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남자와 별인 여자

# 後我有 15 본문

# 後我有 15

SCIENCE AND LOVE 2015. 7. 7. 20:57

 

後我有 

열 다섯 번째 이야기



 

 

 

 문이 열립니다- 플랫폼에 서 있는 수 많은 사람들. 아무런 말도 없고 웃음도 없다. 하는 거라곤 하품, 핸드폰, 음악..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 그 어떤 관심도 없다. 관심이 있을 필요도 없다. 그냥 목적지에 가려는 것뿐.

 그 삭막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한 사람. 그냥 거기 있는 사람들과 별 다를 것 없는 한 사람.

 당연한 듯 그 뒤로 줄을 선 사람들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에 앞 사람과의 간격을 좁혀온다. 하지만 곧이어 열리는 문에도 가장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불과 몇 초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사람들은 그 몇 초도 견디지 못해 그 사람을 이상한 듯 쳐다보며 뭐야- 한마디씩 하고 지하철에 올라탄다. 그렇게 한 대, 두 대, 세 대 째. 그 사람, 그 여자의 발걸음이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문이 닫힙니다-


“아..”

 

툭, 누군가 급히 어깨를 치고 가는 바람에 잠깐 정신이 돌아온다. 하지만 문은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닫힌다. 또 놓쳤네. 축 처진 어깨로 손목의 시계를 본다. 8시 40분.

 

“...늦었을까..”

 

 출근 시간에? 아님 인도행 비행기 출발 시간에? 목적을 잃은 질문이 머리 속에 맴돈다. 닫혀진 문은 다시 열 수가 없다. 한 방향으로만 달리는 지하철을 다시 불러 세울 수는 없다.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

 

머리 위 전광판을 올려다보니, 다음 열차는 아직 오고 있지 않았다. 비어있는 그 철길에 다음 열차는 언제 다시 올까. 그 다음 열차를, 탈 수 있을까.

 

 몇 시간 전. 내 자신이 죽도록 싫은 순간이라는 건 바로 이런 때를 두고 말하는 걸지도. 평소에 별 일도 안 하던 뇌 따위는 너무나도 훈련이 잘 되던 모양인지, 절대 잠들 수 없을 것 같다가도 어느샌가 잠들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을 쿵쾅거리는 가슴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잘 안 쉬어지고, 머리가 아파 이대로 밤을 새는가 했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하나하나에 심장은 덜컥- 제가 살아있음을 알려왔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써보아도 오히려 그 괴괴함이 더 무서워 눈을 뜰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곤히 잠들었던 걸 보면, 멍청한 내 머리는 그깟 것에 내가 죽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나 잠들었을까,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가 문득 스쳐가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6시 50분. 10분 간격으로 4차례나 맞춰놓은 알람 중 첫 번째 알람에 일어나는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던 건지, 매일 자는 잠이지만 매번 기억나지 않는다. 얼른 문을 박차고 나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갑자기 두려운 생각에 가만히 앉은 채로 귀를 기울기만 했다. 거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길. 혹은, 알람 소리가 시끄럽다고 그만 일어나라고 문을 열고 들어와주길. 언제 그랬냐는 듯 문을 열고 들어 와. 아냐, 꼴도 보기 싫어. 빨리 가버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거 우리 잘 하잖아, 모르는 척 해줄게. 아니야, 이제는 그것도 지긋지긋 해. 계속된 미친 말들을 딱히 정리할 생각도 없이 그냥 머리 속에 뒤엉킨 채로 내버려두었다. 뭐 아무렴 어때. 생각하는 대로 살아지지도 않는데-

 


'...제길.'

 


 역시나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밖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짜증이 확 일었다. 어젯밤 밑도 끝도 없는 심술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금세 또 잊었는가 보다. 이불을 확 걷어버리고 방문을 벌컥 열었다. 사실 그 순간에도 겁이 나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

 


 거실을 돌아보며 한 쪽 눈만 겨우 떴다. 소파도 식탁도 티비도 화분도 시계도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도둑이 든 것도 아니니 당연했다. 딱 하나, 며칠 째 거실 한 켠에 있던 커다란 캐리어가 없었다. 도둑도 아니고 손님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자식의 흔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죽도록 싫었다. 하루 안 잔다고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면서, 넌 잠이 오니? 묻고 싶어졌다. 그 자식이 들어왔다 나간 것도 모르고 말 그대로 쳐-잤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그 큰 캐리어를 끌고 나갔을 소리도 못 듣고. 벼락치기 중이었던 대학교 4학년 1학기 기말고사 전날 밤, 밥 먹고 저녁 7시에 잠들었던 내 자신보다 지금이 더 싫었다.
 그래, 어쩌면 그냥 그 정도였을 수도. 괴로운 네 생각보다 그저 쉬고 싶었던 내 생각이 더 컸던 걸지도.

 

'..역시 최악이네.'

 


 공부는 내가 더 잘했었는데 똑똑하긴 그 자식이 더 똑똑했지. 그 잘난 도민준이 말한 대로, 역시 나는, 최악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최악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아저씨, 인천 공항이요.”

 

 

 

 





#

 


'지금 거신 전화는 당분간 수신이 정지되었습니다.'

 

 철저한 자식. 벌써 전화를 정지해놓고 갔다. 그거 미리 안 하면 어디 덧난다니.
 그래도, 희박한 가능성을 알면서도 달렸다. '떠남'으로 들뜬 사람들 틈에서 '만남'을 기대하며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공항은 늘 영화나 드라마에서 마지막 깨달음과 후회의 배경으로 사용되지 않는가. 그렇게 못된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따뜻하게 말했더라면. 진작에 진심을 나누었더라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비는 일 대신, 웃으며 안부를 빌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그를 찾아 헤매는 일 대신, 따뜻한 입맞춤을 하며 보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영화나 드라마의 극적인 장면처럼 이 곳에서 널 찾는다면, 잘못했다고 말할 텐데. 기다리겠다고 말할 텐데. 사랑한다고 말할 텐데.

