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청춘기(靑春記) 17 본문
청춘기(靑春記)
- Youthology
# 17
# EMERALD LAKE, YOHO NATIONAL PARK, BRITISH COLUMBIA
마치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아주 선명한 터키석 컬러의 물빛은 신기할 정도로 아름답다. 이름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에메랄드 호수. 로키에 와서 명칭도 헷갈릴 정도의 많은 호수를 가보았지만, 그 중 단연 신비로운 빛깔을 자랑하는 에메랄드 호수는, 지대가 높아서인지 조금 쌀쌀한 편이었다. 5km 정도 되는 트래킹 코스가 있어 한 바퀴 돌까 했지만, 송이가 걷기 싫다고 해서 두 사람은 그냥 호수 입구 선착장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선착장 한 모퉁이에 풀썩 주저 앉아 잔잔한 호수 빛깔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많이 기울어진 햇살이 에메랄드 물빛을 더욱 반짝이게 만들고 있어서 더욱 더.
“실제로 보니까 더 신기해.”
“그러다 빠진다.”
송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자꾸 몸을 숙여 선착장 아래의 호수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려 하자, 민준이 뒤에서 송이의 옷깃을 잡아당긴다. 나 수영 잘 해- 송이가 한 말에 민준이 웃는다. 설마 너 빠져 죽을까봐 그러겠냐.
“뭐 때문에 물 색깔이 이렇게 보이는 거지?”
“라임스톤, 그러니까 석회석 가루 때문에 그렇대.”
“아, 그래?”
“응, 저 산이 6월까지 얼어있다가 녹아서 이렇게 되는 거지.”
“저 산 이름이 뭔데?”
“…야, 내가 다 아냐? 여기 산이 몇 갠데.”
송이는 계속 뭔가 물어보는 민준에게 꼬박 꼬박 대답해주다가도 한계에 부딪치자 버럭 화를 낸다. 그러면 민준은 또 그냥 허허, 웃으면서 알았다고 대답한다.
도민준 너 알면서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아니, 그럴 리가. 가르쳐주는 건 네 역할이었잖아. 그랬지, 근데 이렇게 듣고 있는 것도 좋은데? 안 그래도 복학해서 전공 공부 어려운데 천송이 네가 좀 가르쳐주라. 원하신다면야. 나 원래 잘해. 솔직히 1학년 때는 도민준 네가 안 가르쳐줬어도 잘 했을 거야. 그래, 그렇게 생각해라.
별 것도 아닌 걸로 투닥투닥 주고받다 결국 민준이 대충 져주는 걸로 마무리 된다. 이기고 지고 할 일도 아니지만, 송이는 괜히 짜증냈던 마음을 풀고 건너편의 산을 보며 산 이름이 뭐였더라, 더듬어보았다. 분명 알았던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도저히 기억 날 것 같지 않아 그만 두기로 했다. 민준은 옆에서 카메라로 사진을 보고 있었다.
“나 사진 또 찍어줘.”
“그래.”
늘 그의 목에 걸려있는 카메라. 아마 지금쯤이면 메모리 카드에는 다른 사진보다 송이의 사진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처음엔 남의 카메라로 찍어달라는 것도 좀 눈치가 보여 겨우 말을 꺼냈었는데, 지금은 사진 기사 마냥 부려먹고 있다. 송이가 사진 찍어줘, 라고 하면 민준은 군말 없이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댄다. 어색했던 표정도 이제는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몇 컷의 사진을 찍고 나면 으레 ‘너도 찍어줄까?’ 되묻지만 민준은 ‘됐어.’ 라고만 말한다. 송이는 뭔가 애매한 감정이었지만, 딱히 표현은 하지 못하고 다시 민준에게서 카메라를 빼앗아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하였다.
“…잘 나왔네.”
송이는 항상 프레임 한쪽 구석에 홀로 있는 사진을 보며 중얼거리고는 민준에게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천송이.”
“왜.”
“…같이 찍을까?”
“……응?”
“같이 찍자고. 우리 같이 찍은 사진 없잖아.”
“어어… 그래.”
