서관에서의 마주침, 그녀의 과제 속 그녀와 나의 이야기, 유치한 뇌물, 파파라치, 그녀의 깊은 두려움, 조금이나마 쉬길 바랐던 그녀의 단잠, 축제, 캠퍼스의 밤, 빌려주고 싶었던 손과 어깨, 낯설기만 했던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사실...
그 누군가가 막연한 이름이 아닌 ‘천송이’가 되어 함께한 날들. 이 모든 것들은 아직까진 내 머리 속에 뚜렷하게 남아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 시간을 세월이라 부르게 될 때 즈음엔 하나 둘 사라지고 희미해질 지도 모른다. 우리는 처음의 설렘을 잊을 수도 있고, 서로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 그 때 마다, 이 순간의 기록을 꺼내볼 수 있길, 앞으로 더 많이 되새겨질 기억들 속에 꼭 함께 하길.
“별 거 아니지?”
“조금?”
처음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진 표정에 작가의 움직임은 더 바빠졌고, 간간히 그녀와 짧은 얘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촬영을 이어갔다.
뜨거운 조명과 긴장이 섞여 조금 더운 걸 느꼈다. 완전히 어색함을 떨쳐버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시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 이후의 시간도 그녀와 함께 하고 싶지만, 시험을 앞두고 있어 그러진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안아주며 무언가를 얘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맙다고. 당신을 만난 이후의 모든 것들이 다 눈물 나도록 고맙다고. 정말로 평범한 말이지만 내게는 어려웠던 말 중 하나를, 오늘은 꼭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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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대표. 불러 놓고 왜 안 와.”
송이는 학교에 가기 전 일이 있어 잠시 소속사에 들렀다. 사무실에 혼자 앉아 사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민준은 수업 중이라 연락할 수도 없었고, 핸드폰을 가지고 인터넷을 했다가, 게임을 했다가, 별 재미있는 것도 찾지 못하고 지루하게 앉아있을 무렵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한 번 울렸다. 요즘 알람이 한 번 울릴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란다.
“……?”
팝업 창에 떠오른 작은 사진 한 장. 어제, 민준과 사진을 찍었던 날, 같이 작업했던 친한 사진 작가 언니에게서였다. 반가움에 얼른 사진을 확인하자 활짝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화면 가득 떠올랐다. 사진 나오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었기에 천천히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 아직 후보정 작업이 남아있긴 한데, 빨리 보고 싶어할까봐 잘 나온 거 한 장 보낸다. 너랑 오랫동안 일했지만 그 때 같은 모습은 처음이어서 나도 좀 놀랐다ㅎㅎ 그만큼 두 사람 행복해 보이고 잘 어울린다는 뜻이야. 정말 보기 좋다. 뒤에서 조용히 응원 할게!
“아이고, 이 언니 이런 걸로 또 감동 주시네.”
사진에 이어 도착한 긴 메시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지인의 진심 어린 말에 코 끝이 찡해졌다. 송이는 고맙다고, 우리 처음 같이 찍은 사진 정말 잘 나왔다고, 역시 최고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금방 메시지 하나가 또 온다.
= 아! 참. 네 남친 생각 있으면 나랑 단독 작업 어떠냐고 물어봐ㅋㅋ 진짜 잘생겼더라.
사심 가득한 멘트에 혼자 빵 터져서 웃으며, ‘그건 생각 좀 해 볼게. 공공재로 내놓긴 좀 아까워서.’ 라고 농담 섞인 답을 했다. 송이는 누가 들을 새라 입을 막고 혼자 웃고는 사진을 다시 눌러보았다. 한동안 빤히 사진을 쳐다보다가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송이는 당장 그 사진으로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 바꾸었다. 맨날 보고 또 봐야지-
“누나!”
“아이, 깜짝이야.”
그 때,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범이 때문에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숨기려다 바닥에 떨어뜨렸다. 노크 좀 해라! 하고 소리를 지른 후 얼른 핸드폰을 다시 줍는다. 화면 속 사진에 흠이 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액정을 조심스레 닦으며 사진을 한 번 더 살핀다.
“뭘 그리 놀라세요.”
“너 마침 잘 왔다. 이거 좀 봐봐.”
잠깐 성질을 냈다가도, 범이가 유일하게 민준에 관한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금세 방긋 웃으며 범이를 옆 자리로 불러낸다. 핸드폰을 내밀기도 전에 이미 범이는 벌써 지친 표정이었지만, 송이는 굴할 리가 없다.
“어때? 그 때 같이 찍은 사진이야. 잘 나왔지?”
“아하, 네... 잘 나왔네요.”