 하지만, 아무리 많은 가정들을 하여도 그 주체가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한 눈에 알아볼 거라 생각했는데, 그 넓은 곳을 헤매고 다녀도 보이질 않는다.

 

“...하아...”

 

 송이는 출국장 한 가운데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서 있었다. 이미 몇 바퀴나 돌아본 곳이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비행기 이륙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민준은 아마 한참 전에 체크인을 하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출국 정보가 쓰인 커다란 스크린을 올려다보아도, 민준이 타고 가기로 한 인도 뭄바이행 편명 옆에는 '마감 예정' 이라고만 쓰여있었다. 만일은 만일이었을 뿐이다. 만분의 일. 만 중에 하나.

 

“하아..하...”

 

 탁,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든 다리가 풀리고, 스크린 앞에 주저 앉았다. 거대한 푸른 스크린의 글씨들이 앞으로 쏟아질 듯 압도해 온다. 무릎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최악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최악이다. 최악만은 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너는 노력해왔는데, 나는 뭘 한 거지.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야 할 너의 마음에, 나는 대체 뭘 한 거지. 울고 싶은 생각마저 들지 않는다. 내 자신에 너무 화가 나서, 내 자신이 죽도록 싫어서, 울 자격도 없어서.

 

“저기..”
“.....!?”

 

 차가운 바닥에 멍하게 주저앉아 제 자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있었다. 그 때 어깨를 툭툭 쳐오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급히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순간 어지러움이 느껴져 눈 앞이 캄캄했지만 손길이 느껴진 방향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여기 핸드폰 떨어뜨리셨는데요.”
“아...”
“괜찮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핸드폰을 주워 건네던 행인은 이마를 짚으며 비틀대는 송이를 보고 잠시 놀랐다가 이내 제 일이 아니라는 듯 가던 길을 간다. 힘 없이 핸드폰을 손에 쥔 송이는 주변에 있는 의자를 찾아 털썩 걸터 앉았다. 쉬고 싶다. 몸도 쉬고 싶고 마음도, 생각도 쉬고 싶다.

 

“..하....”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냥 잠들어버려 민준을 놓친 저를 그렇게 싫다 했으면서도 또 그런 생각이 든다니. 얼굴을 감싼 채 실소를 터트렸다. 멍청한 내 머리는 그깟 것에 내가 죽을 줄 알았던 모양인데. 하지만, 어쩌면, 정말 그깟 것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 한참 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스크린의 출국 정보엔 더 이상 뭄바이행 편명조차 쓰여있지 않았다.

 

“........”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 끝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이제 무얼 해야 할까, 텅 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손에 쥐어진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사실 아까부터 계속 울렸던 것 같기도 하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뿐. 이미 오래 전부터 울렸었는지, 발견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울림이 멈추었다. 곧이어 '선배님,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전화 좀 받으세요ㅜㅜ' 라는 후배의 문자가 날아든다. 부재 중 전화는 10통이 넘었다.

 그 문자에 답하는 대신 최근 통화 목록 가득 쓰여진 이름을 또다시 누른다. '지금 거신 전화는 당분간 수신이 정지되었습니다.' 몇 번을 듣고 나니 마치 그 말이 민준이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도민준.. “

 

 이름을 부르면 어느새 옆에 다가와 웃고 있던 그 친구, 그 단짝, 그 사람. 그 이름 앞에 '나의' 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친구, 내 단짝, 내 사람, 내 연인, 내 도민준..

 

함께 꾸던 꿈 속에서 먼저 벗어난 건 너일까 아님 나일까. 지금 서 있는 이 곳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됐든 이제는 더 잔인한 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



“무슨 일 있으면 연락을 해야지. 천송이씨 때문에 사무실 소란스러워져서 일도 제대로 안 되는 거 보이나?”
“...죄송합니다.”
“한 번도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래? 어?”
“........”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회사로 돌아온 송이는 부장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출근하지 않아 모두들 걱정스런 표정이었지만 화가 많이 난 듯한 부장님 때문에 눈치만 보고 있었다. 송이는 연신 죄송하다고 허리를 숙였다. 부장님이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냥 죄송하다고만 했다. 부장님의 호통은 계속 되었고 한참 후에야 자리로 돌아와 앉을 수 있었다. 한 곳으로 쏠렸던 시선들이 다시 흩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소처럼 각자 할 일을 한다.
그렇게 다들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만 한다.

 

“선배님 어떻게 된 거예요. 큰 일 나신 줄 알고 얼마나 놀랬는데요.”
“..미안. 그럴 일이 있어서.”
“어머,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땀 좀 봐.”

 

 아침부터 계속 전화를 해댔던 전주임이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옆으로 나가와 말을 걸어왔다. 이미 많은 땀을 흘린데다가 지칠 대로 지쳐 보이는 송이의 얼굴에 깜짝 놀란다. 송이는 끈적하게 젖은 얼굴을 쓸어 내리며 그대로 책상에 엎드렸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부장님이 이쪽으로 오는 걸 보고 전주임 송이의 어깨를 급히 흔들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괜히 헛기침으로 눈치를 한 번 주는 부장님의 시선을 피하며 몸을 일으키고 눈 앞에 보이는 마우스를 손에 쥔다.

 

“.......”

 

 

이렇게 나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만 한다.

 

 

 

 

 




#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오지 않길 바랐지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걸 바란 건 아니었다. 종일 아무 것도 먹지도 못하고 저녁 늦게 서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오전 근무 시간엔 반차를 쓴 것으로 하고 그만큼 야근을 해야만 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밀려드는 일에 아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기에. 진짜 잊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정신 차려라, 천송이..”