그리고 그 형용할 수 없었던 허전함을, 민준이 바로 발견해준다.
민준은 근처에 있던 외국인에게 사진을 부탁하고는 송이의 곁으로 다가왔다. 팔이 닿을 듯 말 듯, 어딘가 어색했다. 억지로 웃느라 입꼬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찰칵. 그 외국인이 한 장 더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경직된 입 근육을 풀었다. 그러는 동안 민준이 더 가까이 어깨를 맞대었다. 송이의 등 뒤에 둔 손은 허리를 감쌀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 느낌만으로도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같이 찍고 싶었는데 말 못 한 거야.”
“……”
“알잖아, 나 쓸데없이 말 느린 거.”
카메라 렌즈에 눈을 뗄 수 없어 민준을 보진 못했지만 어쩐지 조금 더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Smile! 웃으라는 외국인의 말에 송이는 한 번 더 활짝 웃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어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땡큐 베리 마치. 웰컴. 민준과 송이는 동시에 꾸벅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카메라를 건네받아 바로 사진을 확인한다. 이마를 맞대고 화면을 보며. 뭐야, 너 얼굴 왜 이렇게 작아? 잘 나왔는데 뭘. 아아- 맘에 안 들어. 다시 찍어달라 그래? 아냐, 됐어. 다음에 찍지 뭐. 그래, 다음에.
#
“와, 여기 되게 좋아보인다. 호수 바로 앞에 있고.”
“진짜 명당이네.”
에메랄드 호수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로지(Lodge)*는 꽤 커 보였다. 에메랄드 호수를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한 번쯤 묵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민준과 송이는 로지가 있는 방향으로 걸으며 안을 살짝 구경했다. 목재로 된 건물, 방마다 있는 테라스와 바베큐를 할 수 있는 피크닉 테이블, 산으로 둘러싸여있어 조용한 주변. 어쩌면 밴프나 레이크 루이스의 럭셔리 호텔보다 더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기는 좀 비싸겠지?”
“그렇지 않을까? 자리가 좋으니까.”
“처음에 계획한 거 다 취소하고 급하게 오다 보니, 남은 건 머릿속에 공부한 거 밖에 없네.”
송이는 이번 여행 중 은근히 아쉬웠던 점을 늘어놓으며 2층의 테라스에 한가롭게 앉아있는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그 어떤 때보다 계획적이었지만, 결국엔 무계획에 가깝게 되어버린 여행. 하루 하루 잘 곳도 정해져 있지 않고, 하루 하루 어디로 갈 지도, 하루 하루 만나게 될 사람마저 모르는.
“그럼… 오늘도 숙소 알아봐야겠네?”
“아니, 그냥 캠프 그라운드 찾아가려고. 나 지난 이틀 동안 투잭 호수 옆에서 캠핑 했는데 너무 좋았거든.”
“그래? 나도 어제 거기에 꽤 오래 있었는데.”
“정말?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몰랐네.”
민준이 오늘 밤 어디서 묵을 건지 물은 말에 송이는 어제부터 생각해둔 캠핑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틀 간 투잭 호수에서 캠핑을 하는 동안, 그 곳에 민준이 있었다는 말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제 와서 아쉽진 않았다. 그렇게 마주치길 바라고 간 곳이었지만 못 만났던 것이, 그 때는 아쉽고 화도 났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며칠 좀 늦었을 뿐, 결과는 같으니까.
“그럼 넌? 숙소 예약했어?”
“응, 여기서 좀 떨어진 Golden 이라는 곳인데, 거기 괜찮고 저렴한 로지가 있더라고.”
“로지? 와, 좋겠다. 이런데랑 비슷한 거지?”
“호수 앞은 아니지만, 뭐.”
민준이 로지를 예약해뒀다는 말에 송이는 좋겠다고 말했지만 머리 속으로는 오늘 밤 어느 캠핑장으로 갈까를 고민했다. 해도 슬슬 지고 있고, 혹시 유명한 곳은 자리가 다 찼을 지도 모르니 이제는 머무를 곳을 찾아 슬슬 떠나야 했다. 송이는 크로스백에서 지도를 꺼내며 민준에게 이만 돌아가자고 했다.