“역시 언니가 사진을 참 잘 찍어. 아니다, 우리 도민준씨가 인물이 잘나서 아무렇게나 찍어도 잘 나오는 건가?”
송이가 요즘 들어 한 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고… 늘 그러려니 한다. 범이는 사진을 보며 싱글벙글하고 있는 송이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오늘따라 더 큰 한숨을 쉰다.
“누나, 지금 그렇게 좋아할 때가 아니에요.”
“뭐가?”
“어휴… 인터넷에 또 누나 얘기 떴어요.”
민준에게 이 사진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송이는 또 찌라시 얘기하는 거야? 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범이의 말을 흘려 들었다.
“아, 그런 거 신경 쓰지마. 근데 안대표는 언제 온대? 빨리 학교 가야 되는데.”
“그게…신경을 좀 쓰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뭔데에. 누가 또 나 멍청하대? 남자 관계 복잡하대?”
말도 안 되는 찌라시 따위. 내가 그런 거에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이제는 벌벌 떨 치아도 없어요.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하고 시계를 확인한 송이는 안대표가 불러놓고 왜 이렇게 안 오는지 조급할 뿐이었다.
“…그게… 교수님하고 좀 관련 있는 것 같은데요…”
“…뭐? 누구?”
“도민준…교수님이요.”
“……?”
얘가 지금 뭐래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혐오하는 찌라시라는 것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지금 누가 관련이 있다는 건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송이는 정체 모를 불쾌감을 그대로 드러내며 범이가 건넨 핸드폰을 빼앗았다.
“……”
늘 그렇듯이 출처를 알 수 없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흔한 글 중 하나로 뜬금없이 올라와 사람들의 잠깐의 놀잇감이 되는 이야기.
「 얼마 전 불성실한 대학 생활로 입방아에 오르내린 배우 A양. 그 후 학교 수업에 열심히 참석하면서 이미지를 회복하는가 싶었으나, 앞에서는 열심히 하는 척 하고, 뒤에서는 교수들에게 열심히 로비를 펼친다는 소문. 특히나 수업 듣는 모 교수와 잦은 만남을 가지며 성적관리를 한다는. 이 학기가 끝난 후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볼 일. 」
그들은 사실 여부를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A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누군가를 찾아내고, 욕을 하고, 꼬리표를 달아준다. A는 그냥 그런 사람이 되어버려야만이 끝난다.
이거 누구야? 딱 봐도 천송이 아님? 천송이 요즘 출석 잘 한다고 이미지 관리하잖아. 어, 나 명인대학교 학생인데, 그 교수는 누구지? 천송이 대단하네, 그러게 그 나이에 대학은 왜 가서. 머리로 안 되니 돈으로 해결하려나 보네.
“……”
“누나…”
그 글을 읽고 난 후, 송이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지만, 그러기 전에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려본다. 숨을 길게 내뱉으며 눈썹을 확 구기며 범이에게 핸드폰을 다시 던져버린다.
“하하하. 장난하나,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길.”
“언제는 말 되는 얘기 올라오는 거 보셨어요?”
“진짜 소설들 쓰신다. 재밌지도 않은 걸.”
“…어떡해요, 누나?”
“뭘 어떡해! 아니잖아! 여기에 천송이라고 쓰여있는 것도 아닌데, 뭘 어떻게 해?”
“……”
송이는 어이가 없어 하하하, 소리를 내어 크게 웃어보였지만, 계속해서 웃을 수는 없었다. 점점 굳어가는 표정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이건 그냥 1년에 몇 번씩 겪는 일일 뿐이야. 지들끼리 마음대로 만들어 내서 마음대로 웃고는, 당장 다른 관심 거리를 찾으면 잊어버릴 일. 그렇게 나도 같이 웃어주고 욕하고 잊어버리면 돼. 물론, 사실은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아서, 한동안은 내 스스로가 한참을 헤매었지만… 지금은, 내가 기댈 수 있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 그래서 나는 숨을 필요가 없어. 그가 그렇게 해줄 거니까.
“…일단 안대표한텐 아무 것도 말하지마.”
“…네.”
그런데, 나는,
“……”
그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인가? 그에게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인가…?
지잉. 갑자기 가슴 쪽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크게 숨을 들이쉬며 애써 생각을 떨치려 할 때, 송이의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며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도민준.
= 언제 와?
만약에 그가 나로 인해 다치고, 그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바로 나라면… ?
“……”
메시지 팝업창 뒤로, 활짝 웃고 있는 우리의 사진이 보였다. 아마도 우리는 그 때,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보잘것없을 정도로 아주 작고 평범한… 그런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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