 

 집 앞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린 건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 동안이나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한숨을 쉬며 6층을 눌렀다. 가만히 멈춰있던 엘리베이터가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하고 멈춰있던 시간도 다시 흐른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으며 이제는 도민준이 살지 않는 603호를 지나고, 더 이상 도민준이 없는 604호 앞에 멈춰 선다. 왜 도민준의 생일 따위로 했는지 모를 비밀 번호를 눌러보아도 그것은 수 만 가지의 숫자 중 하나처럼 의미가 없다.

 

“........”

 

 집에 없는 것은 똑같은데, 곧 올 거라는 생각과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은 거란 생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컸다. 어두운 집 안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타 들어갈 것 같은 목이 갈라진 게 느껴졌다. 밥은커녕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던 것 같다.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주방의 불을 켜고, 컵을 찾아 들고,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따르고. 아주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몸 속에 퍼지지만 오히려 기분은 더 바싹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물을 벌컥벌컥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며 서 있자니 뒤꿈치가 쓰라려왔다.

 

“아으..내 뒤꿈치.”

 

 내려다보니 뒤꿈치가 죄다 까져 피가 나고 있었다. 구두를 신고 뛰어다닌데다가 이미 상처 난 것도 느끼지 못하고 계속 걸어 다녔더니 더 심하게 상처가 나 있었다. 당분간 운동화를 신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물을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

 

 살짝 들린 시선에 밝게 빛나는 주방 조명이 들어왔다. 며칠 째 수명을 다해 정신 없게 깜빡이고 있었는데. 송이는 천천히 컵을 내려놓고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밝은 빛에 머리가 아플 정도로 눈이 부셨다. 최근 몇 년간, 형광등을 갈아본 적이 없었다. 못을 박는 것도, 떨어진 벽지를 다시 붙이는 것도, 심지어 벌레는 잡는 것까지. 혼자 살면서 못 할 것도 아니었는데, 언제부턴가 굳이 제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내버려두었었다.  뒤를 돌아보니 분리수거통에 쌓여진 쓰레기들 틈에 새 형광등 박스가 버려져 있었다. 빈 박스만 있었고 갈아 끼운 헌 형광등은 없었다.

 


“...미친 놈.”

 

 참. 그 새벽에 들어와 형광등까지 갈아 끼워놓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못된 년 손 다칠까봐 직접 버리기까지 해 준 도민준,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속 다 긁어놓는 말을 듣고서도 그러고 싶더냐. 11년 동안 내가 상처 낸 네 마음이 얼만데 그러고 싶더냐. 온갖 희로애락, 볼 거 못 볼 거 다 드러내고 살았으면서, 단 하나만은 보여주지 못하던 우리 사이가- 뭐가 그렇게 아쉽더냐. 그랬으면서, 그런 상처, 문드러진 마음, 다 견뎌냈으면서 왜 마지막엔 그랬니. 너도 못된 건 마찬가지잖아. 나 미안하라고 그랬지? 앞으로 나 더 괴로워하라고 그랬지? 일부러 그랬지?

 

“..못된 놈.”

 

 송이는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어 눈 앞에 보이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대로 식탁에 스륵, 엎드렸다. 딱딱한 식탁 위에 천천히 머리를 기댄다. 그대로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밝아진 집안을 둘러본다. 더 이상 불빛은 깜빡이지 않는데. 눈을 계속 느릿하게 깜빡, 깜빡. 고여있던 눈물도 주륵. 한 쪽 눈에서 다른 쪽 눈으로 타고 흐른다. 밝은 불빛에 마치 그의 손길이 닿아있는 것 같아 눈을 감지도 못하고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흐릿해진 눈 앞에 네가 있었다가, 또 감았다 뜨면 없었다가. 자꾸 되풀이하면서 머리가 그걸 기억해주길 바란다.

 

“........”

 

 한참을 차갑고 딱딱한 식탁에 기대고 있으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자꾸만 시야를 흐리는 눈물에 눈이 따가워졌다. 그럼에도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모습에 혼란스러워졌다. 안되겠다 싶어 억지로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쏴아-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옷을 벗고 따뜻한 물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이미 눈물에 거의 다 지워진 화장을 지운다.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한 거울 속 못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잠시 후 김이 서려 보이질 않는다. 그래, 오늘이 다가 아닐 거야. 내일도 괴로워해야 하고 모레도 힘들어해야 해. 그러니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충분히 괴로웠어. 더 이상 힘들 것도 없어.

 

“........”

 

 욕조에 들어가 무릎을 모으고 웅크려 앉아 뜨거운 물줄기를 맞았다. 잔뜩 긴장되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감은 눈을 뜨기가 싫었다.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이 상태로.

 한참을 욕실에 있다 나와 푸석한 얼굴을 정리하고 머리를 말렸다. 위잉- 시끄럽게 돌아가던 드라이기 소리가 멈추자 끔찍히 싫은 정적이 다시 찾아온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핸드폰의 음악 어플을 켜 재생버튼을 누르자 이별을 노래하는 쓸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젠장. 요즈음의 마음을 반영한 듯한 재생 목록들을 보고는 노래를 그냥 정지시켜버렸다. 거실로 나와 소파에 주저앉았다. 늘 이런 풍경. 늘 같은 밤. 이렇게 모든 건 그대론데. 이게 원래 모습인데. 평소와 같을 뿐이라고.

 

“...리모코..ㄴ..”

 

 저를 덜 외롭게 느껴지게 할 바보 상자의 웃음이 필요했다. 힘없이 소파에 걸터앉은 채 습관처럼 손을 더듬어 리모콘을 찾았다. 리모콘은 언제나 그랬듯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곳에 놓여져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가지런히 놓여진 베개와 담요.

 

“........”