주차장 쪽으로 내려 가며 지도에서 근처의 캠핑장을 짚어보았다. 진작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오늘 하루 누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럴 새가 없었다. 아직 오늘 하루가 가지 않은 것도 신기했다.
송이가 지도를 뚫어지게 보고 있으니 민준이 옆에서 같이 들여다보며 넌지시 묻는다.
“혼자 가도… 괜찮겠어?”
“응, 괜찮았다니까?”
“…그래.”
아무래도 민준은 송이가 혼자 캠핑을 한다는 것이 영 걱정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송이는 이미 이틀이나 경험한 것이라 별스럽지 않게 대답했다. 걱정해주는 게 은근히 기분 좋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 괜찮았다. 뭐, 민준과 같이 캠핑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민준에게도 계획이 있고, 오늘 하루 종일 지겹도록 같이 있었으니 그걸로 됐다. 내일이 또 있으니까. 내일 모레도 있고, 그 다음 날도 있고, 그 다음 다음 날도…
두 사람은 다시 차를 타고 송이가 가기로 결정한 캠프 그라운드를 목적지로 설정하고 길을 달렸다. 오후 6시 45분.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와 밝은 하늘은 아직도 매칭이 잘 안 된다. 그리고 이 곳에, 내 옆에, 도민준이 있는 것도.
* 로지(Lodge) : 산장, 펜션 같은 개념의 숙소. 일종의 B&B(Bed&Breakfast) 형태로, lodge를 운영하는 주인이 독립된 공간에 따로 살고, 나머지 방들을 숙박객들이 이용하며, 주방이나 거실 등을 공유.
# LAKE LOUISE CAMPGROUND
“다행이다. 나 하나 잘 곳은 있네.”
레이크 루이스 근처에 있는 캠핑장은 한 쪽은 트레일러 전용이고, 한 쪽은 텐트 전용이다. 관광객이 워낙 많은 곳이라 자리가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송이의 텐트를 둘 곳은 있었다. 민준은 송이의 큰 배낭을 대신 어깨에 메고 송이가 배정 받은 캠프 사이트까지 따라왔다. 여기저기를 호기심 또는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둘러보고 있다.
“되게 크고 조용하네.”
“응. 조용하고 공기도 좋고, 아무 것도 안 해도 좋더라고.”
민준이 텐트 사이트에 있는 피크닉 테이블에 송이의 배낭을 내려놓았고, 송이는 배낭에서 텐트를 꺼냈다. 아무리 작은 1인용 텐트여도 내내 배낭에 짊어지고 다니느라 고생이었지만, 확실히 그만큼의 보상이 있는 일이다.
민준은 돌아가지도 않고 계속 주변을 맴돌면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내일 나 데리러 올 거지?”
“응? 어. 몇 시에 올까?”
“그냥 너 편할 때 와. 난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그래.”
송이가 민준을 보고 이제는 좀 가라는 의미로 말을 꺼냈지만, 민준은 어째 고개만 끄덕일 뿐 걸음을 뗄 줄 모른다. 송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민준이 눈치를 보다가 겨우 입을 연다.
“진짜 괜찮겠어?”
“뭐가?”
“텐트에서 자는 것도 좀 그렇고… 밤엔 추울 것 같은데.”
“음… 그런게 좀 불편하긴 하지. 그래도 참을만해.”
“아니 뭐… 혼자는 좀 위험하지 않나? 주변에 외국인도 많을 거고.”
“대부분 가족이나 연인들이야.”
“야생동물도 나타난다며. 곰 같은 거.”
하나 하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민준의 쓸데없는 걱정에 송이는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송이는 들고 있던 텐트를 내려놓고는 한숨을 푹 쉬면서 민준을 노려보았다. 스스로 자기 말 없다고 인정한 인간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빙- 반대로 도망가는 민준의 눈동자. 괜히 손에 쥔 차 키만 만지작거리는 민준의 말 끝이 점점 흐려진다.
“…나는 너 혼자 두고 가기가 좀 그래서.”
“나 지난 이틀 동안도 이렇게 혼자 있었어.”
“그래도 이왕이면 그냥 숙소 잡아서 자는 게 낫지 않아?”
“이제 와서 구하러 다니기도 귀찮고, 늦었어.”
“그러면, 내가 묵는 데로 가든지.”
송이의 눈썹이 확 구겨졌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너랑 같이 자라고?”
“야, 아니, 내 말은, 거기 로지에 남은 방 있나 알아보자는 거지… 같이는 무슨.”
무슨 의도로 말한 것이든 간에, 민준의 귀는 이미 새빨개져 있었다. 송이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계속 민준을 쳐다보았다. 묘하게 무언가 역전된 상황이라는 게 느껴졌다. 살짝 더 오버하자면, 줄다리기에서 제 쪽으로 줄을 가져온 느낌이랄까. 송이는 솔직한 민준의 귀를 보며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하며 민준의 어깨를 양 손으로 붙잡아다가 반대편으로 떠밀었다. 이쯤이면 강제로 쫓아내야 한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렇다고 네가 내 아빠도 아니고.”
“야……”
“난 알아서 오늘 밤을 자알- 보낼 거니까, 걱정 말고 네 갈 길 가세요.”
“야야, 알았어, 알았어.”
송이가 등을 떠밀자 민준이 알았다며 항복한다.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민준에게, 고집 센 송이는 내일 봐, 하고 일단 손을 흔들고 본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나 핸드폰 로밍 안 했잖아.”
“아… 넌 왜 그런 것도 안 해 왔냐. 그럼 누구한테 빌려서라도 해.”
“무슨 일 없을 거야.”
“…따뜻하게 하고 자고.”
“어.”
“내일 8시쯤에 데리러 올게.”
“그렇게 빨리? 9시 넘어서 와. 일정 빡빡한 것도 아니잖아.”
“…알았어.”
갈 때까지 잔소리 몇 마디를 더 붙이고 나서야 민준은 돌아선다. 아쉬움이 가득한 발걸음. 한 번 돌아보고, 두 번 돌아보고, 세 번 돌아볼 때까지 송이는 민준에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딱 그렇게 세 번을 돌아보고 반대편으로 사라지는 민준을 보며, 송이는 큰 숨을 내쉬며 드디어 내쫓았네- 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들리지 않는 한마디를 더 했다.
“…나도 너랑 있고 싶지만… 그러기엔 이 곳을 너무 많이 놓쳐버릴 것 같아.”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풍경, 홀릴 듯한 에메랄드 물빛, 계절을 잊은 눈 덮인 산, 키가 큰 수 천 그루의 나무들, 시간을 알 수 없게 하는 하늘… 이 놀라운 것들을 앞에 두고도 너에게로 향하는 눈길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 무엇보다 믿을 수 없는 너를 보느라, 이 모든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 것만 같아서.
“……”
네가 없는 지난 밤들은 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웠어. 아마, 내일의 기약이 있는 오늘 밤은, 충분히 더 아름답겠지.
#
주변은 점점 어둑어둑해졌다. 송이는 혼자 있는 게 조금 썰렁해 장작에 불을 지피기로 했다. 캠핑장의 사람들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큰 장작 몇 개를 가져오고, 근처에서 작은 나뭇가지들을 모아왔다. 그러고보니 라이터 같은 게 없어 옆 사이트에 머물고 있는 가족들에게 빌리러 갔다. 갑자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I want fire 어쩌고,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해 겨우 점화 라이터를 빌렸다. 그 가족들이 고맙게도 불을 더 잘 피울 수 있는 작은 착화탄도 빌려주어 더 쉽게 불을 피울 수 있었다. 연기를 맡아가며 부채질을 열심히 하자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혼자 그렇게 해낸 것이 뿌듯해 스스로 박수를 짝짝짝 쳤다.