 

 송이는 리모콘을 손에 쥐었지만 티비를 켜는 것을 잊고는 잘 개어진 담요와 베개를 보았다. 저건 평소와 다른 걸까, 다르지 않은 걸까. 모르겠다. 내가 이 곳에 살던 동안에 없던 것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있었다. 넌 내 마음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있었다. 그래서 네가 있는 게 맞는 건지, 없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

 

 송이는 그 베개와 담요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베개를 꽉 움켜쥐고 얼굴을 기대본다. 익숙한 향에 코 끝이 시큰해져 온다. 너만의 체취가 묻어나는 이 베개를 베고, 나와 비슷해진 향이 배인 이 담요를 덮고, 일주일에 몇 번이나 늦게 집에 들어오는 너를 기다렸지. 그러면 기다리는 내 마음이 편했거든. 마치 네가 안아주는 것 같아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 같아서.

 

“........”

 

 네가 그러했듯 나도 천장에 붙어있는 유치한 야광별을 세며 함께 진짜 밤하늘의 별을 보고 싶어했지. 네가 한 말들을 되새기고 너의 눈빛을 떠올리고 너와의 추억을 돌아보며 많은 걸 깨달았지. 너는 참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런 너를 나도 참 좋아하는구나.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더 행복하겠구나.

 

“..으흑...”

 

 하지만 행복해지기엔 아직 어렸던 건지, 내가 부족했건 건지, 시간이 더 필요했나 보다. 11년이라는 시간도 턱없이 모자랐나 보다.

 

“..흐..흡..”

 

 오늘이 다가 아닐 것이다. 나는 내일도 괴로워해야 하고, 모레도 힘들어해야 한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생각했다. 충분히 괴롭고 더 이상 힘들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무섭다. 이게 다가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끝도 없이 괴로울 줄 몰랐다. 오늘이 가장 힘들고 점차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오늘이 가장 덤덤한 것이고 점차 힘들어질 거라는 것.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모든 곳에 너의 흔적이 남아있을 거라는 것. 그 흔적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있는데 시간의 흐름이 그것을 지워버릴 거라는 것. 사라지는 너를 그냥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이 더욱 괴로울 거라는 것.

 

“으흑..흐흑..”

 

 네가 가야 한다고 했을 때도, 말없이 네 등에 업혀있을 때도,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로 너를 보낼 준비를 할 때도, 네가 없어진 집 안을 둘러볼 때도,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공항으로 달려갔을 때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와 상사에게 혼이 날 때도, 지친 몸으로 혼자 집으로 돌아갈 때도, 피가 나는 뒤꿈치가 쓰라려도, 다 버텼다. 그랬음에도 감추었던 감정이 끝내 다 터져버렸다. 그럼에도 소리 내지 않았던 울음이 결국 터져버렸다.
 조용한 공간엔 더 이상 이 울음소리를 들을 사람도 없었지만 베개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운다. 목 놓아 울고 막힐 것 같은 숨을 들이쉬면 느껴지는 그리운 향기에 더 서러워진다.

 오랜 시간 동안 네가 스며들어온 것처럼, 그렇게 앞으로 조금씩, 천천히 말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게 후회된다. 그냥 다 말해줄 걸. 다 보여줄 걸.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다고. 앞으로도 이렇게 나를 사랑해달라고.

 

“.. 흐..흐흑..”

 

 아무리 후회해도 돌아올 수 없는 그의 향기와 그녀의 눈물이 뒤섞여 베갯잇에 적셔 든다.

 낡고 작은 집이 유난히 커 보인다. 밤이 길 것 같다.

 

 

 

 

 





 

 


#


Rrrrr-
“아흐..미치겠네..”

 


 매일 아침,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가 지겹도록 끔찍하다. 출근을 위한 아침은 언제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도 귀를 닫고 다시 눈을 감는다. 어차피 누군가 끄러 와주겠지, 생각하다가도 이제는 제가 꺼야만 한다는 걸 곧 깨닫는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 알람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 쓴다. 밤새 설친 잠이 너무 고프다. 제발, 더 자고 싶다. 쓸데없는 때엔 잘도 쳐자더니, 정말 필요할 땐 잠이 오질 않는다. 청개구리 같은 게, 꼭 누구 같네.

 

 

“밀지 좀 마세요!”

 

 기계처럼 씻고, 화장을 하고, 뭐 입을까 고민하고,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하고 늦어서 뛰어나가면 어느새 또 기계처럼 지하철에 타고 있다. 만원의 출근 지하철, 은근 슬쩍 뒤에서 밀착해오는 불쾌한 냄새의 아저씨를 피해 비좁은 자리를 옮긴다. 그 언젠가는 기댈 곳이 있어 나쁘지만은 않다 느꼈던 지옥철은, 역시나 천국이 될 수 없음을 느낀다.

 

 

“천송이씨, 그 유럽 벤치마킹 정리한 거 토스해줘.”
“네? 그거 아직..”
“아직? 그거 정리만 하면 되는 건데 아직도 안 하고 있으면 어쩌자고-”
“..부장님이 품의서 먼저 빨리 올려야 된다고 하셔서..”
“아, 됐고. 상무님이 보자고 하시니까 빨리 좀 해줘.”

 

 정신 없이 쏟아지는 일거리, 상사의 비위 맞추기, 떨떠름한 농담 무시하기, 맛없는 식당 밥- 이런 것들에 싫증을 느끼며 한숨을 쉰다. 김부장 앞에서는 네네- 방긋 웃다가 누구에게라도 욕하고 싶어 탕비실로 숨어든 후, 핸드폰 메시지 창을 켜고 마구 욕을 써댄다. 왜 나만 갖고 그래, 개불 말미잘같은 자식- 한가득 쓰지만 수신인 이름을 보고 전송을 누르지 못한다. 김부장 걔는 왜 맨날 그런대? 빨리 짤리라 그래, 라고 같이 화내주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마치 말한 것처럼 반쯤은 속이 시원하다.

 

 

“선배님, 안 들어 가세요?”
“어. 가야지...전주임, 혹시 약속 있어? 없으면 맥주나 한 잔 할래?”
“어음...죄송해요. 남자친구 만나기로 해서.”
“어어, 그럼 가야지. 나도 마침 일 남아있긴 해.”
“다음에 해요, 선배님. 그럼 전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하루 종일 앉아있는 다리가 저리고 하얀 모니터 화면에 눈이 침침할 때쯤 밖을 보면 해가 저물어 있다. 후배에게 지위를 이용하여 술자리를 강요한 듯한 선배가 된 기분을 느끼고 보니 사무실엔 저 혼자 남아있었다. 사실 아주 바쁜 일은 아니었는데, 그냥 왠지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여러 번 읽었을 듯한 보고서를 띄워놓고는 멍하니 앉아있는다. 마누라 잔소리가 싫어 집에 늦게 들어가려고 일부러 야근하는 아저씨들의 심정이 이런 걸까. 아, 집에 잔소리 할 사람도 없지 참. 왜 이러고 있나, 뻐근해진 어깨를 스트레칭 하며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킨다. 짧아진 해는 마치 퇴근 시간이 더 늦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회사 건물을 나서면서 습관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니 있었으면 하는 사람은 없음을 확인하고 오늘도 혼자 돌아간다.

 

 

 딸랑. 어서오세요- 집에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들러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맥주가 쌓인 냉장고 쪽으로 향해 안 쪽에 있는 시원한 캔을 집어 든다. '우리 내일 모레 서른이야.' 라고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그래, 서른이지- 중얼거리며 맥주를 내려놓는다. '몸 생각도 해야 할 걸.'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맥주 대신 요거트를 꺼낸다. 그래도 무설탕은 맛없어. 딸기맛 먹을 거야.

 

 

“뭐야. 관리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집에 들어가는 길, 우편함에 꽂힌 관리비 지로가 벌써 한 달이 지났음을 알린다. 평소보다 훨씬 많이 나온 관리비에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내었다가, 아- 두 사람 분이었지. 하며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요 며칠 그 누군가의 흔적을 느낀 것 중 가장 황당한 물건이다. 넌 관리비 지로 따위에도 있구나.

 

 

 “....어?”

 

 마침 수리 중이라는 엘리베이터에 에이씨, 짜증을 내며 계단을 올라간다. 6층도 왜 이렇게 힘든지. 운동을 해야겠어. 겨우 6층을 올라와 주욱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걷다 저 끝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 같다. 저기, 우리 집인데. 터덜 터덜 지쳤던 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고 비밀번호 키를 누르는 손이 파르르 떨린다. 설마, 설마.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간 집 안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고요하다. 현관에는 지저분하게 널린 제 구두들뿐.

 

“뭐야..”

 

 그냥, 그저, 깜빡하고 아침에 불을 끄고 나오지 않은 것뿐이었는데. 휴우- 긴 한숨을 내쉬며 힘 빠진 어깨로 널브러진 구두들을 정리한다. 신발장에 하나 하나 다 집어놓고는 지금 신고 있는 구두를 벗어 오른쪽 한 켠에 가지런히 놓아둔다. 누군가가 그 왼쪽을 채워 균형을 맞춰주길 바라며.

 

 

“저저, 나쁜 년. 쟨 뭐하는 거야. 당하기만 하고!”
“내일 더 춥대? 아, 입을 옷도 없는데.”

 

 막장 일일 연속극 속 나쁜 악역을 보며 주인공은 대체 언제 복수를 하냐며 욕을 하고, 뉴스는 끝부분에 날씨와 스포츠 부분만 본다. 이상하게 혼잣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 건, 그저 기분 탓이다. 빨래가 쌓여있으면 세탁기 속에 대충 집어 넣고 알아서 돌아가게 냅두고, 설거지가 쌓여있으면 내일 하지, 하고 미룬다. 요즘 인기 있다는 핸드폰 게임의 순위를 좀 올려보겠다고 열을 올리다가, 연예인들이 잔뜩 나와서는 하하호호 웃어대는 쇼프로를 보다가, 아 참- 빨래. 깜빡할 뻔한 세탁기 속 옷들을 꺼내 베란다에 대충 넌다. 매우 귀찮지만 안 널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

 

“뭐 했다고 12시야..”

 

 12시가 가까워 오면 의무적으로 내일 위해 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

 

 허무한 하루는 이렇게 빨리 가는데, 왜 아직도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달력의 숫자들을 세어보아도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지난 달 같다. 제자리 걸음은커녕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는 시간들이 섭섭하다. 답답한 가슴은 크게 숨을 내쉬어보아도 답답하다. 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새롭길 바라는 내일을 기대한다.
 

 티비를 끄고 거실 불을 끈다. 하지만 주방 쪽 불은 여전히 켜져 있다. 원래 그랬다는 듯,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하루 종일 켜져 있는 이 형광등이, 네가 오기 전에 다 닳아버리면 어떡하지. 원래 혼자였던 이 곳이 어느 순간 너무나도 넓고 어둡게 느껴진 건, 네가 이상한 걸 가르쳐줬기 때문이야.

 

“으으. 추워.”

 

 이제는 익숙해진 소파에 자리를 잡고 눕는다. 불과 한달 전 만해도, 누군가가 베고 잤던 베개. 누군가가 덮고 잤던 담요. 베개 밑에 손을 넣고 폭신한 쿠션에 깊게 얼굴을 묻는다. 곧 날아가 없어질 것 같은 향을 붙든다. 까끌한 여름용 담요로 빈틈없이 감싸고 몸을 잔뜩 웅크려 보아도, 이제는 이걸로 버티기 힘들어졌다.

 

“........”