불 피우기 미션을 마친 송이는 작은 텐트 안에 들어가 침낭을 깔고 엎드려 누웠다. 텐트 입구 문은 열어두고 사이트 한 켠에서 따뜻하고 예쁜 색으로 타는 장작불을 보며 책을 펼쳤다. 그 많은 짐 속에서도 꾸역꾸역 책을 두 권 가지고 왔는데, 한 권은 지난 번에 다 읽어버렸기에 남은 한 권은 아껴서 읽기로 했다. 핸드폰은 비록 원래 기능인 전화가 안 되지만, 음악을 재생시키고 플래시도 켜서 조명으로 삼으니 제 기능을 다 했다.
책을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이 심심해졌다. 이 곳으로 오기 직전에 저녁을 먹었기 때문에 배가 그리 고픈 건 아니었지만. 송이는 아까 사온 체리를 먹기로 했다.
“아… 반 나눠주기로 했는데.”
마트에서 큰 봉지에 담긴 체리를 사고 민준과 반씩 나누기로 했는데, 그만 깜빡하고 민준을 보내버렸다. 민준은 오늘 밤에 먹을 간식이 없어 허전할 것이다. 숙소에는 잘 도착했으려나. 체리는 내일 또 같이 먹어야지- 생각하며 체리를 씻으러 텐트 밖으로 나섰다.
송이는 공용 개수대를 찾아 캠핑 사이트를 한 바퀴 빙 돌았다. 가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헤매다가 캠핑장 입구의 약도를 보고 나서야 찾아갈 수 있었다. 개수대를 발견했을 무렵, 갑자기 눈 앞에 번쩍- 불빛이 지나갔다.
“…뭐야, 번개인가?”
송이는 구름이 끼어 있어 흐릿한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여긴 산 속이고 짧은 사이에도 날씨가 변덕스러웠던 걸 몇 번 경험했기에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개수대 앞에 서서 가져온 체리를 물에 씻었다. 이윽고 번개와 함께 늘 따라오는 것, 천둥이 크게 쳤다. 우르르 쾅-!
“어우씨, 깜짝이야.”
놀라서 체리 몇 개를 떨어뜨렸다. 아까운 것. 송이는 허리를 숙여 떨어진 체리를 주웠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내리치는 빗줄기.
“……!?”
굵은 빗방울이 개수대 위의 지붕을 세차게 때려낸다. 송이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체리 봉투를 손에 들고 지붕 아래 멍하니 서 있었다. 분명 오늘 날씨 좋다고 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일단 여기서 제 자리까지 어떻게 돌아갈지 고민했다. 곧 그칠 소나기이길 바라면서 여기서 기다릴까,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우산이라도 씌워달라고 할까. 이 고요한 곳에, 이렇게 비가 오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다가 어렵게 피운 불이 비에 다 꺼졌을 것이 떠올랐다. 아, 그것도 아까워.
“……!!”
그리고 이어, 입구를 활짝 열어놓고 온 텐트가 떠올랐다.
“…내 텐트!”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오늘 밤 유일한 집이자 침대인 텐트를 구하러 가야했다. 송이는 빗줄기를 뚫고 달려갔다. 내가 정말 텐트 문을 다 열고 왔던가? 잠그고 왔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안에까지 비가 들어차면 안 되는데, 제발! – 송이는 간절히 빌면서 텐트 사이트로 돌아갔다. 이미 다 젖어버린 머리와 신발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뛰었다.
“하아…하…”
올 때는 헤맸는데 용케도 비슷비슷한 텐트 사이트들 중에서 곧바로 제 자리를 찾아왔다. 흙바닥은 빗물에 패여 질퍽거렸고 당연히 장작불은 꺼져있었다. 또, 불행하게도, 가장 중요한 텐트는 입구가 반쯤 열려 있어 그 안으로 강한 빗줄기가 그대로 들어차고 있었다. 망연자실. 말 그대로 망연자실이었다. 어떡하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
그래, 맞아. 민준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도민준이 같이 가자고 한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천송이.”
“……?”
그 때, 손님이 찾아왔다. 오늘 밤 유일한 나의 집에. 우산을 쓰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손님.
요새 좀 바빠서 올리는 텀이 길어졌네 ㅠㅠ 그래도 열심히 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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