 

 

더 버틸 수 없으면 어떡하지. 그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

 


“도민준씨 오늘도 어디 나가?”
“네, 차장님. 당분간 이번 주말 밖에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서..”
“와서 쭉 바쁘긴 했지. 천천히 둘러보고 와요. 길 조심하고.”
“옙, 다녀오겠습니다-”

 

 민준은 숙소 복도에서 만난 인도 연구소 주재원 차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섰다. 10월의 어느 주말의 아침 기운은 제법 서늘했다. 하지만 곧 시간이 지나면 한국의 한여름처럼 더워지기 때문에 조금 춥더라도 지금 입고 있는 반팔로 버티는 게 낫다.

 여기에 온지 한 달쯤 되었지만 주변을 제대로 보러 나가는 건 이번 주말이 거의 처음이었다. 이 곳에서 빨리 적응하는 게 당연히 중요하긴 했지만, 두고 온 복잡한 생각이 여기까지 쫓아올까봐 일부러 더 정신 없게 지내기도 했다. 오자마자 교육이며 업무며,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도 새로운 사람들과 잘 지내려 이 곳 문화도 배우고, 언어도 틈틈이 익혔다. 평일엔 그렇게 일을 하느라 바빴고, 주말엔 머물게 된 숙소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필요한 물건들을 사느라 슈퍼마켓을 얼마나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르겠다. 짐 많이 가져가지 말고 가서 사라던 천송이의 말을 괜히 들었다 싶었다. 하여간 걔 말 들어서 되는 일이 없는데.


 앞으로도 시간이 많기에 급할 건 없었는데, 점점 더 바쁠 것 같아 겨우 시간을 쪼개 근처 관광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 바쁘기도 바빴지만 낯선 곳에 왔다는 걸 실감이라도 하는 듯 몸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무거나 잘 먹는 입맛이었지만 강한 향신료 탓인지, 바뀐 물 탓인지 오자마자 탈이 나 오랫동안 고생을 했었다. 게다가 한국과의 시차는 3-4시간 남짓인데, 무슨 시차 적응이 필요한 건지 한동안 잠을 못 자기도 했었다. 하루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남들처럼 자정쯤 잠자리에 들지만, 눈이 떠지는 건 한국에서 일어나던 시간이었다. 이 곳 시간으로 새벽 3-4시쯤. 그러다 보니 잠이 부족한 건 당연했다. 며칠만 지나면 적응될 거라 생각했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철저히 한국 시간에 맞춰 돌아가는 몸에 나이가 들었구나- 한탄하다가 40대 중반의 차장님에게 한 대 맞기도 했다.

 

“........”

 

 아마도 매일 새벽, 나의 눈을 뜨게 한 건 벽 너머로 들려오는 모닝콜 알람 소리였을 것이다. 아무리 알람이 시끄럽게 울려도 끌 생각도 없이 잠들어 있는 너를 깨우기 위해 매일 아침 먼저 일어났던 것처럼. 겨우 잠든 새벽에 갑작스레 귓가를 때리는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나보면 저를 맞이하는 건 낯선 세상의 고요함뿐이었다. 잘 일어났겠지. 뭐 원래 처음부터 깨워준 것도 아닌데, 지각을 하든 말든, 나이가 몇이야-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해보려 애쓴다. 지하철 혼자 잘 타고 가겠지, 이상한 남자들이 찝쩍대는 거 아닌가 몰라. 짧은 치마 같은 거 입고 다니면 안되는데.. 걔가 키도 크고 몸매도 좀.. 아, 젠장. 미친 놈, 대체 무슨 생각이야- 눈을 감고 있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때문에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렇게 낯설디 낯선 새벽을 그냥 보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긴 만큼, 하루도 길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살면 시간이 빨리 갈 것이라 여겨 일부러 그렇게 지내왔는데, 얼마나 더 몸을 괴롭혀야 마음을 잊을런지.

 

 

“Hey, min jun, how are you?”
“Good, Yogesh. Where are you going?”

 


 숙소 앞에서 곧 이글거릴 준비를 하고 있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이럴까봐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려 하지 않았던 건데. 그러다 이 곳의 동료가 지나가다 인사를 해오길래 정신을 차렸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길을 나섰다. 숙소에서 20분 정도 걸어나오면 시내가 나온다. 뭔가를 타고 가고 갈까 하다가 구경도 할 겸 걸어가기로 했다.
 시내로 들어서면 하이데라바드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인 차르미나르가 보인다. 개선문 같기도 하고 첨탑 같기도 한 이 건축물 주변엔 사람이 굉장히 많고 복잡하다. 걸어 다니는 사람, 오토바이 같이 생긴 택시, 자동차들이 얽히고 설켜 제대고 사진을 찍기도 어려웠다. 위로 올라가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하고, 대충 인증용 사진만 찍고 복잡한 거리를 빠져 나왔다.

 

“어휴, 정신없어.”

 

 사람들이 많이 향하는 골목을 들어서니 우리나라 시장 개념의 바자르가 펼쳐져 있었다. 매연이 가득한 큰 거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입구부터 눈을 사로잡는 신기한 음식들과 물건들을 구경하며 군중들 속에 자연스레 들어섰다. 맛있어 보이는 과일을 보고 침이 고이다가도 이 곳에 온 이후로 주구장창 맡았던 커리의 강황 냄새가 코 끝을 찔러온다. 커리라면 벌써 지겹다. 언제 한 번 천송이가 인도식 커리라며 집에서 만들어 준 적이 있는데 그건 정말 비교도 안 된다.

 

“..진짜 커리를 먹어봐야 알지.”

 

 강황 열매를 한 번 손에 쥐었더니 냄새가 떠나질 않는다. 손을 옷에 대충 닦으며 바자르 속을 걸으니 길거리 음식 파는 곳도 몇 군데 보였다. 아침을 먹고 왔던 지라 다음에 먹어보겠다 생각하며 식품 골목을 지나니 화려한 장신구와 그릇 등을 파는 곳이 나왔다. 인도이지만 이 지역은 힌두교인과 무슬림이 반반이라고 책에서 봤듯 이 곳에는 히잡을 둘러쓴 여자들이 많았다. 가려진 얼굴과 몸에도 화려한 장신구를 찾는 여자들이 잔뜩 몰려있는 어느 한 노점상 앞에 멈춰 섰다. 원색의 휘황찬란함을 뽐내는 목걸이, 팔찌, 목걸이, 머리핀..그런 것들을 많은 여자들 틈에 겨우 자리를 자리잡은 채 구경했다.


 뭐라고 말하는 지 알아들을 순 없지만 이것 저것 몸에 대보며 서로 이게 예쁘니, 저게 예쁘니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거 보다 이게 더 잘 어울려, 아냐 그건 별로- 아무리 말해줘도 결국 자기 맘에 드는 걸 산다. 어딜 가나 여자들은 다 똑같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왜 물어보는지. 악세사리를 고르고 있는 여러 명의 인도 천송이들의 쫑알대는 목소리들이 귀를 간지럽힌다. 진열대를 쭉 둘러보다 눈에 들어오는 목걸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가끔 송이가 옷 위에 걸치곤 했던 꽤 화려한 목걸이들이 떠올랐다.

 

“이런 비슷한 거 있던데.. “

 

 영 새로운 걸 샀다간 욕도 먹고 하고 다니지도 않을 게 뻔하니. 목걸이를 손에 들고 상인에게 얼마냐고 어설픈 인도어로 물었다. 상인이 잠깐 생각하더니 손가락 3개를 펼쳐 보이며 써티써티를 외친다. 30루피면 여기 물가 치곤 좀 비싸다. 젊은 동양 관광객이니 그렇게 말한 게 뻔했다. 하지만 한국 돈으로 500원 남짓하는 거라 그냥 모른 척 30루피를 내밀었다.

 

“500원이라니..”

 

 얼마 전 이것의 1000배쯤 되는 반지를 백화점 매장에서 샀었지. 그리고 난 지금 그 곳과 너무나도 먼 이 곳에서 500원짜리 목걸이를 샀고. 가격이 얼마든, 너를 위한 거라는 건 똑같은데. 좀 더 근사하고 멋지게 말하고 싶어 미뤘던 말들이 후회로 다가온다. 그냥 말하면 될 걸. 어차피 목구멍 끝까지 차 있는 말, 내뱉기만 하면 됐었는데.

 

“........”

 

 왜 샀나 모르겠다. 500원짜리든, 50만원짜리든, 건네주지도 못 할거면서. 쓸데없는 놈.

 민준은 습관처럼 사버린 목걸이를 가방에 대충 넣고는 자리를 떴다. 바자르 구경은 이쯤으로 하고 버스를 타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버스로 30분쯤 가면 세쿤데라바드라는 동네가 나온다. 큰 호수 공원이 있어서 구경도 할 겸 뜨거운 한낮을 잠시 피하기도 할 생각이었다.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 낡은 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하늘 꼭대기로 올라선 태양은 어느새 온 몸을 땀으로 샤워한 것처럼 만들었다. 꿉꿉하고 더운 공기가 절로 한국의 가을을 그립게 만들었다. 지금 딱 놀러 가기 좋을 때 일텐데.

 

“으.. 더워.”

 

 세쿤데라바드역 앞에서 떠밀리 듯 하차했다. 이 곳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나온 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부터 지친다. 어제는 구름이 많아 다닐만 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장난이 아니다. 앞으로 두 번 더 맞이할 이 곳의 한여름은 상상도 되질 않는다. 민준은 후세인 사가르 호수로 향하는 길에 길거리에서 케밥을 하나 샀다. 말했듯 이 곳은 무슬림도 많아 케밥을 곳곳에서 판다.
 조금 걷자 나타나는 호숫가를 끼고 공원으로 들어섰다. 그늘을 찾아 호수를 바라보고 나무 밑 잔디밭에 앉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땀에 들러붙은 티셔츠를 펄럭이며 나무에 기댔다. 사람과 온갖 교통수단들로 발 디딜 틈 없던 도심에서 이런 한가한 곳을 오랜만에 보는 듯 했다. 더운 숨을 내쉬고 그나마 조금 더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잔잔한 호수 가운데 엄청 큰 불상이 있다. 종교의 특성이 뚜렷한 이 곳에 불상이 있는 게 신기했다. 나중에 인도 동료 직원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가방에서 아까 사두었던 케밥과 물을 꺼냈다.

 

 지잉-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케밥 포장을 뜯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며 케밥을 한 입 물었다. 맛있네- 맛에 감탄하며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Yogesh 님이 담벼락에 글을 남겼습니다'. 아까 숙소 앞에서 만났던 인도 연구소 동료가 SNS에 글을 남겼다는 알람이었다. SNS을 하지 않는 민준이지만 동료들이 친구 맺자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얼마 전에 가입을 했었다.

 

'너 왜 SNS 안 해.'
'그딴 거 왜 해.'
'다들 하잖아.'
'다들 하니까 나도 해야 돼? 귀찮아-'
'뭐야, 베프가 SNS 친구가 아니라는 게 말이 돼?'
'SNS 친구 아니면 베프가 아닌 게 되냐?'

 


 천송이가 하라고 할 땐 귀찮다며 죽어도 안 했었는데. 물론 천송이의 담벼락을 통해 자신이 모르는 그녀의 일상을 가끔 훔쳐보긴 했지만. 이 곳에 적응을 잘 하려면 동료들과도 친하게 지냈어야 했기에 썩 내키지 않았지만 SNS 가입도 하고 친구 요청까지 받아들였었다. 민준의 SNS 공간엔 주변에 크게 볼 건 없지만 잘 구경하다 들어오라는 짧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고맙다는 댓글을 쓰고는 어플을 닫으려다 그냥 지나쳤어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

 

'알 수도 있는 사람' 목록에 뜬 이름, 천송이. SNS는 참 친절하게도 알 수도 있는 친구까지 소개시켜준다. 내가 알 수도 있는, 내가 아는, 내가 알았던, 내 친구.

 

“........”

 

 활짝 웃고 있는 프로필 사진 속 그녀. 아주 작은 사진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눈에 들어온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한다. 곧 그것이 자신이 찍어준 사진임이 떠오르며 그 때의 순간과 함께 그녀가 눈 앞에 찾아온다. 그냥 거기서 멈췄으면 됐을 걸, 뭔가에 끌리듯 그 이름을 눌렀다. 이래서 습관이라는 게 무서운 거다. 조금 힘들긴 했지만, 한 달 동안 잘 지냈으니까 지금쯤 그녀의 소식을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해본다.

 

“후우- ...”

 

마음의 준비할 새도 없이 화면이 바뀌며 나타난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얼굴과, 그녀의 말들. 그것들을 보기 전에 잠깐 고개를 들어 넓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봐도 될까. 되겠지. 보고 싶은데. 숨을 한 번 내쉬고 다시 화면을 내려다본다. 마치 그녀를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2014년 10월 18일


여기는 설악산. 지금 이 곳은 단풍이 절정이야.
알다시피 저질체력이라 쉬운 코스로 왔지만 오길 잘 한 것 같애.
혼자 와서 더 힘들긴 하지만, 다음엔 같이 왔으면 해.
..잘 지내지?


ㄴ홍혜인 : 혼자 갔어? 요새 혼자 잘 쏘다니네ㅋㅋ담에 같이 가자.
ㄴ박윤정 : 송이야! 사진 넘 이쁘다ㅎㅎ 너도 잘 지내? 언제 함 보자

 

 

 

 

2014년 10월 14일


김부장이 또 괴롭힘 ㅠㅠ
그래도 이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능력을 키우는 중이야.
사람은 미워하지 말래잖아. 알고 보면 따뜻한 분이셔.
누가 괴롭히는 사람은 없니? 다 데리고 와, 내가 혼내줄게.


ㄴ홍혜인 : 김부장님 ㅋㅋ우리 송이 괴롭히지마여ㅋㅋ
ㄴ김준영 : 우리 팀 과장님도 좀 혼내줘ㅋㅋ

 

 


2014년 10월 8일


김치찌개 또 엄청 많이 했다. 수십 번도 더 만들어 본 건데
왜 맨날 양 조절이 안 되는 거지ㅋㅋ
이번주는 내내 이거나 먹어야겠다. 언제 다 먹어 ㅠㅠ
흠.. 와서 같이 먹을래?


ㄴ이지영 : 나! 나 줘ㅋㅋ나도 불쌍한 자취생이잖아
ㄴ김준영 : 김치찌개도 할 줄 아냐ㅋㅋ

 

 

 

며칠 간격으로 셀카와 함께 일상을 남기고 있는 송이의 담벼락의 글들. 그런 글들이 꼭 그녀가 옆에서 말하고 있는 듯 해서 웃음이 나왔다.

 

 

 

2014년 10월 3일


따뜻한 오후에 한강에서 맥주 한 잔.
더 추워지면 못 올 것 같아서 와 봤어. 아- 술은 일주일만이야.
엄청 자제 중이거든. 진짜 레알 낼 모레면 서른이잖아.
거기는 따뜻해?


ㄴ유세미 : 송이야♡  셀카 잘 나왔네! 우리가 서른이라니 ㅠㅠㅠㅠ
ㄴ이재웅 : 야 ㅋㅋ 천송이ㅋㅋ 부산은 따뜻해! 놀러와ㅋ
ㄴ홍혜인 : 불쌍하게 왜 혼자 술 먹냐 ㅠㅠ 나 부르지

 

 

 

그리고 어렴풋이 알았다.

 

 

“..어, 여긴 따뜻하다 못해 더워.”

 


 그녀가 지금, 어느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는 걸. 100명도 넘는 수많은 SNS 친구가 있음에도, 그 목록에는 없는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있다는 걸. 그 누군가가 궁금해할까봐, 자신의 일상을. 그 누군가가 얼굴이라도 잊어버릴까봐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까지 함께.
 민준은 저도 모르게 나온 웃음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천송이에 관한 웃음이. 스크롤을 내리며 몇 개의 글을 보다 보니 어느 기점으로부터 글이 거의 없었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다가 최근부터 다시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 기점은 이 글로부터였다.

 

 

 

2014년 9월 15일


'복잡한 연애 중'

 

 

 

“........”

 


 여전히 그녀가 있는 시간에 맞춰져 있는 시계를 본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억지로 피하려고 해도 너에게 맞춰져 있는 나의 시간.

 

 

 천송이. 주말이니 지금쯤 느지막히 일어났겠네. 잘 잤어? 여긴 엄청 더워. 한낮엔 도저히 못 돌아다니겠더라. 한 여름엔 어떻게 지낼런지. 어제는 골콘다 성이라는 곳에 다녀왔는데 엄청 커서 혼자 돌아다니다가 그 속에서 길을 잃을 뻔 했어. 오늘은 열심히 사람 구경만 하고 있네. 지금 엄청 큰 불상이 호수 가운데 떡하니 있는 공원에 있어. 아, 나 바자르에서 목걸이 샀는데, 너 할래? 아- 맞아. 그냥 첨부터 너 주려고 산거야. 아무튼 이게 500원이라고 하면 엄청 놀랄 걸? 지금 이렇게 짧은 여행을 하고 있긴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하는 건 한국에서랑 똑같네. 회사 가기 싫다-

 

 

 이 많은 이야기들을, 언제 할 수 있을까. 너와, 언제 어디서부터 이 복잡한 연애를 풀어가야할까.


 근데 말이야, 이게 어쩌면 복잡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봤어?

 

 

 

“보고 싶다, 천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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